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여 일 동안 노친이 계신 요양병원을 하루 세 번씩 다니면서 늘 즐거운 마음이고자 했다. 노친께는 물론이고 병실의 모든 할머니들께 밝은 기색을 보이려고 애썼고, 노인들 모두를 즐겁게 해드리려는 쪽으로도 신경을 많이 썼다.
요양사가 밥 쟁반들을 실은 수레를 밀고 오면, 요양사는 음식그릇의 뚜껑들을 하나하나 열고, 나는 할머니들께 일일이 밥 쟁반을 날라 드린다. 병상 식탁에 밥 쟁반을 놓아드리며 쾌활한 소리로 "많이 잡수세요" "맛있게 잡수세요"라는 말을 건네 드리는 것만으로도 노인들께는 좋은 위로가 되는 듯싶다.
노친과 나 사이에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많이 만들어진다. 많은 에피소드들 중에 내 뇌리에 명료히 저장된, 그리고 오래 기억에 남을 듯싶은 몇 가지를 추려서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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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친은 한때 몹시 집에 가고 싶어하셨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눈물을 지은 적도 있다. 결국 나는 병상을 하나 마련하여 집 거실에 들여놓았고, 지난 2월 6일 집으로 모실 수 있었다. 사흘 동안 집에서 모신 다음 8일 오후 다시 병원으로 모시고 갔는데, 병원 앰블런스를 이용하지 않고 내 승합차를 이용한 탓에 나와 아들녀석의 노고가 컸다.
설 명절 때도 집에 모실 계획이었다. 설 연휴 때는 요양병원 앰블런스 기사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병원 이사장이 직접 앰블런스를 운행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노친은 설 전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다. "집에 가고 오고 하려면 나도 힘들고, 식구들도 힘들고…"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다른 속뜻이 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노친의 귀에다 대고 설 명절에 집에 가고 싶지 않은 진짜 이유가 뭔지를 물었다. 그러자 노친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설에도 집에 뭇 가는 다른 할메들헌티 미안허잖여. 나만 집에 갔다가 오면 너무 미안헐 것 같여"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노친의 몸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 집 거실에는 병상이 거의 무용지물인 채로, 자못 무안한 기색으로 머물고 있다. 단 한 차례 집에 오신 노친이 사흘동안만 사용하셨을 뿐인데, 앞으로 또 사용될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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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친이 감태와 김을 좋아하시는 것을 잘 알기에, 또 그것이 노인 건강에 좋은 것일 듯싶어 계속 공급을 해드렸다. 김과 감태를 포갠 다음 밥과 반찬을 싸서 입에 넣어드리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노친은 감태를 거부했다. 감태가 질겨서 잘 씹혀지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선뜻 수긍이 되지 않으면서도 감태는 드리지 않기로 했다.
하루는 후식으로 아내가 속껍질까지 벗긴 오렌지를 드리는데 "이 비싼 물건을 이제 그만 가져와"라는 말씀을 하셨다. "비싼 거여서 싫어. 나 혼자 먹기도 미안허구"라는 말도 하셔서 내가 슬며시 귀에다 대고 물었다. "그럼, 감태도 비싼 거여서 싫다구 허신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는 "김만 가져도 충분헌디 그 비싼 감태까지 뭐 하러 자꾸 먹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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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친 앞에는 네 분 할머니들이 계시는데, 한 분 할머니는 '울보 할머니'로 통한다. 걸핏하면 소리내어 우시는데, 식사 중 얼굴에 땀이 흐른 것 때문에 울음소리를 내서 요양사에게서 핀잔을 들은 적도 있다. 나는 그 할머니 때문에 이상한 부담감을 감내하곤 한다. 혹 나 때문에, 내 노친에 대한 부러움 때문에 그 할머니가 더욱 자주 우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굴 수가 없다.
노친도 그 할머니에게 신경을 많이 쓰신다. 집에서 가져온 음식이 있을 때는 그 할머니께도 나누어드리라고 하고, 김도 갖다드리라고 하신다. 노친의 지시로 여러 번 김을 갖다 드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는 김을 거부했다. "계속 먹으니께 이젠 싫증이 나네. 이제부터는 김을 그만 먹을 겨. 그냥 맨밥에다가 반찬만 얹어 먹구 싶어" 나는 머리에 짚이는 게 있어서 또 귀에다 대고 물었다. "증말루 김이 싫증 난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는 조금 웃는 얼굴로 "나 혼자만 계속 김을 먹으니께 다른 할메들헌티 미안허잖여"하시는데, 내게 미안해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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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나면 노친의 등을 두드려드리곤 한다. 음식 소화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한 일이다. 그런데 하루는 등이 아프다고 했다. "아프지 않게 살살 조금만 두드려. 소리나지 않게" 무슨 뜻이 있는 말 같았다. 또 노친 귀에다 대고 "어떻게 소리나지 않게 등을 두드린대요?"하니, "다른 할메들헌티 신경 쓰여서 그려"하시는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나도 식사 후 노친 등 두드려드리는 일에 조심을 하게 되었다.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손바닥을 이용하지 않고 주먹을 진 손으로 살살 두드리게 된 것이다. 때로는 요양사가 식사를 마친 다른 할머니들의 등을 몇 번씩 두드려드리기도 하는데, 지속적인 것은 아니어서 아쉬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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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노친의 발과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있는데, 병실 안을 둘러본 간호사가 노친께 와서 말을 걸었다. "할머니 참 좋으시겠다. 할머니, 행복하시죠?" 노친은 "그럼, 행복허지요"하더니 그 간호사를 손짓으로 옆으로 가까이 오게 했다. 그러고는 간호사의 귀에다 대고 작은 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는 나헌티 행복허냐는 말 묻지 말어유. 다른 할머니들헌티 좀 미안허니께" 그러자 간호사는 깔깔 웃으며 "예, 할머니. 알았어요. 그럴 게요"하고는 곧 병실을 나갔다.
맞은편 병상의 한 할머니가 "뭔 말을 했기에 간호사가 저렇게 웃고 나간디야?"라고 궁금증을 표했는데, 노친은 거리가 멀어 잘 듣지 못했고, 내가 대신 대답해 드렸다. "만날 그렇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해달라고 허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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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색다른 반찬이 나왔을 때였다. 돼지고기튀김 같은데, 먹기 좋은 크기에다가 맛도 좋았다. 노친은 한 점을 맛보시더니 그릇을 들어 옆으로 치워놓았다. "왜 그래요? 맛이 좋은데"하니, 말없이 얼굴을 저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맛있는 반찬을 왜?" 내가 불만 섞인 소리를 하자 노친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이거 갖다가 규왕아배 줘"
규왕아배란 내 가운데 동생이다. 몇 년 전에 상처를 하고 아이들 데리고 혼자 살고 있다. 아침과 점심은 회사에 가서 먹고 저녁은 형 집에 와서 먹으며 생활한다. 노친이 늘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 보러 혼자서는 한 번도 오지 않는 사람인디, 뭘 그 사람 생각을 해요?" 나는 가슴이 찡하면서도 또 불만 섞인 소리를 했다. 대전 막내 동생과는 달리 성격이 너무도 내성적이어서, 형을 따라서는 두어 번 어머니를 보러 왔지만 혼자서는 끝내 오지 않을 사람이다. 그런 아들을 생각하시는 어머니 마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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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친 병상 맞은편 벽에는 시계가 하나 걸려 있다. 노친이 처음에는 그 시계를 잘 보지도 못했고, 자꾸 시계가 맞지 않다는 이상한 말도 많이 하셨다. 그런데 시계를 정확하게 보시게 되면서, 요즘에는 저녁마다 나를 재촉하시곤 한다. 식사 후 의치를 빼서 씻어놓고 칫솔질을 하게 하고 약 복용을 시켜 드린 다음 등 안마와 지압, 팔과 다리 주무르기를 하다 보면 5시가 넘게 된다. 그러면 노친의 재촉이 어김없이 나온다. "그만 허구 얼릉 가. 에미 기다려" 며느리 퇴근을 걱정하시는 탓이다.
"며느리 걱정일랑 허지 마세요. 그 사람, 운동도 좀 헤야요. 출근도 걸어서 허고, 퇴근도 걸어서 허기루 했어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마세요" 그래도 노친은 자꾸 재촉을 한다. 그래서 엊그제는 이런 말을 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새롬엄마가 핵교서 날 기다리기루 했어요. 내가 핵교루 가는 시간이 새롬엄마 퇴근 시간이예요." 노친은 "그려?" 하면서 수긍을 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노친께 그런 말을 한 다음부터 그것이 실제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에미를 너무 기다리게 허지 말어. 이제 그만 허구 얼릉 가"하시는 노친의 재촉은 계속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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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방의 예술단체에서 주는 작은 상을 하나 받았다. 상금은 50만원. 우선 떡방앗간에 부탁하여 백무리떡 두 말을 쪄다가 요양병원의 병실마다 돌렸다. 노인환자들 가운데도 떡을 드실만한 분들은 드셨고, 간호사들과 요양사들 모두 고루 떡을 맛보았다. 노친께 자세히 얘기해 드렸음은 물론이다.
엄마 없이 자라는 조카딸 규빈이가 올해 중학생이 되었다. 녀석의 중학교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두 형제 가족의 외식 자리를 마련했다. 안흥 바닷가에 가서 생선회를 먹기로 했다. 그런데 규빈이가 토요일 오후 집에 오지를 않았다. 학교 끝난 후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집에는 연락도 하지 않은 탓이다. 큰엄마가 여기저기로 전화를 했어도 끝내 녀석을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주인공 격인 규빈이는 빠진 채로 동생 부자와 우리 네 가족, 여섯 명만 안흥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 사실을 아신 어머니는 몹시 아쉬워했다. 내가 병원에 갈 적마다 엄마 없는 손녀 걱정을 하시며 "걔가 뭘 좀 잘 먹어야 헐 텐디…"라는 말도 하셨다.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노친께 이런 말을 했다. "지난번 외식 때 규빈이가 빠져서, 다시 이번에는 신태루로 가서 중국음식으로 규빈이 중학교 입학을 축하해주기로 했어요" 노친은 기쁜 기색이었다. 나는 그 일을 내일(13일/토) 저녁에 실행하기로 했고, 또 노친께 충실히 보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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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친은 유난히 멸치볶음을 좋아하신다. 우리 남매들이 옛날 도시락 싸들고 학교 다니던 시절, 도시락 속에는 늘 멸치볶음이 있었다. 노친의 식성을 잘 아는 아내는 멸치볶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쓴다. 얼마 전에도 멸치를 두 상자 구입했다. 잔멸치는 고추장을 넣지 않고, 중간멸치는 고추장을 약간 쳐서 볶았다. 두 가지 멸치볶음을 병원으로 가져갔는데, 노친은 잔멸치 볶음부터 먹겠다고 중간멸치 볶음은 집에 가져가라고 했다.
중간멸치 볶음을 집에 가져왔다가 며칠 후에 다시 병원에 가져갔는데, 뚜껑을 열어보신 노친이 이런 말을 했다. "아니, 집에서는 손도 대지 않고 그냥 그대로 놓았다가 가져왔네." 그걸 어떻게 아시는지를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기쁘고 감사할 뿐이었다. 그런 일에서도 노인의 '기억력 소생'이 감지되기 때문이었다. 한때 어느 정도 보여지던 치매기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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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친은 안양에서 누님이 올 적마다 용돈 얘기를 한다. 요양병원 병상에서 생활하시는 노인에게 무슨 용돈이 필요하냐는 말에 "오래 살림을 허고 살아버릇헤서, 주머니에 돈이 한푼도 없으면 이상허게 허전헤서 그려"라는 말도 하신 적이 있다. 누님은 웃으며 대개 5만원씩을 드리는데, 어머니께 돈을 드린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노친과 약속을 한다. 물론 그 약속은 노친의 요구이기도 하다.
비밀로 하기로 누님과 약속을 했지만, 다음날쯤에는 그 돈이 내게로 온다. 노친은 누님에게서 돈 받은 걸 비밀로 하기로 했다는 말도 하면서 내게 돈을 내미는 것이다. 나는 웃지 않을 수 없다. 배꼽을 잡고 웃어야 할 일인데, 이상하게 그렇게는 웃어지지 않는다.
지난 2월의 어느 일요일에 대전 막내 동생 가족이 와서 어머니께 용돈을 드렸다. 모두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갈 때 노친이 막내며느리만 남게 하고는 용돈 얘기를 했다고 한다. "느이들, 명절 같은 때 오면 나헌티 용돈 주었잖니. 오늘은 그냥 가면 안 되어. 주머니에 돈 한푼도 읎으니께 허전헤서 뭇 살겄어" 그 말을 듣고 제수씨가 10만원을 드렸다고 한다. 노친은 돈을 받으면서 "이거, 비밀이여. 아무헌테도 얘기허면 안 되어"라고 하셔서 제수씨는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을 했다.
제수씨는 노친이 돈을 잘 간수할지 걱정이 되어 내게 슬며시 그 얘기를 했고, 나는 제수씨에게 "그런 약속을 누님은 한두 번 헌 게 아니에요. 그 약속을 어머니가 먼저 지키지 않을 규. 그 돈이 이따나 내일쯤에는 나헌티 올 테니께 아무 걱정 말어요"라고 하니 제수씨와 동생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다음 일요일에 다시 온 제수씨가 어머니께 "어머니, 지난번에 제가 어머니께 10만원 드리면서 약속헌 거 있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그러졌잖아요? 그 약속을 왜 안 지키셨어요?" 하니, 노친은 웃는 얼굴로 "그거 뽀루난 겨? 내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했고, 우리 모두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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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 후 팔과 다리 주무르기까지, 순서대로 모든 일을 마치고 났을 때였다. "어머니, 아직 화장실에서 오라는 기별 읎슈?"하니, "그러잖아도 말허려는 참이었어. 아까부터 기별이 왔었어"라는 대답. "근디 왜 말 안헸어요?" "식사 때라 다른 할메들헌티 미안헤서 그냥 참구 있었지 뭐""에그, 왜 그랬어요. 얼릉 화장실 가요" 그리고 나는 서둘러 출입문 옆의 휠체어를 끌고 왔다. 병상을 펴서 노친의 몸을 눕히니 요양사가 와서 기저귀를 빼주었다.
노친을 휠체어에 태우고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앉혀 드린 다음 5분쯤 후에 요양사를 불렀다. 노친이 요양사를 보고 "그새 날 잡으러 온 겨?" 농담을 했다. "모시러 왔지 잡으러 오다니요"하는 요양사에게 "에그, 식사나 허구 나서 올 것이지, 여사님 나 때문에 밥맛이 다 달아나겄네"하며 미안해했다. 내가 노친의 몸을 안아 올리니 요양사는 뒤처리를 해드리면서 "할머니, 오늘도 성공을 허셨네요. 대성공이에요"하며 좋아했다.
◎이상 생각나는 대로 미리 정한 순서 없이 내 노친의 병상에서 생겨난 작은 에피소드들을 몇 가지 기록해 보았다. 나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글 쓰기일 것도 같다. 독자 여러분께 좋은 참고가 되고 '웃음 선사'가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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