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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님은 생선찌개를 무척이나 좋아 했습니다. 계란부침은 토종 닭이 나은 것이랍니다. 토종 닭이 58마리를 키우고 계셨습니다.
▲ 농부님이 차려주신 소박한 밥상 농부님은 생선찌개를 무척이나 좋아 했습니다. 계란부침은 토종 닭이 나은 것이랍니다. 토종 닭이 58마리를 키우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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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4일 일요일 아침 6시 30분 일어나 특근 출근을 했습니다. 마지막 특근입니다. 8시에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후 하청업자가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출입증 받으러 왔습니다"

저는 출입증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내주었습니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이제 완전 정리해고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루 종일 씁쓸한 기분으로 작업에 임했습니다. 이미 닥쳐온 현실인지라 마음이 하루 종일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특근 하나라도 더해 두어야지만 그나마 퇴직금이라도 조금 더 받을 수 있으니 안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저녁에 작업 마치고 퇴근후 무엇을 해야 할지 정신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마냥 집구석에 틀어박혀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3월 15일 오전 일어나 밖을 보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외출복만 챙겨 입고 무작정 집을 나섰습니다. 어디 가냐고 묻는 아내에겐 이렇게 대답하며 문을 닫았습니다.

"저 완주 흑곶감 농사 짓는 분에게 다녀 올 겁니다."

고속버스 타는 곳으로 가서 전주가는 버스를 찾으니 오후 3시에나 있다고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뒤질때는 분명 1시간 간격으로 있었는데 틀린 정보였나 봅니다. 빠르게 갈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아 보니 대전에 가면 전주 가는 버스가 많고 마침 10분 후 대전가는 버스가 있어 표를 끊고 얼른 버스에 올라 탔습니다.

쇠그릇에 담긴건 흑곶감이고 종이 통에 담긴건 일반곶감입니다. 곶감 행사 때 맛이 어떤가 사와 먹어 보았다고 합니다. 한 입 먹은후 그냥 뒀다네요.
▲ 흑곶감 농부 이완수 님 쇠그릇에 담긴건 흑곶감이고 종이 통에 담긴건 일반곶감입니다. 곶감 행사 때 맛이 어떤가 사와 먹어 보았다고 합니다. 한 입 먹은후 그냥 뒀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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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님은 반가이 맞으며 맛보기 흑곶감과 울금과 여러가지 약초로 만든 차 한잔을 내 주셨습니다.
▲ 흑곶감과 산약초로 만든 차 한잔 농부님은 반가이 맞으며 맛보기 흑곶감과 울금과 여러가지 약초로 만든 차 한잔을 내 주셨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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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10분경 울산을 출발한 대전행 고속버스는 오후 3시 20분경 도착했습니다. 다시 전주행 버스를 타고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되었습니다. 전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시외버스역으로 갔습니다. 운주 가는 버스표를 찾으니 안내 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후 3시 50분이 막차였습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전주서 하룻밤 자고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흑곶감 만드는 농부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 주셨습니다.

"거기서 택시타고 기차역전으로 가면 파출소가 있어요. 거기서 내려요. 300번 버스가 올 거요. 그거 타고 고산에서 내려요. 다시 운주 가는 버스타고 경천면사무소 앞에서 내려요."

다 끝났나 싶어 전화를 끊으려는데 농부님이 이야기를 더 했습니다.

"거시기 올 때 말여요. 막걸리 한병 사와 부러요."

복잡하지만 어쩔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경천면사무소 앞에 내리니 농부님이 마중나와 계셨습니다. 잘 웃으시고 인상이 참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처음 가보는 길인지라 헤매다 보니 농부님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 8시가 다되었습니다.

농부님은 같이 저녁이나 먹자면서 조촐한 밥상을 내오셨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 흑곶감과 약초차를 먹어 보라며 내오셨습니다. 우린 흑곶감과 약초차를 마시며 저녁 늦게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농부님은 경천에 내려와 흑곶감 농사를 지은 지 7년째라고 합니다. 사연을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귀농후 몇 개 월 지난 뒤 자동차 추돌 사고로 2년만에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그 뒤 깜빡깜빡 잘 잊어먹어 이렇게 여기저기 글을 적어 둔다고 합니다. 벽마다 온통 글귀들로 가득 했습니다.
▲ 농부님이 적어 놓은 글 들입니다. 귀농후 몇 개 월 지난 뒤 자동차 추돌 사고로 2년만에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그 뒤 깜빡깜빡 잘 잊어먹어 이렇게 여기저기 글을 적어 둔다고 합니다. 벽마다 온통 글귀들로 가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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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님은 자연과 건강에 관심 많았습니다. 특히나 효소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3년 넘게 숙성시킨 효소들이라 합니다.
▲ 농부님이 담가 놓으신 산야초 효소들 농부님은 자연과 건강에 관심 많았습니다. 특히나 효소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3년 넘게 숙성시킨 효소들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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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몇이나 되었소? 47살? 그럼 내가 동상이라 하께. 동상 내가 말이여. 이곳이 내 고향이잖여. 어려서 집나간 후 7년 전에야 다시 돌아 왔당께. 그동안 서울서 직장 생활 했지. 거의 30년 정도 되었네 그랴. 7년전 고향으로 다시 귀농할 때가 49살이었응께 지금 몇이나 함 세어봐. 난 서울서 대기업 다녔어. 관리부장까지 했으니 출세혔지. 그러나 그 스트레스는 날이 갈수록 더 쌓여 가더라고. 잘못하면 미쳐 불고 말겠더라고. 그래서 다짐했지. 50살 되기 전에 내려가자고. 내려올 때 직장 동료들이 다 나보고 미쳤댜. 끝발있는 자리였거든. 맨날 사장, 회장과 함께 지내니 그럴만도 혔제. 결국은 그거 다 부질없더라고. 그들은 우리를 소모품으로 여길 뿐이었어"

농부님은 이어 말했습니다.

"난 말이여. 도시 살면서 언제나 고향이 그리웠어. 대기업에 다니면서 변화되는 세상을 보니 이건 영 아니더라고. 앞으로 농학시대 온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 시작했어. 그래서 방통대에서 농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 귀농하려고 귀농운동본부에 가서 공부도 많이 했어. 서울 살면서 백운저수지 근처에다 텃밭도 가꾸며 귀농 연습에 들어 갔었지. 앞으로는 자연의 시대가 올거야. 산업화가 빨라 질수록 지구는 병들어 갈거야. 그러니 동상도 귀농 한번 생각 해 봐."

농부님은 지난 2003년 4월 20일 경 서울을 모두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 오셨다고 합니다. 동네에 첫 발을 디디니 동네 사람들이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버틸까 하고요. 거기다 내려오자마자 불행이 닥쳤습니다. 여름 어느날 밤 읍내에 나가 염소 사료를 사오다 빗길에 미끄러져 상대편서 오던 트럭과 정면 충돌을 해버린 것입니다. 승용차 앞면이 날아 가버릴 정도로 대형사고가 난 것입니다. 팔다리 모두 부러지고 머리가 함몰되는 사고가 났습니다. 농부님을 모두 죽은 것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 의사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가 손가락 까닥거리는 것을 보고 급히 의사를 불러 치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비몽사몽간에 내가 검은 굴 속으로 들어 가더만. 거기 가느다란 거미줄 같은게 있더라고 그걸 붙잡고 매달렸지. 그거라도 잡고 있어야 살거 같았어. 지금 생각하면 아마 그 줄 놓았으면 나도 죽었을 거야."

아내 이야기로는 4개월이 지나서야 의식이 조금씩 생겨 나더라 했습니다. 그 전엔 심장만 살아 있을 뿐 아무 의식도 없었다고 합니다. 농부님은 말했습니다.

"누군가 내 귀에다 대고 말하더라고. 꼭 건강해지셔서 절 찾아와 주세요 하고 말이야. 아름다운 여성 목소리였어. 아무래도 천사라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지. 의식은 없는데 그 여성 목소리는 기억나. 아무튼 매일 매일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어. 정신이 나갔나봐. 의사가 치료하러 왔는데 엄청 거부반응 일으키더랴. 그런데 그 여성만은 곁에 오도록 했다는거야. 아마 간호사였나봐. 그 간호사가 날 살렸는지도 몰라. 당시 그 목소리가 내겐 큰 희망이었거든"

나중에 정신이 들어 그 간호사를 찾아 보았지만 목소리만 기억 날 뿐 얼굴을 몰라 찾을수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생각하기를 하늘이 보내준 천사가 아니었나 하고 있답니다. 조금씩 의식이 돌아와 완전히 의식을 되찾기까지 2년이 넘게 걸렸다고 합니다. 재활 치료까지 하면 3년은 병원서 지낸 것이었습니다. 재활하며 흑염소를 키웠지만 다친 후 흑염소 키우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 내다 팔고 대신 토종닭을 사다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나가 주변을 둘러보니 집 옆으로는 골짜기 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뒷 쪽으로 올라가 보니 표고버섯 키우는 나무 기둥이 많이 서있었습니다. 창고로 쓰는 비닐하우스가 여러개 있었는데 그동안 산야초로 담가 놓은 효소도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이 뭣이여. 공해시대잖여. 공해시대 효소가 아주 중요해. 사람 몸에 효소 부족하면 여러가지 성인병 생겨. 효소가 없으면 사람 목숨 부지 못혀. 동상도 효소를 자주 먹어 두라고."

농부님은 도시에 30년 살다 귀농한 터라 이제 여한이 없다고 합니다.

"동상, 난 말이여. 지금이 그 어느때보다 행복햐. 내가 젊은 날 왜 그리 아둥바둥 살았는지 몰라. 농촌에 살면 이렇게 좋은 것을. 난 말이여. 인자 뭔가 남기고 싶어. 내가 만든 이 친환경 흑곶감을 다른 사람이 사먹고 맛있다는 소리 들으면 너무 기분 좋아. 또 감나무를 정성들여 키워 가을에 곶감 만들 감을 딸 때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 해. 아이들도 다 대학나와 잘 살지 하니 인자 우리 두 영감 할마이 흑곶감 농사 짓고 토종닭, 표고버섯 키우며 죽는날까지 이렇게 사는거지 뭐."

농부님은 아침 상을 차렸습니다. 밥을 먹고 말했습니다.

"동상 시골에 왔으면 일한번 하고 가야지? 따라 와"

오늘 감나무에 두엄 주는 작업을 한다고 했습니다. 장화 신고 장갑 끼고 두발 수레를 끌고 두엄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두엄이 보였습니다. 두엄은 소똥에다 겨와 톱밥을 섞어 3년간 묵힌 것이라 합니다. 제가 냄새가 역하다 했더니 농부님이 말했습니다.

친환경 흑곶감 농사를 짓는 농부님은 3년 숙성시킨 소두엄을 뿌려야 곶감이 맛있다며 두엄 뿌리기에 열심이셨습니다. 저도 함께 도와 하루 일을 해주었습니다.
▲ 감나무 밭에 두엄 뿌리기 친환경 흑곶감 농사를 짓는 농부님은 3년 숙성시킨 소두엄을 뿌려야 곶감이 맛있다며 두엄 뿌리기에 열심이셨습니다. 저도 함께 도와 하루 일을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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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이 두엄 냄새가 고소하게 느껴져야 진짜 농부가 되는 거야. 귀농하려면 말이야. 이 두엄부터 잘 만들어야 해. 이 두엄이 맛있고 큰 감을 만들어 주거든."

16일 하루는 농부님과 함께 두엄 퍼날라 주는 작업을 했습니다. 솔직히 좀 역겨웠으나 즐거웠고 보람있는 하루였습니다. 점심 먹고 농부님은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며 벽을 가리켰습니다. 그 벽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삶을 위한 힘으로 삼는다면 보람과 긍지의 삶이 되리라'
-이완수. 2009년 11월 25일.

지붕은 스레이트지만 벽은 모두 흙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조만간 지붕까지 볏단으로 올리겠다고 합니다.
▲ 흑집에 살아도 행복하다는 농부님 지붕은 스레이트지만 벽은 모두 흙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조만간 지붕까지 볏단으로 올리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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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사람들이 일반 곶감은 잘 아는데 완주 흑곶감은 잘 알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완주 흑곶감에 대해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완주 흑곶감은 가을에 잘 익은 감을 따서 깎고 6개월 통풍 잘되는 곳에서 60일 가량 정성들여 말리야 완성되는 친환경 곶감이라고 합니다.

농부님이 일반 곶감 만드는 곳을 직접 다녀 오신 적이 있다고 합니다. 온통 밀폐된 공간에서 곶감을 만드는데 곶감에 곰팡이가 생겨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황연기를 피워 내는걸 직접 보고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농부님은 친환경을 좋아하고 건강을 위해 먹는 것이라 자연 바람으로 서서히 말려야 좋은 곶감이 만들어 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건강 하시기를 바라고 완주 흑곶감이 많이 알려 지기를 바라면서 저는 그곳을 떠났습니다.



태그:#흑곶감,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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