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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6일(토) 밤에 <거상 김만덕>이 첫 방송을 했습니다. 텔레비전을 켜놓긴 했는데 분주한 때라 왔다갔다 하며 겨우 분위기만 맛 보았습니다. 제주도 출신 고두심씨가 할멈으로 등장하는군요. 아마도 저 많은 어린이들 가운데 주인공인 어린 만덕도 있겠지요. 할멈은 이들을 가르치며 만덕의 뛰어난 재능을 보고 더욱 열심히 가르쳐 줄 것 같군요.

참, 고두심씨는 아주 오래 전에 같은 인물인 '김만덕'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아 열연한 바 있습니다. 이제는 할멈 역할이라니 격세지감입니다. 그래도 아리따운 모습은 변함 없습니다. 제주도 사투리는 들리지 않던데 다음엔 꿋꿋하게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김만덕이 누구인지 궁금한 사람이 많을거라 생각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장점을 살려 마련한 사진들을 함께 넣어 풀어 보렵니다.

김만덕 영정 김만덕을 기려 그린 영정.
▲ 김만덕 영정 김만덕을 기려 그린 영정.
ⓒ 만덕관 소장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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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만덕은 조선 시대 영조 때에 태어나 정조를 거쳐 순조 때까지 살았던 사람입니다. 서기 연도로 보자면, 1739년~1812년이니, 일흔 네살에 돌아가셨군요.

그녀의 삶에는 '기녀, 행수, 내의녀'라는 가지가 붙습니다.

첫째, 기녀는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오갈 데 없는 만덕을 눈여겨보던 한 동네의 할망이 양녀로 들이며 발을 디디게 된 것으로 전합니다.

양어머니가 바로 물러난 기녀, 퇴기였던 거지요. 기녀 생활을 하던 그녀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난 뒤엔 제주목사를 찾아가 개인사를 설명하고 기적에서 빼달라고 하니 그리 해주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당시 정승인 채제공이 지은 <만덕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 <만덕전>은 이미 김만덕이 임금 정조를 뵙고 상당한 이슈가 된 뒤에 그녀를 기려 지은 글이라 사실만을 쓴 것인지 미화하려 한 것인지 알아내기 힘듭니다. 다만 오늘날, 기녀사회에서 발을 뺐냐 말았냐 하는 것이 그녀에게 흠결이 된다고 보는 고루한 사람은 몇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녀 김만덕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기녀 김만덕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만덕관 소장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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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행수입니다. 행수(行首)는 '어떤 한 무리의 우두머리'쯤으로 해석되는 듯한데요. 고전 드라마에서 언뜻 들은 듯도 합니다. 나중에 나오는 의녀 무리의 행수라는 것인지 객주 또는 중개상의 그것인지 헷갈립니다. 어쨌든, 김만덕은 건입포 부근에 객주집을 차립니다.

건입포의 오늘날 모습 산지포를 거쳐 오늘날 제주항이 되었다.
이 편 안쪽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김만덕이 객주집을 운영했던 곳이 있다.
▲ 건입포의 오늘날 모습 산지포를 거쳐 오늘날 제주항이 되었다. 이 편 안쪽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김만덕이 객주집을 운영했던 곳이 있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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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제주항인 건입포는 당시로도 제주의 관문이라 할 만한 곳입니다. 상당히 좋은 입지를 가진 이 곳에서 차린 객주는 단순히 술, 음식과 숙박만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중개상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됩니다.

인근의 상권이 성장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했을 겁니다. 현재 가까운 곳에 있는 동문시장과 칠성로, 중앙로 일대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시의 중심 상권을 형성합니다. 이 일대의 상권을 장악했을 것으로 보는 김만덕은 제주에서만 나는 물건들을 배에 싣고 나가서 비싼 값에 팔고, 또한 제주에 나지 않는 물건을 들여와 파는 중개업으로 큰 부자가 됩니다.

산지천과 동문로 일대 오른쪽 가까이 보이는 산지천 물이 건입포로 흘러나간다. 동문로 일대는
구제주시 상권의 중심지에 드는 곳이었다.
▲ 산지천과 동문로 일대 오른쪽 가까이 보이는 산지천 물이 건입포로 흘러나간다. 동문로 일대는 구제주시 상권의 중심지에 드는 곳이었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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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녀가 살았던 시기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졌던 때입니다. 중앙에서 내려온 관료와 지방 토호의 못된 짓들, 혹독한 조세, 공납, 군역 따위와 기근도 겹쳐서 제주도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방어와 세 징수가 곤란해지니 중앙은 막무가내로 '제주도 사람들은 섬 밖으로 나오지 마라'는 명령을 내리고 맙니다.

극도의 통제사회가 되어 버린 거지요. 그 수단인 배를 뗏목배인 떼배, 이른바 테우 말고는 소유할 수 없게 해 버린 것입니다. 또한 돛단배(범선)의 출입은 관의 엄격한 통제 아래 놓입니다.

어느 정도 느슨해졌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때에 중개업을 한다는 것은 관리들뿐만 아니라 다른 육지의 상인들과도 상당한 인맥을 필요로 했을 것이고, 또한 그것이 성사되면 독점적인 형태의 사업도 가능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렇게 부를 거머쥔 김만덕에게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가 옵니다. 그 기회는 '기근'입니다. 섬 사람들이 이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분위기가 비슷한데, 그나마 마련한 쌀을 싣고 제주도로 오던 배가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김만덕이 사재를 털어 쌀을 사고 배를 마련해 제주도에 실어와 관아에 넘겨줍니다. 이런 사실을 제주목사가 조정에 알립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거론이 되는 거지요.

정조20년(1796) 11월 25일입니다. 나이 58세 되는군요.

'제주(濟州)의 기생 만덕(萬德)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목사가 보고하였다.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바다를 건너 상경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하였다. 허락해 주고 나서 연로의 고을들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금강산을 보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니 허락을 받아야 했던 거네요. 이또한 '출륙금지령' 때문인 것입니다. 요새는 금강산을 보는 것 자체가 허락 받을 일이지만 말입니다. 아, 보고싶다, 금강산!

궁궐로 들어가 임금님을 뵈오려니 천한 신분이 문제가 될 거라 여겼나봅니다. 그래서 '내의(의녀) 반수'라는 직함을 얻어 해결하였다고 합니다.  이 직책으로 행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만덕의 숨결을 느껴보기 위해서는 먼저 사라봉 자락에 자리잡은 모충사에 들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곳에는 '만덕관'이라는 조그만 기념관이 있어 그림으로나마 그 삶을 엿볼 수 있으며, 더우기 그 옆에는 묘역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충사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볼 수 있습니다.

김만덕 묘 모충사 안, 동쪽으로 가면 만덕관과 함께 있다. 비석에는 '행수 내의녀 김만덕지묘'라 새겨져있다.
▲ 김만덕 묘 모충사 안, 동쪽으로 가면 만덕관과 함께 있다. 비석에는 '행수 내의녀 김만덕지묘'라 새겨져있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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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의 앞에는 한자로 된 '은광연세'라는 글을 새긴 큰 돌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 이것도 그녀를 기려 쓴 것입니다. '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그득하게 비친다'쯤 될까요. 또한 모충사 안 산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 그녀를 기리는 높은 탑도 세워져 있습니다.

은광연세 추사의 글씨를 돌에 새긴 것이다.
▲ 은광연세 추사의 글씨를 돌에 새긴 것이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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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의 묘는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서쪽으로 좀 더 내려가면 나오는 '고으니모루'라는 곳에 있었던 것을 1977년에 옮겨온 것입니다. '고으니모루'는 높은 언덕지대라서 제주읍성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고으니모루 일대에서 내려다 본 제주시 동문로터리에서부터 형성된 경사길 언덕이 여기 사라봉자락까지 이어진다.
▲ 고으니모루 일대에서 내려다 본 제주시 동문로터리에서부터 형성된 경사길 언덕이 여기 사라봉자락까지 이어진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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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으니길 표지판이 있는 일대 풍경 고으니모루 일대의 오늘날 모습이다.
▲ 고으니길 표지판이 있는 일대 풍경 고으니모루 일대의 오늘날 모습이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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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덕에서 동문로터리까지 내려와 옛 건입포 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앞서 말했던 김만덕이 객주집을 운영했던 터의 위치를 알리는 표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김만덕의 객주터 표석 김만덕이 운영한 객주집이 있던 자리.
▲ 김만덕의 객주터 표석 김만덕이 운영한 객주집이 있던 자리.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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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와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분주히 살았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부근에는 만덕로길이라는 이름의 도로명이 몇 보입니다.

만덕로 길 표지판 김만덕의 삶터를 중심으로 붙여놓은 길이름이 그녀의 자취를 더듬어보게 한다.
▲ 만덕로 길 표지판 김만덕의 삶터를 중심으로 붙여놓은 길이름이 그녀의 자취를 더듬어보게 한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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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신사임당으로 결정된 5만원권의 인물로 거론되기도 하였습니다. 계급에 굴하지 않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시이오(CEO)라는 점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라는 점을 높이 산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요즈음 보게 되는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극적 전개와 현대적인 면을 많이 담는 것을 특징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야말로 '극'이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미리 알고 드라마를 보는 것도 재미있게 감상하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만덕#거상김만덕#제주도#고으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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