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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흐리고 비 오는 날이 계속되려는 것일까. 햇빛 한 줌 얻기 힘든 흐리고 비 오고 추운 날씨가 계속 되고 있다. 봄은 온 것 같은데 봄 같지 않은 날들이다. 지겹다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고도 남을 만하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 시내를 둘러싼 먼 산 빛은 흐린 안개에 싸여있는데 밤새 눈이 되었는가, 하얀 눈으로 쌓여있다.

 

여긴 비 오고, 산에는 눈이 되어 내렸나보다. 비야, 비야 이제 그만 오고 봄볕 화창한 날 좀 선물해 다오. 보아하니 쉬 그칠 비는 아닌 것 같다. 땅 속 깊이 얼어붙었던 땅도 녹이고 남을 만큼의 비가 계속 내리다 보니 젖은 땅이 다시 얼 것 같다. 며칠 전에는 경칩이었는데 튀어나오던 개구리도 다시 들어 가버리지 않았을까. 비는 끈덕지게 오다가 또 내린다.

 

봄을 재촉하는 비를 맞고 따사로운 햇살 퍼지면 봄꽃들도 예서제서 피어날 텐데, 끈덕지게도 흐리고 비와서 좀처럼 맑은 하늘 보기 힘들다. 이 우중충한 날들 속에서 택배가 왔다. 며칠 전에 메신저에 잠시 들어왔던 딸이 '택배로 뭘 좀 보낸다'고 했었다. '화장품이랑 카디건이랑 넣어 부칠 거에요!'하더니 다음날 봄비를 타고 택배가 당도했다.

 

낮 1시가 거의 다 되어갈 시간쯤에 택배라며 전화가 왔고 현관 앞에서 택배로 부쳐온 선물을 받았다. 나는 애들한테 직접 찾아갈 때도 있지만 반찬이랑 다른 필요한 것들을 전할 때엔 가까운 우체국 택배를 자주 이용한다. 딸은 가끔 나에게 화장품이나 신발 등 소소한 선물을 보내 주어서 내 마음을 기쁘게 한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보내고 받는 것은 기쁜 일이다. 주어서 기쁘고 받아서 기쁘다.

 

오가는 정, 오가는 마음 오가는 선물로 마음이 더 따뜻해진다. 딸이 보낸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직사각형의 종이박스는 가벼웠다. 무엇이 들었을까. 얼른 집으로 들어와서 연필 칼로 테이프를 떼 내고 박스를 열어보았다. 작은 종이박스 안에 든 내용물은 각각 투명 비닐 안에 잘 감싸여서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먼저 크고 작은 화장품 샘플들이 맨 위에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세심하게 정리해서 넣은 딸의 손길이 느껴졌다. 화장품이 담긴 투명비닐을 들어내고 박스 안을 들여다보니 노란색 옷을 돌돌 말아 비닐봉투 안에 넣은 것이 보였다. 개나리 빛 카디건이었다.

 

손에 든 옷을 펼쳐드니 흐리고 우중충하던 집 안에 전등불이 켜진 듯 별안간 환해졌다. 마치 개나리꽃, 프리지아꽃 등 봄꽃들이 방안 가득 피어 번져나가는 것 같았다. 겨우내 검은 옷 계통의 두꺼운 옷들만 입어왔는데 샛노란 개나리색 카디건으로 방안은 일시에 불이 오고 봄꽃이 방 안 가득 일제히 피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거울 앞으로 가서 입은 옷 위에 카디건을 걸쳐보았다. 엉덩이까지 덮은 카디건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작년 겨울이었을까. 딸이 입고 있던 카디건을 보면서 '엄마도 이런 걸 하나 사야겠다'하고 지나가는 말로 했던 적이 있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고 바깥 외출이 잦은 것도 아니고 해서 마음에 둔 카디건은 사지 못하고 잊은 채 지나갔다.

 

그런데 뜻 밖에도 딸이 카디건을 보낸 것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했던 말을 딸은 마음에 두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개나리 빛 카디건을 입고 입이 귀밑에까지 걸렸다. 그래 봄이구나, 봄은 역시 화사한 게 좋지. 그런데 노란 카디건을 뭘로 받쳐 입으면 좋을까. 옷장 안에 든 옷가지들을 마음속으로 떠올려보아도 노란 카디건과 마땅히 맞춰서 입을 만한 것이 없었다.

 

흰 티? 아니면 검정 목 티? 어떡한다?! 생각다 못해 옷장을 열어보기도 했다. 다시 카디건을 잘 접어서 한 쪽에 놓고 박스 안에 든 남은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병에 든 크림, 로션, 스킨 샘플 등 앙증스런 화장품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있었다. 나는 화장품을 사러 화장품 가게에 별로 갈 일이 없다. 일년 열두 달 동안 한두 번도 가지 않을 정도로 화장품 가게에 수익을 올려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동생들이 가끔 샘플을 주기도 하고, 동생이 쓰던 화장품을 더 좋은 것으로 바꿀 때, 쓰던 화장품을 몽땅 줄 때도 있다. 또 가끔 딸이 홈쇼핑에서 저렴한 가격대의 화장품을 사서 보내기도 해서 떨어 질만 하면 생기고 또 떨어질 만하면 생겨서 그것들 챙겨 쓰기도 바쁘다. 솔직히 화장품 값이 너무 비싸서 좀 부족해도, 다 갖춰놓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 가을에 동생이 쓰던 화장품을 준 것이 있었는데 동이 나서 화장품 병을 거꾸로 세워놓고 몇 방울 남은 것을 쓰던 중에 딸이 화장품 몇 가지를 보낸 것이다. 꼼꼼하게 챙겨 넣은 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건 또 뭐지? 한쪽 구석에 투명비닐로 싸여진 겨자색 천이 돌돌 말려있는 것이 보였다. 무심코 비닐봉지를 뜯어보았다. 옷이었다. 겨자색 면 티였다.

 

개나리 빛 카디건에 뭘 받쳐 입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딸은 그것까지도 미리 생각해서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적당히 엉덩이를 덮어주는 겨자색 면 티를 발견한 나는 카디건을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기뻐서 폴짝 폴짝 뛸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좋긴 한데~내 얼굴은 여름 지나 가을일 텐데, 이렇게 밝은 옷을 입어 어울리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렴 어때!

 

딸의 세심한 마음이 담긴 선물, 가볍게 외출할 때 입으면 좋겠다. 나는 겨자색 면티를 노란 카디건과 함께 입고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거울 속이 환했다. 내 마음에도 봄꽃이 툭 툭 터지고 있었다. 혼자 있는 이 시간, 방 안에도 봄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먼 산에는 흰 눈이 쌓였다. 하지만 봄은 봄인가보다. 심술궂은 날씨가 봄을 시샘해도 봄은 봄인가보다.

 

봄꽃 만개한 날, 딸이 보내준 샛노란 옷을 입고 봄의 한가운데로 나가야 할 것 같다. 비야 이제 그만! 봄을 시샘하는 바람아, 구름아 이제 물러가고 봄볕 따사로운 날을 좀 보여주렴. 찬란한 봄이 오는 길목은 이렇게 비 내리고 바람불고, 눈발마저 날리면서 수많은 날을 앓으면서 천천히 오시는가보다. 그 어떤 봄이기에 이렇게도 숱한 날들 동안 비와 눈과 찬바람으로 앓고 또 앓는지...

 

봄은 왔건만 봄이 멀게 느껴지는 날들. 그래도 봄이라지. 봄이 당도했다지. 봄이 오면, 흥얼거리는 노래로 봄을 재촉해볼까.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녘으로 당신과 나 단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바구니엔 앵두와 풀꽃 가득 담아 하얗고 붉은 향기 가득 봄 맞으러 가야지~'


태그:#택배, #선물,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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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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