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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에서 내려다 보는 부산 시내 속살
금정산에서 내려다 보는 부산 시내 속살 ⓒ 김찬순

'삼월'은 그 어떤 계절보다 마음으로 먼저 봄을 느끼는 계절이 아닐까 싶다. 삼월은 여느 달과 다르게 민족이라든지 애국이라든지 그런 단어를 의미있게 새겨 보는 계절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이 얼마나 봄을 기다렸던가.

늘 주말이면 찾는 금정산이지만 삼일절(지난 1일)에 오르니, 내 마음의 자세부터 약간 달라지는 듯했다. 금정산은 여느 산과 달리 호국의 산이며, 민중의 산이다. 그리고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산이다.  

금정산에 대해 <동국여지승람>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길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가 10여척이며 깊이는 7척쯤 된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그 속에 놀았다고 하며, 금빛 나는 우물 곧 '금정'이란 산 이름과 범천의 고기, 곧 범어라는 절이름의 범어사가 지어졌다."

고당 봉
고당봉 ⓒ 김찬순

금정산성의 흔적은 금정산의 최고봉인 고당봉에서 내려다 봐야 가장 잘 나타난다. 금정산은 주봉인 고당봉을 비롯하여, '원효봉', '의상봉', '미륵봉', '계명봉', 파리봉 등이 있다.
그러나 재미 있는 것은 고당봉의 한문표기다. 무려 고당봉의 한문표기가 7가지나 된다. 고담봉(高潭峰), 고당봉(高堂峰), 고당봉(故堂峰), 고당봉(故黨峰), 고단봉(高壇峰), 고단봉(故壇峰), 고당봉(高幢峰)이다. 그러나 국립 지도원의 금정산 지형도와 부산시사, 금정구지에는 고담봉(高潭峰) 혹은 고당봉(故堂峰)으로 돼있다.

고당봉은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칠일칠야를 일심으로 독경한 곳으로 알려 지고 있다. 이에 고당(高幢)이란 어원이 생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당은 불교에서 최고의 법문을 높은 깃대에 세운다는 의미를 지닌다.

고당봉에서 내려다 보는 부산의 속살은 너무 눈이 부시다. 그리고 금정산성 복원사업으로 잘 정비된 금정산성은 현재 사적 제 215호로 지적되어 있다. 부산시 장전동 금정산성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 혼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 (숙종 27)에 국방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해상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 

사방 탁 트여서...속이 시원하다...금정산은...
사방탁 트여서...속이 시원하다...금정산은... ⓒ 김찬순

기암 절벽이 많은 금정산
기암절벽이 많은 금정산 ⓒ 김찬순

금정산성 찾아서
금정산성찾아서 ⓒ 김찬순

부산시 사적 215호, 금정산성 국내 최대 산성

금정산성은 둘레 1만 7336m, 높이 1.5~3.2m의 우리나라 최대 산성이다. 장전동 금정산성기록에 따르면, 고대부터 남해안에 왜구의 침입이 심했다. 이에 1667년(현종 8년) 통제사 이지형이 임금의 명으로 성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상기 기술 내용은 확실치 않다고 부언되어 있다. 성이 제대로 모습을 갖춘 것은, 1701년(숙종 27)에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착공하여 이듬해 준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 동래부 소재 동래읍성이 함락 된 이후, 이 금정산성을 쌓게 된 것. 그러나 이후 전투가 없어서, 오늘날까지 본래 모습이 보존되고 있지만, 피난성이기 때문에 다소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

부산은 고대부터 외부 침입을 많이 받은 고장이다. 금정산성은 낙동강과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구들을 막기위해 정말 필요한 성으로, 조선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겉보기에 매우 어설프게 쌓은 듯 보이나, 자연석을 활용하여 매우 견고하다.

동래 읍성
동래읍성 ⓒ 김찬순

동래읍성, 임진왜란 때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 격전지

이와 같이 금정산성은 동래 동래읍성이 왜적에게 무참하게 무너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금정산성이 임진왜란 때 더욱 견고했더라면, 무고한 인명의 피해가 훨씬 줄지 않았을까. 금정산성은 전투 한 번 없어 지금까지 잘 보존된 성이라면, 동래 읍성은 격렬한 왜군과의 전투가 있었던 성이다.

이 동래읍성은 임진왜란(1592년(선조25)) 때 동래부사 송상현 공을 위시한 모든 군 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장렬한 전투를 벌였던 최대 격전지다. 이후 방치되어 있던 성을 1731년 (영조7)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과거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읍성을 쌓았는데, 그 성이 현재 동래읍성의 기원이다.

당시 왜군 선발대 1만 8700명이 병선에 분승하여 4월 13일 부산 앞바다로 침입, 부산진성을 지키던 아군은 모두 순사했다. 이후 군과 민, 관은 그 이튿날 동래읍성으로 쳐들어온 왜군들과 혈투의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성과 함께 모두 순사했다.

역사 산책
역사산책 ⓒ 김찬순

동래읍성은 부산시 동래구 명륜동, 복천동, 안락동 일대에 걸쳐 소재하고 있다. 안락동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서장대가 있는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 동래 시가지 중심 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일제 때 시가지 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벽은 철거 되었으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성벽도 민가가 점유하여, 마안산을 중심으로 한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 부산시에서 성지를 중심으로 훼손, 방치되었거나 유지(遺址)가 확인되는 곳을 계속 보수·복원해 완성 단계에 있다. 최근 복천동 동래읍성 북문~서장대 일대 여장 75.5m의 복원과 치성 1개소 보수를 끝냈다.

금정산성과 함께 동래읍성은 이제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자, 선조들의 충혼의 정신이 깃든 성역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역사의 아픔과 진실은 결코 잊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새겨 보는 삼월이다.

덧붙이는 글 | 금정산 대표 산행로
제 1 코스 (8km, 3시간 30분소요) 부산대 → 고별대 → 동문 → 부채바위 → 북문 → 금정산
제 2 코스 (7km, 2시간 소요) 동래 → 만덕고개 → 석불사 → 상계봉
제 3 코스 (6km, 2시간 소요) 금강공원 → 남문 → 상계봉
제 4 코스 (6km, 2시간 소요) 부산대 → 동문 → 상계봉
제 5코스 (6.5km) 범어사 → 북문 → 동문
제 6코스 식물원 → 동문 → 북문 → 범어사
제 7코스 (8km, 2시간 40분 소요) 중리(산성마을) - 국청사 - 북문 - 고당봉

동래읍성관람은, 부산 1호선 지하철을 이용하여, 동래역이나 명륜동역에 하차하면 편리하다.



#금정산#삼월#금정산성#송상현#동래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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