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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대기자의 칼럼을 보았다. 최근 무상급식 논쟁이 한창인데 이에 대한 아주 소신있는 글이었다. 이런 대기자를 볼 때마다 너무나 뿌듯하다. 난 아직 별 볼 일 없는 시간강사인데, 이런 분들은 나에게 희망을 준다. 대기자. 그거 참 별 거 아니라는 희망 말이다. 얼마나 '글빨'이 좋으신지 문장 하나하나마다 사람을 흥분시킨다. 고맙습니다. 스트레스 풀어주셔서.

<문창극 칼럼 : 공짜점심은 싫다> 바로가기

글을 한번 볼까나?

공짜 점심이 지방선거의 주요 쟁점이 될 것 같다. 한쪽은 모든 아이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주자는 것이고, 다른 쪽은 왜 점심 값을 낼 수 있는 집 아이들에게도 무료로 점심을 주느냐는 것이다. 전자는 돈을 못 내는 아이가 주눅이 들 것이니 다 같이 무료로 하자는 것이고, 다른 쪽은 그 돈을 오히려 다른 데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한쪽은 포괄적 복지를, 다른 쪽은 선별적 복지를 주장한다. 이와는 별개로 무료로 점심을 준다니 얼마나 편하냐는 단순한 실리주의자들도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하게 지방선거 차원만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선택과 관련된 사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살아생전에 우리가 이런 논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캐나다처럼, 혹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처럼 의료비가 공공재로 '당연히' 이해되는 그러한 사회를 논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 줄 알았다. 아니 우리 국민들 맘 속에 그건 '개인의 문제'라고 정말로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드디어 우리도 포괄적 복지를 '당당히' 선거의 쟁점으로 삼을 수 있는 사회가 온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실리로 생각하는 것도 좋은 발상이다. 구차하게 여러가지 생각하지 않으면 복지는 완성된다. 그저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만 생각하면 되니까 말이다.

무료 급식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다.

이 분이 맘에 드는 것은 소신을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이 결국 이것 아니겠는가? 무상급식이 얼마나 '사회적'인지 모른 채, 사회적인 개념을 '사회주의적'으로 해석하시는 친구가 많으신 듯하다. 그렇다면 이 분의 살아온 '일대기'를 탓해야 되는데,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으니 참 야속하다.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개인이 해야 할 일과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구별되어 있다. 치안과 국방을 맡고, 다리와 댐을 만들고, 학교를 세우는 일 등 개인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은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대신 해 준다.

하나 빠졌다. 학교를 세우는 이유가 '학교를 다니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왜냐고? 그렇게 강제로 다니게 해야지만 결국 국가가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을 받은 자가 치안과 국방을 담당할 것이고, 다리와 댐을 만들 자원이 될 것이다. 그것이 아닌 어떤 경제적 활동을 하더라도 나라에는 보탬이 된다.

그래서 무상 급식을 하지 못할 것이면 의무교육도 애초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밥도 안 주고 일 시키면 짜증나는 것을 굳이 말로 해야 알아 듣나? 이건 그 밥 '맛'의 문제가 아니다. "밥도 안 주고 일을 시키는" 그 사고 방식 자체가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아웅. 이거 알바 좀 하셨으면 아실텐데.

그러나 국가가 그 한계를 넘어 개인의 생활까지도 책임지겠다고 나온다면 그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말이 좋아 포괄적 복지이지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사람중에 하늘에서 돈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마치 무상급식을 하면 세금을 몇 배나 내야 되고, 혹은 지자체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시스템을 잘못 구축해 논' 그쪽 사정이다.

원래부터 해야되는 것을 하겠다는데, 이미 잘못된 것을 되돌릴 수 없다고 주장하면 어떡하냐. 이 재원은 쓸데없는 곳에 돈을 지출만 하지 않아도 해결될 '껌값'이다. 그리고 정당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이기만 해도 해결된다.

물론 돈은 하늘에서 안 떨어진다. 왜냐하면 하늘로 가기 전에 다른 놈들이 다 챙겨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돈벼락 맞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서 복지라도 하늘에서 떨어져야 한다.

다른 한편 무료 급식은 배급 장면을 연상케 한다. 좀 심하게 비유하자면 우리 아이들이 공짜 점심을 먹기 위해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는 것과, 식량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북한 주민이 그 내용 면에서는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참 재미있으신 분이죠? 여기에는 아주 이상한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돈을 납부하지 않고 받는 것은 공짜"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포괄적 복지는 '1:1의 자본유통의 관계를 "다수 : 다수"로 변환할 뿐이다. 

내 아이의 점심을 내가 책임지는 것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개인의 독립이며 자존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는 것이지 국가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함부로 거창하게 말하면 안 된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들통나지 않은가? 자본주의에 종속되면 단지 돈을 주고 '구매'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담배연기를 지적해도 "내 돈주고 산 담배, 내가 피는데 왜 그러냐?"고 반문하는 사회 아니던가. 자본을 지불했다는 생색내기가 이렇게 저질이다. 이런 논리가 있기 때문에 "내 새끼 내가 마음대로 하겠다는데~"라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거다.

물론 여러 이유로 아이의 점심을 책임질 수 없는 가정도 있다. 생활보호 대상자도 있다. 그들은 별도의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 무료 급식을 받는다고 차별을 받아도 안 될 것이다. 티가 안 나게 운영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절대 불가능하다. 무조건 티가 난다. 초등학교에서 임시 소집을 할 때 임대아파트와 일반아파트를 구별하는 요지경 세상이다. 9살짜리가 아파트 외관만 보고도 임대아파트를 구별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다른 친구가 놀려대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것으로 차별을 극복하겠다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무료급식을 하기위해서 생활환경이 조사되고 어딘가에 신청서를 내야하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차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살면서 자꾸만 생각이 난다.

누가 티를 안 내주어도 스스로 자꾸만 티가 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마음의 짐을 누가 보상해준다 말인가? 생활보호자를 '배려'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부터 잘못되었다. 그들은 배려의 대상자가 아니라 단지 '살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라 사회의 도움으로 그들은 살아야하는 것이다.

공짜 점심은 국민 의식의 수준에서 단순하게 점심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공짜 점심이 아니라니까!  아~ 그리고 이 문제는 당연히 점심만의 문제가 아니다.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문제이다. 그런데 여기서 안정적이라는 것이 단지 가난한 집안이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무상급식은 가진 자가 "내가 베풀어준다~"는 오만한 생각을 줄여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적선을 할 대상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생생내기 좋아하는 부자들은 걱정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어린 친구들이 이런 수준 낮은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알고보면 무상급식은 참으로 '세련된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의식주를 포함해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 독립적인 개인은 사라지고 의타적인 인간만이 넘치게 된다. 이에 비례해 국가의 간섭은 심해진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은 시혜를 베푸는 국가에 반납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북한처럼 나라에서 먹여주고 입혀 주는 대로 살 것인가? 공짜 점심이 시행된다 가정해 보자. 분명히 이를 내건 정치인들은 자기 덕에 우리 아이들이 점심을 먹는다고 공치사를 할 것이다. 그들이 점심을 주었는가? 아니다. 우리의 세금이다. 세금은 국민이 내고 생색은 정치인들이 내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효율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내 돈으로 점심을 사 먹는 것과, 내 돈을 국가에 내서 국가가 그 돈으로 점심 값을 내주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효율적인가? 국가가 한다면 누군가 돈을 관리해야 하고, 이를 맡은 사람들에겐 특권이 생긴다. 때로는 낭비와 부정이 따를 수도 있다. 사회주의가 겪어온 부작용들이다.

말 그대로 틀렸다. 우리나라는 의식주를 국가가 책임져주지 않는다. 이건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 '점심'을 제공하자는 거다. 왜? 우리나라가 그들을 그 시간에 학교에 없으면 '안 되는 인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건 국가의 간섭이 아니라 의무다. 의무에 효율성을 따지자고? 또한 이를 가지고 생생내는 정치인은 그 자체로 저질로 평가받으면 된다. 걱정도 많으셔라.

개인의 선택도 무시된다. 왜 누구나 똑같은 메뉴의 점심을 먹어야 하는가? 떡을 싸 가고, 샌드위치를 싸 가면 안 되는가? 그것이 개인의 다양성이다. 우리 집 아이들의 경우, 때때로 학교 급식 메뉴가 지루하다며 도시락을 싸간 적도 많다. 그런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왜 뒤늦게 개인의 취향을 무시하고 획일주의로 나가려는 걸까? 개성을 강조하면서 가장 개인적인 먹는 것부터 똑같음을 강요하는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그게 바로 가난을 이용하는 위선이며 포퓰리즘인 것이다. 무료 급식을 반대한다는 한나라당은 '왜 부자들에게까지 공짜 점심을 주느냐'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는 가난을 이용하는 포퓰리즘과 똑같이 부자를 때리는 또 다른 포퓰리즘인 것이다.

무상급식을 하면서도 '빵을 먹고 싶은자에게는 빵을 먹을 권리'를 추구하면 된다. '절대로 불가하다'는 전제를 하기 때문에 무상급식이 '빨갱이논리'로 둔갑할 수 있는거다. 물론 이런 극단적 전개가 보수주의자들의 버릇이지만.

내 아이의 점심을 내가 책임지는 것은 부자냐, 가난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부모의 당연한 책임이자 정성을 쏟고 사랑을 할 수 있는 권리다. 자녀 양육 문제에서 가정의 책임이 무너진다면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 국가나 권력이 나설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 의존형 인간들이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지켜 낼 수 있을까? 그런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할까? 결국 전체주의, 공산주의형 인간을 만들어 내지는 않을까? 개인이든 국가든 진정한 번영은 독립심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무료 급식 문제는 단순하게 먹는 문제, 편리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이자 이념의 문제다. 공짜 점심 한 끼로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팔 수 없다. 공짜 점심이 혹시 실현된다면 '내 아이는 내가 먹이겠다'는 도시락 싸가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 그것이 가정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초를 지키는 일이다.

자본주의는 특히나 가부장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버지가 평생을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구조로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안해서라도 아버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래서 항상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당연히 먹어야 할 음식"이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구경도 못할 음식"으로 자라오는 내내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기 때문이다.

만약 아버지에게 이 문제가 조금은 여유로웠다면 다른 무엇을 위해 더 열정을 쏟으시지 않았을까? 가정의 가치를 바로 세운다는 것이 "지금 네가 먹는 밥은 이 아버지가 피땀 흘려 번 돈이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가? 조금 쪽팔리지 않은가? 그렇게 자녀를 '기성세대의 밑'에 두어야 하는가?

그리고 무상급식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단 1%도 훼손하지 않는데 내 자동차(99년 대우 라노스, 시가 160만원)를 걸겠다. 무섭지? 그러니 제발 함부로 겁주는 버릇좀 고치시길. 자꾸 이런식이면 정말로 '철학'의 문제로 접근하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말이다. 무상급식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무상급식을 '사회주의 어쩌고 ' 식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에 이 사회는 제발 따끔한 충고를 해주어야 할 듯 하다.

그리고 나는 보따리들고 이 학교 저 학교 떠돌아다니는, 물론 박사학위도 없는 "시간(대)강사"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http://blog.daum.net/och7896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무상급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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