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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그는 고민 중이다. 1년간의 총학생회장 임기를 마치고 이제 대학졸업을 1학기 남겨둔 지금 그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처음 총학생회장으로 출마를 결심한 것도 당시 꺼져가던 촛불정국의 흐름 속에서 누군가는 학내에 남아 촛불의 가치관들을 대중적으로 지켜가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가 처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00년 무렵이었다.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노원구에서 창립, 발족한 '환경을 사랑하는 중랑천 사람들'이란 시민단체에 그는 가장 어린 창립멤버로 참가했던 것이다.

 

"담임선생님이 추천해 주셨어요. 주말마다 하천 자원봉사활동에 열심인 것을 눈여겨보다 추천을 해주신 거죠. 당시 중랑천은 여름에 비만 오면 홍수로 범람을 하기 일쑤였고, 또 물도 아주 더러운 상태였어요. 집이 중랑천 근처에 있었는데, 1998년과 1999년 연속해서 중랑천이 홍수로 범람하는 것을 보면서 관심을 갖게 된 거죠."

 

그렇게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시작한 환경운동에 그는 푹 빠져버렸다. 당시 불거졌던 동강댐 문제로 결국 부치지는 못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고, 이것은 SBS <물은 생명이다>란 방송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첫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이듬해 국민대 경영학과에 합격한 그는 대학에서 환경운동조직을 만들 작정을 하고 2003년 1월, 입학식 전에 흥사단에서 주최한 사회강좌 '의식의 확장과 실천'에 참여하게 된다.

 

대학에 들어가면 환경운동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강좌에 참여했던 그는 당시 강사로 참여했던 문부식, 탁석산 등의 강연을 통해 그의 의식을 확장하게 된다. 그의 첫 관심사였던 환경문제를 넘어 우리나라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함께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은 단순히 고민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그는 곧바로 학내에 흥사단아카데미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2학년이 되어서는 흥사단대학아카데미 전국협의회 전국대표를 맡아 전국의 대학을 순회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족분단의 현실과 역사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2005년 3학년이 되어서는 단대 부학생회장으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에서 주최한 '남북대학생 상봉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금강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자기검열을 하느라 허심탄회하게 대하지를 못했어요. 북의 대학생들과는 나이 차도 상당했고, 우선은 경계심부터 생겨났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면서 일본에 대한 공동입장을 발표했는데, 그것을 보면서 민족공조의 가능성이랄까, 아무튼 북의 대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무척 감동적이었어요.

 

당시 '햇볕정책'을 기반으로 한 우리나라의 외교력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국제 역학관계를 이용해 화해와 평화를 위한 한반도정책을 펴나가는데 구심력을 형성할 수가 있었죠. 그런데 이명박정부에서는 북한에 대한 강경책들을 써나가면서 오히려 우리 정부의 행동에 제약을 가져오고 있는 것 같아요."

 

촛불시위와 '책상' 퍼포먼스

 

그는 2006년 군에 입대했다. 4학년이 되면서 취직을 준비할 때도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를 빨리 갔다 와야 했다. 23사단에 배치되어 동해안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는 미친 듯이 책을 읽어댔다. 보초근무 후에 1시간 동안 화장실 안에서 책을 읽었고, 아침에도 남들보다 30분 먼저 일어나 책을 읽어댔다. 물론 책 읽기는 대학 1학년 때부터의 버릇이기도 했다. '사회적 책임'을 향한 자신의 말과 행동에 근거를 갖기 위해서는 책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8년 2월 군대를 마치고 4학년으로 복학한 뒤부터였다. 졸업에 대한 압박감이 그에게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갈등이 생겨날 때마다 그는 온종일 도서관에 박혀 책만 읽어댔다. 그래서 그는 당시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촛불시위에도 초기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관망만 하고 있었다.

 

"이명박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는 집권 초기로 일단은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았고, 또 미국산 소고기수입 문제가 이명박정부의 결정적 하자가 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죠."

 

그러나 끝내 벌어진 사태는 그게 아니었다. 결국 그도 후배들과 함께 '안티미친소 국민대모임'이라는 온라인 조직(대표인 그까지 포함 3명 참가)을 만들어 촛불시위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5월31일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서울대 여학생이 전경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가 온라인에 만든 카페의 회원들이 급속히 증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여론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여론의 흐름에 자극받은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촛불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유명한 '책상' 포퍼먼스는 그러한 고민 속에서 '생각'난 것이었다. 마침 기말고사 기간을 맞이하여 혹시라도 대학생들의 참여가 갑자기 줄어들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던 중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촛불시위도 기말고사 만큼 매우 중요하다는 것, 그의 또래 친구들에게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생각'은 예상대로 대성공, 언론의 집중 조명까지 받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촛불의 모습이 직접 민주정치의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대중의 여론이 광장을 통해 집결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요. 그 위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었고요. 그런데 촛불에 대한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촛불의 열기는 그야말로 한방에 깨져버렸죠. 그러면서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파편화되면서 각기 그루핑되는 현상까지 나타났어요."

 

그는 촛불시위에서 많은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았다고 했다. 지금은 촛불의 광장 속에 나타났던 의식들이 진정으로 성숙한 의식들이었나, 하는 고민도 하고 있지만,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던 대중의 열망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학내에서도 그러한 촛불의 가치를 대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미할지라도 누군가는 학내에 남아 촛불의 가치를 유지하고 이어가야만 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촛불'의 이름을 들고 2009학년도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를 하게 된다. 그리고 당당히 당선되었다.

 

'촛불' 총학생회와 '희망과대안'

 

"20대는 결코 보수화된 것이 아니에요. 단지 그들 사이에서 무가치가 확산된 것일 뿐이죠. 현재의 한국사회는 20대가 자신의 가치관이나 삶을 주도적으로 펼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다들 취직에 목매달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스펙을 강화하려는 욕구에 매몰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다른 삶을 지향하고픈 사람들까지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셈이지요."

 

그는 (충분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우리나라의 20대들이 능히 사회적 의제들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진보적 열기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지금은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취직'이라는 눈앞의 불을 끄느라, 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찬찬히 뒤돌아볼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청년실업이 10%를 육박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는 어쩌면 당연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이러한 20대의 개인적인 대응방식이 너무나도 아쉽기만 하다. 좀 더 조직적으로 집단화되어 하늘의 별따기 같기만 한 '취업'에 대응할 수는 없는 것일까? 청년실업을 하나의 사회적 의제로 키워내고 이에 20대가 한 목소리로 자기 집단화되어 조직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다면 좀 더 나은 사회적 대응책들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는 아직 혼자이다. 총학생회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친 지금, 그도 이제는 평범한 20대의 대학생으로 돌아와 취직준비에 열을 기울여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전대협 등의 학생운동 선배 세대들이 부러울 때가 많아요. 자기 스스로 입장을 세우고 사회를 바꾸어보려는 시도를 집단적으로 추구해갈 수 있었던 그 세대의 분위기가 굉장히 부럽죠."

 

그래서였을까? 그는 지난 2003년 대학입학 직전 흥사단아카데미의 강좌를 수강하면서 알게 된 '희망과대안'의 오광진 팀장의 참여 제안에 선뜻 응하게 된다. 어떠한 고민이든 그것은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 언제나 더 좋은 법이니까.

 

그의 바람, 그리고 그의 당부

 

"이명박 정부에 가장 분노하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가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명박정부가 등장할 때 많은 국민들이 그의 CEO로서의 경력에 박수갈채를 보냈죠. 하지만 영웅에 대한 기대심리는 버려야 해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좀 보세요. 4대강 건설족들을 앞세워 '나를 따르라'는 방식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실용'이 아니라 그저 기득권에 안주한 '반민주적인 행태'일 뿐이죠."

 

그는 '희망과대안'의 회원 중 유일한 20대이다. 그만큼 모든 것이 아직은 낯설기만 하다. 명망가 중심의 사회적 메시지그룹이라는 활동방식도 그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여러 회원 모임에서 '쟁쟁한' 사회 원로들과 중진들을 만나면서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많은 것을 느끼고 또 배워가고 있지만, 막상 '희망과대안'의 회원으로서, 또 유일한 20대의 회원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는 또 고민 중이었다.

 

"'희망과대안'의 활동이 이번 지방선거에만 그치지 말고 2012년 총선과 대선까지 꾸준히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좀 더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갖고 분명한 방향성을 설정하여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메시지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올바른 담론형성에 앞장서자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111명의 회원 개개인들의 역할을 높여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희망과대안'의 회원들은 모두들 각자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대표성을 갖고 있는 분들이에요. 이분들의 경험을 적극 살려낼 수 있는 조직체계를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회원 분들 하나하나가 모두 '희망과대안'의 대표자로서 활동하자는 것인데, 회원 분들의 전문성을 살려 교육팀, 남북문제팀, 국제관계팀 등을 구성해 그 분들의 개성과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역할과 직책을 부여하는 거예요. 희원들이 가기 부문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구성된 팀들을 통해 사회적 의제를 생산해내고, 이렇게 생산된 의제들을 메시지로 만들어 '희망과대안'이라는 용광로로 합류케 하는 것이죠."

 

그는 젊다. 그래서 몸이 더 근질근질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망과대안'의 회원으로서 무언가 더 직접적으로 일을 하고픈 듯싶었다. 바로 이것이 '희망과대안'의 앞으로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전체 111명의 소중한 회원들의 전문적인 경험들을 좀 더 많이 '희망과대안'의 용광로로 녹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마지막으로 그는 20대, 그의 세대들에게 당부했다.

 

"우리 20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요. 주어진 여건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이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새로운 상상력뿐이니까요.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지 말고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위해, 또 우리 사회를 그런 삶이 가능할 수 있는 사회로 재구성해내기 위해 좀 더 많이 의심하고, 비판하고, 고민하면서 무궁한 상상력을 키워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러한 상상의 나래를 펴기 위해 혼자만의 고민으로만 머물지 말고, 우리 20대의 대안 메시지를 함께 만들어 집단적으로 우리만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만들어나갔으면 좋겠어요."


태그:#선거연합, #연합정치, #62지방선거, #김동환, #희망과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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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대안은 대안적 메시지 생산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균형회복과 좋은 정치세력 형성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9년 10월 19일 학계, 종교계, 시민사회 인사 113명이 참여하여 창립된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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