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니가 왜 여기 있는데?"2003년 봄. 부산 하야리아 부대 앞.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그 날 아무 생각 없이 선배들을 따라 나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보고 말았다. 미군 부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전경들, 아무런 무기 없이 그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던 사람들. 어떻게든 하야리아 부대의 정문을 통과해보려고 애쓰는 그 사람들.
그저 선배들 옆에 붙어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겁도 없이 대오를 이탈하여 사수대에 섞여버린 나는, TV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과격하다고 이야기하는 걸 듣고 그러려니 했던 나는, 내 눈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나는, 그 날 밤 집회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펑펑 울었다. 놀람과 분노 그리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던 그 날, 2003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겁도 없이 시작한 풍물패 활동, 내 가치관을 바꿔버리다대학 입학 전, 부모님께서는 내게 '절대 데모하지 마라'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다. 하지만 사실 그 당시에 나는 '데모'가 뭔지도 잘 몰랐다. 그저 TV에서 여름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나오는 파업 이야기, 그 파업으로 얼마의 손해를 봤다는 이야기, 사람들이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팔뚝질하는 모습 정도만 머릿속에 그려질 뿐. 그래서 사실 저 말씀을 하실 때마다 그냥 흘려듣기 일쑤였다.
그리고 대학 입학 후,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단대 풍물패에 들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국악을 좋아하기도 했고, 20년 정도 교회를 다녔는데 대학 입학해서까지 교회 동아리에 들어가긴 싫어서 선택한 곳이었다. 당시 그 풍물패에는 새내기가 나와 다른 학과 친구 한 명, 이렇게 두 명이 있었고, 선배들도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난 자연스럽게 풍물패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 나는 선배로부터 이 풍물패가 단대 학생회 소속이며, 그렇게도 부모님께서 말리셨던 '데모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그 곳을 나가는 것이었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번 경험해 보고 싶었다. '데모하는 곳'이 왜 잘못된 곳인지 내 스스로가 직접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그 이후, 나는 선배들을 따라 여러 곳을 다녔다. 하야리아 부대는 주말마다 나들이(?)하는 곳이 되었고, 집보다 부산역과 서면 천우장을 더 자주 갔다. 방학 동안에는 다른 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북을 치고, 반미와 통일의 내용을 담은 공연을 했다. 2003년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 사망 때는 매일같이 영도다리를 건넜고,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때는 광화문의 10만 촛불 중 한 사람이 되기도 했으며,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해고 통지를 받은 시설노조 분들과 함께 새해 첫 날을 맞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정말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선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나쁜 일들이라고만 생각했고, 신문은 무조건 가장 유명한 조선, 중앙, 동아 셋 중 하나를 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다.
무조건 집권당은 한나라당이 되어야 하고, 대통령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되어야 가장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나만 좋은 직장 구하고 돈 많이 벌고 잘 살면 그냥 끝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지만, 이게 바로 내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노동자들의 인권과 관련된 기사를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신문은 흔히들 말하는 진보 성향의 신문을 본다. 선거권을 가진 이후 단 한 번도 한나라당을 찍은 적이 없으며, 교회에서 '하나님 잘 믿는 대통령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씁쓸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내가 잘 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최저수준 이상의 생활을 넘어 최적의 생활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003년 3월부터 풍물패를 그만둔 2005년 5월까지, 단 2년 사이에 내 가치관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풍물패를 통해 우물 밖 세상을 보다사실 나는 진보니, 보수니 그런 말은 잘 모른다. 그저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다 따져보고 행동할 뿐이다. 대자연의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이 싫어서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국민의 기본적 욕구는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무상급식을 찬성하며, 헌법에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에 공무원이나 교사도 시국선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풍물패 활동이 없었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내가 풍물패 활동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항상 말한다. 시간 아깝지 않았냐고. 후회하지 않냐고. 왜 그런 걸 하냐고. 하지만 만약 이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사회의 모든 현상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 인간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난 한 번도 풍물패 활동을 후회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 생활을 자연스럽게 얘기한다. 물론 풍물패 활동을 하면서 학과 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고 교회도 가지 않았지만, 대신 내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었기 때문에 얻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2003년 3월, 나는 우물 밖 세상을 보았다. 지금도 나는 우물 밖의 또다른 세상을 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기대한다. 2004년 광화문의 10만 촛불과, 트위터에서 사회 현안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는 내 팔로워들처럼,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세상에서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릴 것을.
덧붙이는 글 |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응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