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깎고 승복을 하나 얻어 입고 갔더니 깜짝 놀라시며 구참(묵은 중) 같다고 하셨습니다. 머리를 깎으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로 거리를 걸어서 한 바퀴 돌았던 기억이 납니다. - 본문 198쪽
스님 되는 일이 그렇게 좋으셨나요? 그 좋던 스님 생활을 그만두고 법정 스님이 우리 곁을 떠났다. 일기일회. 모든 것은 생애 단 한번뿐. 매일 똑같은 날이 반복되는 듯해도 어제와 오늘은 분명 다르기에,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고 하시며 스님은 갔다.
이 책 <일기일회>(문학의 숲 펴냄)를 사놓고 오늘내일 읽어야지 하는데 스님이 입적하셨다. 스님의 '마무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우리가 본대로다. 법정 스님은 만인의 가슴을 향기롭게 물들이고 소박하게 떠났다.
책 절판하라는 말씀에 부랴부랴 책꽂이를 뒤져보니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와 <버리고 떠나기> 그리고 이 <일기 일회>뿐이네. 흐린 보랏빛의 <물소리 바람소리>도 분명 있었는데 누굴 주었는지 못 찾겠다.
많은 사람들이 <무소유>를 말하지만 나는 20대 시절 <텅빈 충만>으로 처음 법정 스님을 만났다. 텅 빈 충만. 그 형용모순이 주는 감동과 따뜻하고 정갈한 글에서 한없는 충만감을 느꼈다.
그러나 당시는 20대라 당장은 나 자신을 그렇게 비우고, 또, 그렇게 충만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허나 이 다음 언젠가는 그 비움의 미학을 다시 꺼내어 내 삶의 등불로 삶아야지 하며 '텅, 빈, 충, 만' 네 글자만은 가슴에 새겼다.
그러다 내 나이 30대는 가톨릭 사람들에 아름다움을 느끼느라 잠시 불교도 잊고 스님도 잊었다. 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2000년 무렵부터 우리나라 절들은 대형 금불상, 석불상 건립에 앞을 다투었다. 대형 불상이 돈 되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바른길이 아니라면 부처님이 꿈에라도 스님들에게 나타나 '내 이름 팔지 말라' 죽비를 내리쳐야 되는데, 왜 바라만 보시나 원망스러웠다. 때문에 한국식 불교가 싫어 부처님의 가르침도 매력 없었다.
얼마나 베풀고 나누었는가만 재산으로 남을 뿐, 다른 것은 다 무상
그랬는데, 이렇게 바야흐로 봄인데, 꽃이 채 피기도 전에 법정 스님이 돌아가니 새삼 사무친다. 스님도 사무치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사무치고. 스님을 모르고 산 지난 십여 년이 헛헛하다. 하여, 어리석은 중생이 뒤늦게 스님의 지난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마디마디 향기로 가득 차 있고나.
특히나 이 책은 내가 불교에 관심 '없던' 지난날들(2003년~2009년)이자 스님이 마지막 생의 불꽃을 태우던 시절에 한 말씀들이라 더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글의 내용은 물론 문장의 형식, 법문을 하시는 숨결까지 걸림 없이 아름답다.
물이 흐르고 꽃피는 것이 보이는 '수류화개실'에서 고요하고, 소박하고 정갈하게 사는 것이 스님이 제일로 추구하는 삶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님은 나눔을 통한 깨달음을 가장 강조하였다. 사람은 늙을수록 '성숙'해져야 되는데 그 성숙은 '나눔'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또 사람은 성숙해질수록 '젊어'진다고 하였다.
때문인지 스님은 세속 나이 78세에 입적하였지만 나눔을 통해 성숙해지고 젊어져서 내 느낌에는 스물넷 머리 깎았던 그 파리한 젊은 나이로 돌아가서 입적하신 듯하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과 진실을 말하고, 향기로움은 그 청정과 진실의 사회적인 영향력, 메아리입니다. 도량에서 익히고 닦은 기도와 정진의 힘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 가정이나 이웃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시시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니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지 마십시오. - 본문 21쪽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삶 자체가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거듭거듭 성숙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혜와 용기가 생겨서 휩쓸리지 않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 본문74쪽
내안의 샘에서 아름다움이 솟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남과 나누는 일을 통해 나 자신을 수시로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선하고 염불하고 경전을 읽는 것은 자신을 가꾸는 추상적인 일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눔의 삶을 살아갈 때 내안에 들어있는 자비심이 샘솟듯 생겨납니다. 아름다움은 시들지 않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 본문 96쪽
자비심에서 지혜가 싹틉니다. 자비가 없는 지혜는 지극히 메마른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깨달음을 우선시하면서도 깨달음의 행을 할 줄 모릅니다. 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지, 깨달음의 행 없이 정상에 이를 수 없습니다. 끝없는 자비의 행을 통해 지혜가 싹트고, 지혜와 자비가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의 길입니다. - 본문 194쪽
결국 한 생애에서 무엇이 남습니까? 얼마만큼 사랑했는가, 얼마만큼 베풀고 나누었는가, 그것만이 재산으로 남습니다. 그 밖의 것은 다 허무하고 무상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 본문 228쪽
사람은 살아온 세월만큼 인간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성숙할수록 젊어집니다. 성숙해져야 모든 것이 제대로 보입니다. 전에는 결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이를 먹고 안으로 여물기 시작하면 새롭게 다가옵니다. 산마루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자기가 한 걸음 한걸음 밟고 올라온 길이 한눈에 내다보입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 본문295쪽
이처럼 스님은 매 법회 때마다 관념적으로 수행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선행'과 '나눔'을 실천하길 거듭거듭 강조하셨다. 때로는 같은 말로, 또, 때로는 다른 비유로 복을 짓고 마음을 써서 깨달음에 이를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승복 입은 채 다비해주고
사리 찾으려 하지 말라
탑도 세우지 말라
책은 절판해라.....'
마지막 가는 길에서까지 스님은 '무소유'를 말씀하셨다.
'삶을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순간 속에서 살고 순간 속에서 죽으라. 자기답게 살고 자기답게 죽으라.'
'집이든 물건이든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고 그날그날을 감사하면서 순례자처럼 살라'고도 하였는데 그래도 책마저 절판하라 함은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아직은 안 되는군요. 그 소중한 잠언들을 절판하라 하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가란 말인지요. 흐려진 우리들의 눈과 마음이 좀 더 맑아질 때까지 만이라도 절판의 때를 미뤄주면 안될는지요.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뜨거운 장작불에서 한줌 재로 말끔히 소진 되신 그 '텅 빔'만큼 또 다른 세상에서도 그 '비어있음'만큼 '충만'으로 영원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스님의 맑은 향기는 두고두고 우리네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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