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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생활 15년차인 아내는 한사코 고등학교 근무를 기피한다. 아홉 살과 다섯 살 배기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직은 손이 많이 필요한 아이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내의 교과목이 고등학교에선 천덕꾸러기로 치부되는 탓이다. 아내가 가르치는 교과목은 기술·가정이다.

솔직히 말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기술·가정 수업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하루 중 몇 안 되는 공공연한 휴식시간이거나, 밀린 숙제를 하거나 자습할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가정 교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영·수와 일부 사회, 과학 교과를 제외한, 예체능 교과를 비롯한 이른바 '기타 과목'의 공통된 현실이다.

기실 교육과정은 아이들의 전인적 성장을 감안한 것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도구와 교양을 함께 학습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국영수부터 음악, 미술, 체육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목을 다양하게 접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입시에 100% 종속돼버린 현실에서 이는 어디까지나 '공자님 말씀'일 뿐이다.

입시성과 위해선, 아직도 '질'보다 '양'

 지난해 11월12일 치러진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장 모습.
 지난해 11월12일 치러진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장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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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어느 고등학교에서 수능 출제 과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예 정규 수업 시간을 입시 교과 수업, 또는 자습 시간으로 운영하고, 성적 또한 대체하는 사건이 알려져 이슈화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져버렸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도 시나브로 잊혀졌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학교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는 우리 사회의 '묵인'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곤 생뚱맞게 배우는 과목이 지나치게 많아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크다며 이수 과목을 축소하거나 학기별, 학년별 이수 집중제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불붙었다. 당연히 국영수는 논의 대상에서 제외됐고, 그렇게 해서 축소되거나 주변부로 밀리는 건 물론 '기타 과목'이었다. 국사 과목마저 필수에서 선택 교과로 밀렸는데 다른 과목은 오죽할까.

국·영·수 과목은 정규 수업 시간에다 방과 후 학교 수업, 심화 수업까지 포함하면 하루에 과목당 두세 시간씩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진정 아이들의 과중한 학습 부담이 걱정된다면, 정부의 말마따나 수업의 효율성이 문제라면, 최소의 수업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도 학교 현장은 국영수 과목 중심으로 수업 시수 확보 경쟁이 존재하고, 입시 성과를 위해서는 여전히 '질'보다는 '양'이라는 관행이 뿌리 깊다.

거듭 강조하건대 국영수가 '도구'라면, 기타 과목은 '교양'의 영역이다. 아이들이 미적분을 전혀 몰라 답답하다며, 전에 비해 실력이 형편없어 가르치기 힘들다며 대학 교수들이 불평을 늘어놓았다지만, 대학 새내기 아무나 붙잡고 철학과 고전음악, 미술사조 따위는커녕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한 번 물어보라. 제대로 답하는 아이들이 몇이나 되는지.

학교 수업시간에 교사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천만의 말씀이다. 입시 과목에서 배제되다보니 수업은커녕 아이들과 만날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마음 '독하게' 먹고 수업할라치면 수능에도 안 나오는데 웬 시간 낭비냐며 되레 아이들로부터 핀잔을 듣기 일쑤다. 도덕은 할아버지에게, 기술가정은 집에서, 역사는 TV 드라마에서, 음악과 미술은 따로 학원과 공연장에 다니며 배워야 한다는 얘기가 결코 우스개로 들리지 않는다. 단언컨대 아이들에게 부족한 건 국·영·수 실력이 아니라 교양이다.

방학 때면 더욱 괴로운 기타과목 교사들

입시에 따른 교과목 편중은 아이들에게만 문제되는 건 아니다. 교사들에게도 적지 않은 갈등을 안겨준다. 예체능을 비롯한 '기타 과목' 교사들은 중학교와는 달리 학급 담임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일선 학교들의 과목별 담임 구성을 살펴보면 2/3이 국·영·수, 나머지 1/3은 사회, 과학 과목 교사다. 교육과정 상 국영수와 그 외 과목 교사의 비율은 대체로 반반이지만, 학교별 담임 편성 비율은 수능 출제 과목 비율과 정확히 일치하는 셈이다.

왜 그럴까. 결국 급여 외 수당 문제로 귀결된다. 정규 수업조차 자습시간으로 대체되는 상황에서 수당을 따로 받는 방과 후 수업이 있을 리 없는 데다 담임을 맡게 되면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밤늦은 시간까지 '야자 감독'으로 아이들과 함께 보내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배려' 차원에서 기타 과목 교사를 배제하는 것이다.

학기 중에도 그렇지만, 방학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방학이 유명무실해진 건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며, 하루 예닐곱 시간의 보충 수업과 서너 시간 동안 자습하는 방식으로 매일 일과가 짜인다. 방학 중 보충 수업의 대부분은 물론 국·영·수다. 학기 중에도 그럴진대 방학 중임에랴.

보충 수업 받기 위해 아이들 대부분이 등교하게 되는 상황에서, 담임이 방학 중이라고 출근하지 않을 수 없다. 일테면 '돈 되는' 수업은 없으나 담임으로서 학급 조회와 종례는 해야 하므로, 하루 종일 홀로 데면데면하게 교무실에서 대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굳이 담임을 해야겠다면, 수능 과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업 시간 무시당할 각오도 해야 하고, 수당 없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기타 과목 교사들은 학교가 애써 '배려'하지 않아도 시나브로 스스로 담임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인문계 기타과목 교사들에겐, 담임 기회가 안 온다

 영화 <울학교 이티>의 한 장면. 주인공인 김수로는 원래 체육선생님이었지만, 부득이하게 영어로 과목을 바꾼다.
 영화 <울학교 이티>의 한 장면. 주인공인 김수로는 원래 체육선생님이었지만, 부득이하게 영어로 과목을 바꾼다.
ⓒ 커리지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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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사에게 학급 운영은 소명이자, 로망이다. 학급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배우고 익혀온 자신만의 교육 철학과 신념을 드러내고 실천하는, 교사 아닌 다른 직업군에서는 꿈꿀 수조차 없는 행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문계 고등학교의 기타 과목 교사들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게 엄연한 현실이며, 그것은 그들이 고등학교를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다면, 담임으로서 아이들과 만나고 싶다면, 대학에서 국·영·수 과목을 전공해야 한다.

입시에 따른 교과목 편중은 기타 과목 교사들의 담임 배제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교사의 급여는 과목에 따라 극과 극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국영수와 예체능 교사의 급여 차는, 거칠게 말해서, 두 배 가까운 차이가 난다고들 한다. 담임 수당에다, 학기 중과 방학 중 방과 후 학교 수업과 심화 수업 수당까지 감안하면 크게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게 어찌 국영수 과목 교사들의 책임일까마는, 요컨대 국영수 중심의 입시제도는 아이들의 교양 기반을 허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격한 급여 차이를 통해 교사 집단 내에 위화감마저 조성하고 있다. 아울러 적지 않은 교사들의 자신의 교과목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감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

입시제도 개혁이야말로 교육개혁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점에 내가 100% 공감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입시제도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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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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