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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가 인기다. 전작 <아이리스>가 수, 목요일 퇴근하는 직장인들을 TV 브라운관 앞으로 불러 모으더니 이제는 <추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아이리스>의 어설픈 결말을 보며 과연 이 시간대 무슨 낙을 찾을까 고민하던 많은 이들의 시선을 단 1회 분량만으로 사로잡은 드라마 <추노>. 사람들은 왜 <추노>에 열광할까?

퓨전사극 맞아?

드라마 <추노> <아이리스>에 이은 <추노>
드라마 <추노><아이리스>에 이은 <추노> ⓒ KBS <추노> 홈페이지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드라마 <추노>의 가장 큰 매력은 그 리얼리티이다. 비록 <추노>가 기존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한 정통사극과 그렇지 않은 퓨전사극이라는 미심쩍은 이분법 안에서 퓨전사극으로 분류되지만, 오히려 지금까지 보아 온 사극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요즘 횡행하고 있는 정통사극/퓨전사극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어폐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과거의 이야기를 거짓으로 구성해내는 같은 '극'이거늘 어찌 정통과 퓨전이 있을 수 있을까. 오히려 역사라는 것이 승자의 기록임을 인지할 때 그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정통사극이야말로 그 관점에 따라 허구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과연 지금까지 어느 사극에서 노비의 옷이 <추노>에서처럼 넝마 같았으며, 과연 어느 사극의 주인공들이 방송심의 경계를 아찔하게 오고가는 저잣거리의 질펀한 음담패설을 입에 담았던가.

매회 자막까지 달아가며 조선시대의 언어를 그대로 옮기는 <추노>의 고증에 대한 집착은 낯선 만큼 신선하고, 그만큼 현실적이다. 도대체 저 조선시대 말들이 언제 왜 사라졌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러나 <추노>의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것은 비단 극중 대사나 의상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추노>가 퓨전사극임에도 불구하고 리얼리티의 힘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그 시대의 무자비한 계급질서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양반계급과 비참한 노비계급의 주종관계가 기존 사극과 달리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것이다.

 현재와 다르지 않은 지배계급의 탐욕
현재와 다르지 않은 지배계급의 탐욕 ⓒ KBS <추노> 홈페이지

사실 매회 등장하는 양반들의 포악함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자기들끼리 모여서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자를 남발하며 고상한 척 하지만, 정작 집에 돌아가서는 중세유럽의 초야권과 마찬가지로 아직 채 성인이 되지 않은 노비의 자식들을 데려다가 겁탈하고, 도망간 노비는 찾아와 얼굴에다가 '奴' 혹은 '婢'를 새기는 양반들.

이에 반해 노비들의 처지는 말 그대로 짐승만도 못하다. 그들은 주인에 의해 가족끼리 생이별을 하고, 도망갔었다는 이유만으로 죽도록 맞는다. 처음에는 얼굴에 '婢'를 새겨 넣은 예쁘장한 초복이를 굳이 꼬질꼬질하게 등장시켜야겠는가 불만이었지만, 리얼리티의 관점에서 그 당시 노비에게는 씻는 행위조차 사치였을 터, 다시 한 번 저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어쨌든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양반보다는 노비의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는가.

 추노꾼에게 잡힌 도망 노비들
추노꾼에게 잡힌 도망 노비들 ⓒ KBS <추노> 홈페이지

 참담한 노비의 처지를 잘 살린 사극 <추노>
참담한 노비의 처지를 잘 살린 사극 <추노> ⓒ KBS <추노> 홈페이지

그 어느 사극보다도 리얼한 사극 <추노>. 이와 같은 맥락에서 추노라는 소재의 선택은 매우 탁월하다. 우리가 사극에서 처음 접하는 이 추노꾼은 결국 조선 시대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존재기 때문이다. 양란 후 극도로 불안정해진 사회 속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배계급과 신분질서의 전복은 못 할망정 체제로부터 탈출하거나 같이 편승하려는 피지배계급. 바로 그 사이에 추노꾼이 있는 것이다.

결국 드라마는 추노를 조명함으로써 그 시대를 조명하며, 더 나아가 그 시대를 살아냈던 민초들을 이야기한다. 그동안 선덕여왕, 주몽, 이순신 등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영웅들 대신 우리가 잊고 있던 보통 사람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그것이 <추노>가 추구하는 리얼리티의 궁극적 목표인지도 모른다.

<추노>가 풍자하는 현실

리얼리티 말고도 <추노>가 많은 이들에게 각광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사극이라는 장르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풍자성 때문이다. "사극은 어느 시대를 말하는가보다 어느 시대에 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라고 연출 곽PD가 밝혔듯이 <추노>는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시에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선 <추노> 속 세태를 보자. 양란 이후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를 잃은 조선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은 약육강식이다. 아직까지 채 사라지지 않은 반상의 질서 속에서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며, 피지배계급은 세상 돌아가는 것과 상관없이 오로지 먹고 사는 것 자체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들.

익숙하지 않은가. 물론 지금 이 시대를 <추노>의 그것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추노>의 어지러운 시대상은 현재를 떠올리게 만든다. 어떤 삶이 옳은 것인지 가치가 사라진 시대.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극한 경쟁을 벌이는 우리네 삶은 <추노>의 시대만큼 살벌하고 처절하다. 결국 도덕성이고 뭐고 경제만을 강조했던 지금 대통령의 당선 역시 그 연장선 아니겠는가.

 저잣거리의 법도 국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
저잣거리의 법도 국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 ⓒ KBS <추노> 홈페이지

극 중 대길이는 "조정이니 정치니 하는 것들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라며 저잣거리의 법도와 국가의 법도가 다름을 강조한다. 늦은 19세기에나 등장할 근대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던 기존 사극과 달리 <추노>는 지배계급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민초들을 조명함으로써 한층 리얼리티를 더하는데, 이는 현재 사회를 이루는 구성요소로서 국가와 한 축을 이루는 시민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 당시보다는 근대국가의 통제가 더욱 강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 우리의 삶은 국가와 상관없이 영위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배계급과 전혀 다른 층위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피지배계급이 결국에는 지배층이 만든 구조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비록 나이가 벼슬이 되는 상놈들의 저잣거리지만, 결국 그들 역시 조선의 봉건체제가 내리는 정치적 의사결정에 의해 삶이 좌우되는 것이다.

<추노>는 이를 소현세자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조선 중기, 탐탁지 않은 왕세자의 죽음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사람들이 그 사건에 어떻게 휘말려 들어가는지, 그리고 그 정치적 사건이 민초들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통제력이 더욱 커진 근대국민국가의 구조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어디 있을까? 비록 가시적으로는 이전의 독재국가가 더 큰 통제력을 지닌 듯하지만 그건 부분의 진실일 뿐, 현재 정부의 정치적 결정이 우리의 삶을 더 구획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민주적 절차를 통해 탄생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생명체에 어떤 파괴력을 지니는지 가늠하지도 않고, 많은 이들이 반대하는 4대강 사업을 굳이 벌이는 현 정부. 그놈이 그놈이라며 정치에 무관심했던 우리 국민들은 그들의 정치적 결정으로 인해 어떤 상황을 맞게 될까? 과연 우리네의 삶이 여의도와 청와대로부터 자유로운가?

결국 <추노>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극을 보아오면서 영웅들의 칼날에 쓰러지는 민초들을 엑스트라의 죽음으로 여겨 왔지만, <추노>는 그들 민초 하나하나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니고 있는 이들임을, 그리고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추노>에 등장하는 민초들이 꿈꾸는 세상이다. 그들의 꿈이 곧 지금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꿈이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

 <추노>는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을 잘 보여준다.
<추노>는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을 잘 보여준다. ⓒ KBS <추노> 홈페이지

<추노>는 현재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끝은 많은 이들이 예상하고 있듯이 비극으로 점철될 듯 하다. 어쨌든 대부분 등장인물들이 그 당시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아들을 앞세워 새롭게 정권을 잡으려는 사람들과 반상의 구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

처음부터 <추노> 속 많은 등장인물들이 죽어나간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청자들은 왜 이렇게 많이 죽이느냐고 성화지만, 그 어느 사극보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추노>의 입장에서 그 죽음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사람 목숨이 지금보다 헐값으로 여겨질 때이며, 이는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모두 죽을 수 있다는 드라마의 중요한 복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노>가 비록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끝난다 한들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주인공들은 시대의 제약을 극복하지 못해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자명하다. 그들의 꿈을 모두 함께 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노>를 보며 다시 새겨본다.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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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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