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금 미국에서는 금융 감독체계 개혁방안의 일환으로 소비자금융보호청(Consumer Financial Protection Agency, 이하 CFPA) 신설안을 놓고 뜨거운 정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가 발생한 주 요인은 금융기관에 대한 감시, 감독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일반 소비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금융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 보다 '강력한'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 오바마 행정부의 기본 시각이다.

금융회사들에 대한 철저한 감독을 통해 그간의 잘못된 금융상품 판매 관행을 일신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함과 동시에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월가의 '살찐 고양이'들을 향해 칼을 빼 든 것이다.

오바마 정부가 발의하여 작년 12월 하원을 통과한 CFPA법안의 취지 및 목적은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금융소비자들이 합리적으로 금융상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2)금융시장에서의 불공정, 기망, 차별, 남용행위로부터 금융소비자를 보호하며 (3)금융시장이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됨으로써 지속적인 성장과 혁신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고 (4)그동안 금융시장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금융 접근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CFPA를 어떤 기관 소속으로 둘 것이며 그 권한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것인가 등 최종안이 완성되기까지 상당한 진통이 따르겠지만 (실제로 은행 등 금융권에서는 법안이 최종 통과되면 영업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에 입법 저지에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CFPA 설립 자체가 백지화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한편, 우리나라를 살펴보자. 작년 9월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이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에 관한 법'(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금융소비자 보호원을 신설하여 '금융위원회' 직속의 독립 기관으로 두고 그간 금융감독원, 한국소비자원, 한국거래소 등으로 분산되어 존재하던 소비자 분쟁업무를 통합 관리하자는 것이 이 법안의 골자다. 금융상품의 복잡성과 전문성이 가중되면서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상품을 가입하는 소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전담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이어 금융위원회가 '금융소비자 보호 종합대책 마련을 위한 태스크포스(TF)팀'을 만들어 운영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금융위원회의 정치적 계산(영토 확장)이 깔려 있다는 지적이 있고 역시나 부처 간 힘겨루기가 관측되고 있어서 향후 추이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진의 여부를 떠나 공히 사안의 중대성과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향후 (가칭) 금융소비자보호원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건, 사안의 핵심은 '조직도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가 아니라 '금융소비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원칙과 기준을 어떻게 제정할 것인가'에 있다.

미 재무부가 작성한 개혁안 제목 그대로 '금융감독 및 규제의 새로운 기반 재확립(A New Foundation: Rebuilding Financial Supervision and Regulation)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것'이 핵심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점에 대해, 미국의 제도 변화를 지금 당장 우리나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이 사안의 '중대성'과 현재 발생되고 있는 금융소비자 피해의 '심각성'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금융감독원의 위상과 역할

금융감독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감독원의 설립 목적은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확보하고 공정한 시장질서를 확립하며 금융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감독원 조직은 총 10개의 본부와 25개의 국(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이 가운데 '금융소비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은 몇 군데일까? 단 두 곳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금융회사를 관리, 감독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금융회사를 올바로 지도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인력 편중 현상(전체 인력의 8% 수준)이야말로 금융 감독기관이 소비자금융 시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잘 상징해준다. 단지 보조적인 업무라는 뜻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금융감독원의 객관성과 독립성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금감원을 독립된 국가기관이라고 생각하지만 금감원은 '금융감독기구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만들어진 일종의 '특수법인'이다. 더욱이 감독원 재정의 상당 부분을 금융회사가 낸 출연금과 분담금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금융회사들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현재 금감원 민원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원들 중 상당수가 금융회사로부터 파견된 인력들이다. 금융회사로부터 피해를 당한 소비자가 다시 금융회사로부터 급여를 받는 상담원에게 전화를 걸어, 민원 해결을 의뢰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년 말 금융소비자 보호와 관련된 한 포럼에서, 한성대 무역학과 김상조 교수는 '금융소비자들이 감독기구를 불신하기 때문에 소비자 역시 감독기구의 민원, 분쟁 해결절차를 따르지 않고 법원 소송에 더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금융회사와 소비자 간의 분쟁이 발생하게 될 경우, 금융감독원이 행정 지도 및 조정을 하였다 하더라도 금융회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법적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민원인들은 시간 낭비를 하지 않으려고 직접 법원을 찾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금융상품 불완전 판매

2009년 금융분쟁조정 접수 및 처리 현황 (2010.3.5 / 금감원 분쟁조정국)
▲ 금융감독원 금융분쟁 접수현황 추이 2009년 금융분쟁조정 접수 및 처리 현황 (2010.3.5 / 금감원 분쟁조정국)
ⓒ 문진수

관련사진보기


최근 발표한 금융감독원 자료에 의하면, 2009년 한해 동안 접수된 금융분쟁 건수는 약 2만 9천 건으로 전년 대비 38%(7,963건) 가까이 늘었다. 작년에 금감원이 접수, 처리한 건수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펀드' 관련 분쟁이다. (은행, 중소서민금융 분야 중 49.2%, 금융투자 분야 중 51.1%)

시장에서 판매된 펀드 중 상당수가 은행 및 증권사 창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창구 판매는 그 특성상 안정적인 상담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상품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펀드 수익률이 악화될 경우,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투자상품은 복잡한 상품의 특성상 정보가 비대칭적이고 소비자들의 교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완전 판매를 위한 금융회사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금융회사들이 오직 '실적'에만 열을 올리다 보니 판매 현장에서 '위험'은 축소되고 '수익'이 과장되기 쉽다.

또한 서류 작성 과정에서 상품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의도적으로 회피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고객 자필 서명의 흔적이 소비자가 아니라 역으로 금융회사를 보호하기 위한 증거로 기능하기도 한다. 결국 일반 소비자들은 금융상품에 대한 명확한 판단 기준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상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보험 판매도 마찬가지다. 오직 판매 수당으로 이루어진 설계사들의 수입구조와 선 지급 형태의 관행화된 수당 체계, 과도한 판매실적 압박으로 인해 무리한 계약을 체결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2009년도 금감원에 접수된 보험관련 분쟁 건수는 전년 대비 46.9%나 증가했으며, 특히 생명보험 영역 분쟁 중 가장 많은 건수가 모집관련 분쟁(39.4%)이다. 보험 모집 과정에서, 고객들에게 상품에 대한 적절한 정보 제공이 이루어지지 않고 '위험' 정보가 누락 혹은 왜곡되고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 육성

현재 금융상품 판매 종사자들의 명함에는 예외 없이 FP(Financial planner)나 FC(Financial consultant) 혹은 이와 비슷한 이름이 적혀 있다. 가장 그럴듯하게 보이는 말로 명함을 파고, 또 그렇게 포장된 이름으로 고객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객관적 평가 기준도, 변별력도 없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언어의 남용이라고 할까? 국내에서 가장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는 재무설계사 자격증조차 미국 금융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공학적 접근을 주로 다루고 있으며, 우리나라 현실 및 중산층 가계 재정 운영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contents)을 갖고 있지 못하다.

대부분 금융회사들이 상품 판매를 목적으로 재무설계라는 포장지를 이용하면서 본래의 뜻과 취지가 왜곡되어 나타나고 있다. 본래 재무설계란 객관성과 중립성이 담보되어야만 고객에게 올바른 대안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인데, 재무설계가 상품 판매를 위한 기술적 수단으로 차용됨으로 인해 가치와 진정성이 변질되기 쉽다. 자사 제품의 판매를 중심에 놓고, 논리를 역으로 맞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무설계를 단순히 금융상품 판매 도구로 해석해선 안 된다. 개인 재무관리를 위한 운용체제(OS)로서의 재무설계는 다양한 분야와 영역에서 사람들의 경제적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유용한 도구요, 방법론으로서 활용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이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 바로 재무상담사다.

그런데 재무상담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들 대부분이 특정 금융회사에 소속되어 있음으로 인해 중립적인 재무상담을 하지 못하고 있고, 그 결과 금융상품의 유통 대리인으로 전락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루 빨리 공신력 있는 자격증 제도를 제정하고,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춘 상담 인력을 양성해야만 하는 이유다.

미국의 CFPA 법안은 금융 소비자보호를 위한 4가지 기본 원칙, 즉 투명성(transparency), 단순성(simplicity), 공정성(fairness), 접근성(access)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접근방식과는 명백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1) 투명성이란, 금융상품 및 서비스에 대한 공시가 소비자가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단순, 간결,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고 (2) 단순성이란, 금융상품을 단순하게 만들도록 장려하고 만일 복잡한 구조의 상품을 판매할 경우 반드시 경고문(warning labels)을 부착하도록 의무화한다는 것이며 (3) 공정성이란, 금융중개기관에 대해 주의의무를 부과하고, 동일한 상품에 대해 일관된 영업행위 규제를 하겠다는 것이며 (4) 접근성이란, 금융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저소득 계층들의 금융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말한다.

소비자를 단순한 구매자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로 해석하고, 이들을 적극 보호하겠다는 새로운 기준과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법안은 CFPA에게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명령, 지침의 제정 권한은 물론 해당 법령의 이행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조사 및 보고요구 등의 집행권한도 부여하고 있다. 동시에 개별 주의 소비자보호법(state consumer protection law)에 저촉되지 않는 한, 은행 및 비은행 금융기관 모두를 감독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고 있다. 명실공히 금융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이고 강력한 법적 장치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미 CFPA 법안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 및 합리적 핵심은 무엇인가?

(1) 금융 소비자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구체성 있는 일반 원칙을 수립하라는 것이다.  다른 산업에 비해 상대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금융소비자들의 정당한 권리(알 권리, 안전한 상품을 이용할 권리, 의견을 반영할 권리, 피해보상을 받을 권리 등)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공정한 시장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2) 정치적 이해관계와 거래의 질서가 통용될 수 없는, 투명하고 공정한 금융소비자보호기구를 설립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관의 재정 독립이 필수불가결하다. CFPA가 수수료(fee) 및 부과금(assessments)을 기반으로 한 독립체산형 조직 운영 모델을 갖고 있듯이, 새로이 신설되는 소비자 보호기구는 감시와 의존이 병존하는 기형적 구조가 아니라 명실공히 국가기관으로서의 공신력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3) 고객들에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전문회사 및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올바른 재무 조언 및 컨설팅을 제공해 줌으로써 개별 가정경제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일은 사회로도 대단히 중요한 일뿐만 아니라 시장에 그 수요가 흘러 넘치고 있다. 문제는 '고객이 믿고 상담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있는가' 라는 점이다. 하루빨리 거래의 표준을 정하고 전문인력을 양산하기 위한 제도 기준을 제정해야 한다.

금융소비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금융시장을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다. 금융시장 자체의 복잡성은 물론 시장 참여자들과 주변인들의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업은 공급자와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하고 건강한 금융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터널이다. 궁극적으로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단지 형식적인 기구설립 논의가 아닌, 실질적인 기준과 원칙이 담긴 금융소비자 보호법안 제정 및 독립 운영기관이 만들어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태그:#금융소비자, #CFPA, #소비자금융보호청, #금융감독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