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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내 얘기.

지난해 12월 더는 가학적인 삶이 싫어 직장을 관두고, 10여 년에 걸친 서울생활도 신물이 나 올해 1월 하향(下鄕)했다. 그리고 부모님집 근처에 작은 거처를 마련해 최근 3개월간 오로지 '쉬는 일'에 몰두했다. 너덜너덜해진 심신을 어머니 주시는 밥과 양서로 정화하고,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하루에 한 시간씩 달리기를 했다.

그리고 한 달 전쯤 여행을 결심하고, 그 첫 번째 장소로 일본을 택했다. 왜 하필 일본이냐 하면, 농담이 아니라 '가라앉기 전에 한번은 가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악담을 하려는 게 아니고('일본 침몰' 같은 상황은 절대 오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 여행 오기 사흘 전에도 칠레 강진으로 태평양 연안 전 국가에 지진해일 경보가 발령됐고, 그 중에서도 일본은 홋카이도 지진 이후 17년 만에 대형 지진해일 경보를 발령했지 않은가.

도쿄 중심부는 거대한 활성 단층이 형성되어 진도 8 이상(1995년 고베대지진 7.2, 1923년 간토대지진 7.9)의 초대형 직하지진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 정부 산하기관인 일본의 중앙방재회의는 앞으로 30년 내에 수도 도쿄에서 이와 같은 직하지진이 발생할 확률이 70%나 된다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 <日本을 묻다>안에서

더군다나 이런 자료까지 보고 있자니 어쨌든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는 이 지긋지긋한 수식어가 대체 무슨 의미인지 직접 보고 느끼고 싶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대기실에 앉아 승선을 준비하고 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대기실에 앉아 승선을 준비하고 있다. ⓒ 이명주

이리하여 지난 3월 4일 일본에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일본까지는 배를 타고 왔다. 비행기라면 2시간이었으면 됐겠지만, 배로는 하루의 3/4인 18시간이 걸렸다.  (주)팬스타드림닷컴의 오스카 정기 여객선을 이용했는데, 온라인 예약 5% + 복편 할인 10%를 적용해 왕복 티켓 225,000원이다.

내 여행의 구호는 말 그대로 '맘대로 떠나 무작정 살다오기'지만, 딱 하나 환경에 해(害)가 되는 행위는 최소화하자는 게 목표다.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속편이 연이어 나온들 이런 얘길 하면 지레 도리질부터 치는 사람이 있지만,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 한 사람의 무절제한 생활은 적에게 쏴야 할 마지막 총알을 자기 발등에 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싶다.

 오스카 정기여객선 '팬스타드림호'의 로비 모습
오스카 정기여객선 '팬스타드림호'의 로비 모습 ⓒ 이명주
아무튼 그런 이유를 우선 해서 배를 택한 것인데, 이 이동수단의 매력이 오로지 그 뿐이라고 생각하면 상당한 착오다.

물론, 팬스타드림호는 지난 달 25일에 화물램프 고장으로 8시간이나 귀항이 지연되는 소동을 빚었고, 내가 탑승한 당일에도 하역작업이 늦어져 아무런 안내방송도 없이 3시간 가까이 출항을 지연시켰다.(관계자 분들 반성하시길!)

그러나 이 모든 불찰을 감안하고도 1박2일의 선상여행은 충분히 멋졌다. 우선 배에 승선해 객실 확인과 체온 측정을 하는 동안 로비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파란 눈에 백발의 남자가 말끔히 턱시도를 차려입고 귀에 익은 감미로운 팝송들을 색소폰으로 연주했다.

꽤나 멋드러진 연주였는데 안타깝게도 박수를 치는 이가 없었다. 그런 반응엔 이골이 났단 듯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곡을 이어가는 연주자에게 미안한 맘이 들었다. 그래서 어차피 길게 늘어선 대열에 끼어 있느니, 아예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연주를 경청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엄지 손가락을 번쩍 들어보였다('정말 근사해요!')

객실에 들어가 짐을 놓고 간단히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이번엔 레스토랑에서 영화를 무료 상영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남은 음식을 얼른 먹고 1층으로 내려갔다. 영화는 <굿모닝 프레지던트>.

 선내 레스토랑에서 무료 상영해준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한 장면
선내 레스토랑에서 무료 상영해준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한 장면 ⓒ 이명주
레스토랑 앞쪽 공연무대의 스크린은 화질은 별로였지만 그럭저럭 극장 못지않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영화평을 살짝 덧붙이면 분명 좀전까지 장동건이 대통령이었는데, 별안간 고두심이 '각하'가 되면서 심히 혼란스러웠다. 전하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구성이 상당히 허술해 흐름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별 2개."

영화가 끝나고 2층 휴게실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간단히 여정을 기록한 뒤 객실로 돌아왔다. 2층 침대가 나란히 2개 있고, 선반과 옷장, TV가 구비되어 하룻밤 머물기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4인실인 우리 방엔 2명만이 배정돼 더욱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나와 한 방을 쓰게 된 아주머니는 10년 만에 친구를 만나러 일본에 가는 길이라 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같은 동네 사람임을 알게 됐다(대개 이런 경우, 반갑기도 하지만 조심스럽다). 올해 66살이 됐다는 아주머니는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상당히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2층 침대 2개와 선반, 옷장, TV가 갖춰진 4인용 객실
2층 침대 2개와 선반, 옷장, TV가 갖춰진 4인용 객실 ⓒ 이명주
밤이 깊자 고베 지진 당시 오사카에 있던 얘기며, 배 안 에서 웬 여자가 죽은 채 발견된 얘기며(악!) 평소 여행 다니며 겪었던 에피소드를 실감나게 들려주셨다. 홀로여행이 너무 적적하지 않았음 했는데 출발이 좋다.

10시쯤 됐을 때, 선내 안내방송으로 '관문대교' 통과 시각을 알려주었다.

관문대교는 규슈와 혼슈를 잇는 다리로 만조시에 아래부터 다리 정중앙까지가 61미터에 이르러 대형선박들이 통과할 수 있는 다리다.

시간에 맞춰 갑판에 올라가니 칠흑 같이 어두울 거라 생각한 주위가 규슈 도심에서 뿜어져 나온 불빛들로 초저녁 같이 환했다. 도시 속에 살 땐 그저 어지럽고 소란스럽다 불평하지만, 사람사는 마을의 불빛은 여행자에겐 안도감을 준다.

30여 분쯤 기다렸을 때 드디어 관문대교 통과. 그런데 경관은 우리나라 한강대교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낮에 봤더라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다소 맥이 풀렸다. 하지만 배가 다리 중앙을 지나갈 때, 누군가 "엇, 부딪힌다!" 하고 소리를 쳐 제법 긴장을 했다. 안 닿을 것을 뻔히 아는데도 행여나 싶어 몸이 움츠려졌다.

부산한 하루가 지나고 갑판 위 시계가 자정을 가리킬 때 객실로 돌아와 눈을 붙였다.

 선상 위에서 맞은 아침.
선상 위에서 맞은 아침. ⓒ 이명주

(다음 날)

뒤척임 한 번 없이 숙면을 취하고 6시쯤 일어났다. 바람을 쐬러 갑판에 올랐더니 사위가 아직 어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을 비집고 나온 햇살이 바다 위로 쏟아졌다. 가볍게 몸을 풀고 상쾌한 기분으로 내려와 잠에서 깬 아주머니와 함께 사우나를 하러 갔다.

전날 "배 안에 사우나가 뭐 있겠어" 하시기에, "그렇겠지요" 했는데, 아니 웬걸! 사우나실 문을 열고 들어가 사물함에 옷을 벗어두고 오른쪽에 난 미닫이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갔는데, 탕 옆에 붙은 창밖 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마치 태평양 한 가운데를 유영하는 기분으로 온탕에 앉아, 바로 눈 앞에 펼쳐진 바다와 하늘과 섬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배로 여행하실 분들은 선내에 마련된 사우나실에 꼭 한번 들러보시길.
배로 여행하실 분들은 선내에 마련된 사우나실에 꼭 한번 들러보시길. ⓒ 이명주
나란히 창을 바라보고 있는 알몸의 두 여자와 그 절경이 묘하게 인상적이라 당장이라도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그림으로 남겼다.(아쉬운 분들은 직접 경험하시길!)

아침 식사는 아주머니께서 손수 만들었다며 주신 유부초밥과 편의점에서 산 꿀물로 해결했다. 밥을 먹고나자 다시 영화상영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작품이 영 내키질 않아 보지 않았다.(지구 멸망을 그린 '2012'였다)

사흘 비오고 하루 맑은 날씨가 계속 돼 일본에서 맞는 첫날은 반드시 맑았으면 했다. 이른 아침까지도 흐릿해서 틀렸나 했는데 오스카항에 다다를 때쯤엔 하늘이 완전히 개어 눈이 부시도록 환해졌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18시간에 걸친 배 여행이 끝났다. 바보 같다는 걸 알지만, 일본 땅이 물 위의 부표처럼 흐느적거리진 않을까 했던 우려는 당연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하룻밤을 함께 한 아주머니와 작별인사를 하고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자, 이제부턴 자전거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탄소배출 0%를 지향'하는 여행이라고. 전날 빗속에서 자전거를 운반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그러기를 참으로 잘 했단 생각이 든다. 그럼 오늘밤 묵을 숙소를 찾아 길을 나서볼까나~!

 새벽까지도 흐릿했던 날씨가 오스카항에 다다르자 눈이 부실 정도로 쾌청해졌다.
새벽까지도 흐릿했던 날씨가 오스카항에 다다르자 눈이 부실 정도로 쾌청해졌다. ⓒ 이명주

덧붙이는 글 | '맘대로 떠나 무작정 살다오기' 일본 편. 그 두 번째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집니다.



#일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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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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