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장흥 앞바다.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매섭다. 거센 파도와 칼바람 속에서도 막바지에 접어든 물김을 수확하는 어민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여기서 생산되는 김은 최근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장흥무산김'이다.
'무산김'은 어민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유기산을 쓰지 않고 전통방식 그대로 바닷물과 햇볕의 힘만으로 김을 키워낸 것을 일컫는다. 이 무산김은 장흥무산김주식회사를 통해 '친정김'(친환경 청정해역에서 생산하는 김)이란 브랜드를 달고 백화점, 대형 할인점 등에서 팔리고 있다.
장흥 김 양식 어민들이 무산김 생산에 들어간 것은 지난 2008년 겨울. 건강한 먹을거리를 찾는 소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어민들 사이에서도 김 양식에 친환경 생산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직후부터다.
"산을 사용함으로써 식품의 안전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또 일부에서 유기산이 아닌 염산을 사용해 김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죠. 그러다 보니 소비가 줄고 가격이 떨어졌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장흥 무산김 생산의 숨은 주역인 장흥군청 위성이씨의 얘기다. 그 특단의 조치는 바로 유기산을 사용하지 않고 김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유기산은 김의 성장을 돕고 파래와 잡태 등 이물질을 제거해 보기 좋은(?) 김을 생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어민들은 40여 년 동안 사용해 온 유기산의 매력을 하루아침에 포기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하물며 무산김 양식이 검증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칫 한 푼도 건지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모험이었다.
하지만 어민들은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지난 2008년 5월 2일, 장흥 김 양식 어민들은 "유기산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장흥군도 어민들을 돕기 위해 유기산 구입비용 3억 원을 양식기자재 구입비로 전환해 지원하며 힘을 실어 주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장흥군은 김 양식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CCTV를 설치해 놓고 서로 감시하며 신뢰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군청에서도 언제든지 김양식장을 화면으로 보며 혹시나 유기산을 쓰는지 감시하는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생산량은 줄었다. 일손을 몇 배로 더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민들은 서로 격려하고 때로는 서로 감시자가 되어 경쟁도 했다. 장흥 무산김의 청정 이미지를 어민들 스스로 하나씩 만들어 간 것이다. 이러한 관리 덕에 지난해 4월엔 친환경수산물 인증과 국제유기인증(IFOAM)을 획득했다.
전남도는 장흥어민들의 노력을 평가, 지난해 전남수산경영 대상을 주었다. 농림수산식품부 주최한 수산물브랜드 대전에서도 은상을 받았다. 자연은 더 큰 상으로 보답했다. 유기산 사용을 끊으면서 바다가 놀랄 만큼 깨끗해진 것이었다.
바다 식물인 잘피가 우거져 자연스레 바다숲이 조성됐다. 사라져 가던 어종들이 돌아오고 낙지도 많이 잡혔다. 청정해역에서만 사는 매생이 재배 면적도 늘릴 수 있었다. 어민들의 소득이 높아진 것은 당연지사. 무산김 덕이었다.
어민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무산김 생산과 동시에 가공과 유통에까지 눈을 돌렸다. 제아무리 좋은 김을 생산하더라도 가공과 유통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유통회사를 설립하는 건 무산김 생산 결정만큼이나 힘겨웠다. 주민들의 의식 전환이 문제였다. 주민공청회를 열다섯 차례나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유통회사 설립을 주도하는 공무원과 이석봉 교보증권 과장, 어민 대표 등은 거의 1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어민들을 찾아 다니며 설득을 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2월 무산김 생산 어민 대부분이 참여한 장흥 무산김주식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전국 수산물 주식회사 1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유통회사 설립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무산김주식회사는 생산 어민 소득 증대라는 유통회사의 설립 취지에 맞게 시중보다 비싼 값에 김을 사들였다. 어민들은 지난해 속당 700원씩, 올해엔 500원씩 더 받고 팔 수 있었다.
유통회사 설립은 지역 주민들의 일자리 창출에도 한 몫 했다. 지난 한해만도 직·간접적으로 350명의 고용을 창출했다. 이 같은 성과는 '국가고용전략회의'에 일자리 창출 우수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회사지만 계획은 당차다. 생산·가공·유통을 일원화해 장흥에서 생산하는 무산김 전량을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현재 물류센터를 건립하고 있다. 저온저장고는 이미 세웠다. 오는 10월 조미김 가공공장이 완공되면 최소 20만 속을 가공 판매할 계획이다.
송명섭 장흥무산김 대표이사는 "최근 지구 온난화로 바다 환경이 급변하고 있어 장흥 지역 특성에 맞는 김 종묘를 개발하고 있다"면서 "종묘 개발만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어민소득 증대는 물론 회사운영에 따른 배당소득까지도 출자어민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