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란 세월이 별거 아닌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결코 짧은시간이 아니었다. 그땐 정말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았다. 빚에 치어 지냈다. 집 전화벨만 울리면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순진하고 의욕만 앞서는 남편이 생협에 손을 대었다. 남편의 친구가, 하던 일(생협 활동)을 접고 사정상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의미 있는 더불어살기의 일환이라며 자기 사업은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생협에도 선뜻 발을 담근 것이다. 인수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음에도 무엇에 씌었는지 마누라 말 안 듣고 기어코 손을 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생협 활동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거래해주었다. 생산자의 물건이 시원치 않음에도 사 줄만큼 순수한 회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채소 등의 생물을 사다가 제때에 팔지 못하면 고스란히 손해를 떠안았다. 결국 인수받을 때 넘겨진 빚과 그 후에 더 얹어진 빚을 감당 못했다. 남편의 지인 둘과 내가 연대보증을 선 것이 결국 채무자가 된 것이다.
은행의 빚독촉은 심해졌고 연체가 길어지자 은행에선 공탁을 걸었다. 결국 내 월급은 압류가 되어 내 돈이 아니었다. 한 달을 뼈 빠지게 일해도 손에 쥐어지는 것은 십 여 만원 안팎일 때가 있었다. 그것으로 4식구가 어찌 살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전세금을 처분해서 빚을 갚고 남은 돈은 달랑 200만 원.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15만 원짜리 방을 구했다. 말은 독채 전세인데 거의 굴속 같았다. 마당이 길보다 아래에 있었고 방은 두개이나 네 벽이 반듯한 곳이 없어 도배하느라 애먹었고 전깃불을 켜지 않으면 사물이 보이지 않았다.
쥐들은 마치 제 집 드나들듯이 이곳저곳 드나들었다. 밤중엔 천정이 쥐들의 놀이터였다. 베개를 던져봐도 소리쳐봐도 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다가 쥐가 떨어질까봐 불안하기도 했다. 화장실은 푸세식이라 아이들이 화장실 가기를 겁냈다. 결국 아이가 빠져서 식겁한 적도 있었다.
큰아이 중학교 2학년, 작은아이 초등 4학년. 한참 예민한 사춘기에 아이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이가 전화를 받고 상대방을 확인한 후에 은행 전화일 경우에는 "엄마 없어요"라고 말할 때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저녁에 잠들면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은 날이 많았다. 그대로 잠들었으면 했다. 근무 중에 은행 빚 독촉 전화를 받으면 기운이 없어지고 모든 일에 자신감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죄 지은 것도 없이 위축되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집은 산 밑에 있었다. 그나마 봄에는 퇴근할 때 흐드러진 꽃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밭이랄 것도 없는 손바닥만한 땅에 풀이라도 뽑으며 마음을 달랬다. 7, 8월 한여름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일 수 없어 머리에 수건 뒤집어쓰고 30도를 훌쩍 넘는 땡볕에 나가 수행하는 마음으로 밭을 맸다.
그렇게 한나절 땀을 흘리면서 밭을 배다보면 분노도 억울함도 화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등짝에 땀만 시냇물 흐르듯 흘러내린다. 머릿속은 텅 비어진다. 수행하는 이들이 왜 고행을 자처하는지 알 것 같았다.
수행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2년 가까이를 버티었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일단 은행 빚도 갚고 채권압류가 거의 2년 만에 풀렸다. 물론 그 후로도 빚이 남아있긴 했지만 상황은 좀 나아졌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게 성장했고 집도 이제 서울 변두리의 오래된 집이지만 전세 아파트로 옮겼고 각자의 일에 모두 열심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서의 업이었을까? 그 힘든 시절을 엇나가지 않고 잘 커준 아이들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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