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대(戀主臺) 쪽을 올려다보던 장칠서(張七鼠)는 입맛을 다시며 끄응! 단음을 토해냈다. 동짓달에 날리는 눈발엔 물 기운이 섞이고 원뢰(遠雷) 치는 하늘에 회색구름이 뒤엉켜 진눈깨비를 뿌려댔다. 그는 귀를 곧추 세운 채 일체의 몸짓을 멈추었다.
우르릉 쾅쾅!시퍼런 불칼이 하늘의 동서로 달리며 뇌성벽력을 일으키자 바위 아래서 뭔가 솟구치듯 뛰어나와 잔설 깔린 산자락을 타고 달려가는 게 있었다. 설상사(雪上蛇)였다. 장칠서의 몸은 설상사가 되돌아올 지점을 향해 반대쪽 숲길을 더듬어 달리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걸음을 잡은 건 사내의 주검이었다.
이 일은 관아에 알려져 관속들이 쏟아져나와 차일을 치고 금역(禁域)을 설치했다. 잡인 접근을 막은 송화가 검시기록을 작성하자, 사건 현장을 처음 목격한 장칠서는 뒤늦게 달려온 동료인 듯한 털북숭이 사내에게 눈인사를 건넨 후 관장으로 뵈는 정약용의 질문에 다소곳이 답변을 내놓았다.
"저 아래 관음사(觀音寺)에선 일체 살생이 금지돼 있습지요. 산 꿩 한 마릴 잡아도 불벼락 맞는다 했으니 장난삼아 돌팔매질 하는 것도 금지했어요. 저 같은 땅꾼이야 애당초 지옥에 떨어질 팔자니 바위 밑의 뱀을 잡는다고 더한 지옥에 떨어지겠습니까."
사내는 특이하게도 이름 자에 '쥐 서(鼠)' 자를 쓰고 있었다. '일곱 번째 쥐'. 그렇다고 형제들이 많은가 하면 그도 아니었다. 오직 칠서 하나 뿐인 외아들이었다. 자식을 세상에 내놓으면 겨우 몇 달 뭉그적거리다 저승길로 떠나버리자 그의 아비는 일곱 번째 낳은 자식에게 천하디 천한 '일곱 번째 쥐새끼'란 이름자를 붙여 은근히 장수하길 빌었다.땅꾼들과 어울리면서 솜씨를 보이자 그에겐 다른 별명이 붙었다. 장 구렁이. 땅꾼들 세계에서 관악산 장 구렁이는 제법 솜씨 좋은 잡놈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체를 처음 발견한 그는 근처를 지나가는 스님에게 이 일을 알렸고 근동엔 사내의 주검에 대해 구구한 말들이 퍼져나갔다. 정약용은 그 점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두었다.
"죽은 자는 남산골 사는 서기원(徐起元)이랍니다. 그런대로 성격이 원만해 원한 살 일 없는 것으로 알려진 샌님이랍니다. 이토록 흉측한 모습으로 산속에서 발견된 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답니다."
모여든 사람 중에 마흔 어림의 아낙은 연주대 근방에서 사내를 보았다고도 했고, 관음사에 머문다는 효각(孝覺) 스님은 자신의 나이 스물 셋 때인 지난 해 정월 관음사 대웅전에서 불공 올리던 서기원을 보았다고 확인했다.
정약용이 주변 사람들과 나눈 얘기들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을 때 검시기록을 든 송화가 다가왔다. 구경꾼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자 주변을 쓸어가던 시선을 송화에게 고정시킨 채 정약용의 물음이 떨어졌다.
"주검 상태는 어떠냐?"
"오른쪽 흉복부를 날카로운 칼로 찔러 절명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현장에 흉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흘린 피가 옷을 적시고 그대로 얼어붙었습니다. 이레 전 첫 눈이 내렸고, 이후 날씨가 뚝 떨어져 산속은 체감 온도가 영하 7도는 됐을 겁니다. 일단 관아로 옮겨 검사해 봐야겠습니다."
현장은 여전히 설치된 줄 안에 잡인 출입을 차단시켰고, 영하의 날씨 탓에 관원들이 번을 서는 건 중지했다. 관아까지 동행한 장칠서와 털북숭이 사내는 마뜩찮은 듯 하품을 쏟아내며 짜증을 부렸다.
"아따, 그 놈의 설상사(雪上蛇)만 잡았어도 맘 터억 놓고 이런 곳에 오는 건 운수 탓이려니 하것소만, 오늘 일은 엄청 일진이 사납고만이라우."정약용이 가볍게 사과했다.
"나름대로 일정이 있을 것이오만 이것은 사람이 죽은 일이오. 억울한 죽음이니 장칠서씨가 보았던 그대로 말해 준다면 죽은 자가 억울함을 풀 기회를 준 것이니 어찌 가만있겠는가. 가까운 장래 큰 보응을 줄 것이네."
그제야 장칠서는 얼굴을 환히 폈다. 보기와는 달리 그는 말 주변이 있었다. 가만 두었어도 제 놈이 아는 한도 내에서 모든 말을 나불거렸고, 아리송한 부분은 동행한 털북숭이 사내의 협조를 받아 결론을 내려주었다. 정약용이 메모 첩을 넘기며 얘기를 정리했다.
'자신은 눈 위를 달리는 뱀을 잡으러 왔다는 것이렷다. 설상사는 소한이나 대한 추위가 심할 때 나타난다는 것으로 겨울잠을 자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잇감을 삼킨 뱀이 부자(附子)나 산삼의 열을 견디지 못해 눈 위를 달려가는 것이고!'그러한 뱀을 잡으려면 일진을 잘 골라야 했다. 눈이 내리는 겨울 마른하늘에 번개 치는 시각이면 아주 적절한 때라했다. 바위 밑에 숨은 뱀이 뛰어나오기 때문이다. 오늘이 그렇듯 좋은 날인데 서기원의 주검을 발견하면서 운수가 뱀을 따라 달아나 버렸다는 아쉬운 입맛이었다.
관아로 돌아와 밤늦도록 사체를 검험하던 송화와 관원들은 어둑새벽이 지나서야 복검기록을 작성하고, 시형도(屍形圖) 안에 '간(肝)' 모양의 그림을 그린 채 굳은 낯으로 다가왔다. 정약용의 방에 들어오기 전 상당히 고심했을 것으로 생각될 만큼 의문점 몇 가지를 기록해 놓고 있었다.
"사체의 임자는 서기원(徐起元)으로 남산골 선비라 했습니다. 관원을 그곳에 보냈으니 아침이면 무슨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슴에 칼을 맞은 것 같던데 송화가 보기엔 어떤가? 강도라도 당했던가?"
"강도는 강돕니다만 금전이 아니라 '간'입니다."
"간? 사람의 간?"
"관악산은 경기 오악(五嶽)으로 지형이 험해 경기 인근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문둥병자들이 산속에 숨어 지낸다는 말이 있네. 하늘이 낸 천형(天刑)이니 특별한 약이 아니고선 치료가 불가능해 '사람의 생간'이 문둥병 치료에 특효하다는 얘기를 철저히 믿고 있나 봅니다."정약용의 시선이 검시기록 곁에 놓인 무명으로 싼 물건으로 향하자 그제야 깨달은 듯 관원이 설명했다.
"아 참, 이건 은반집(銀環)입니다. 죽은 자의 피 묻은 옷가지를 벗기던 중 떨어졌는데···,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싸구렵니다. 대략 한 돈 남짓의 무겝니다만 반지 안쪽에 원(元)이란 글씨가 씌어진 것으로 보아 사체의 주인이 지닌 물건으로 보입니다."
정약용은 관악산 일대에 관원들을 파견해 문둥병자들이 숨어 있는지를 조사하는 한편 송화를 관음사에 보내 서기원이 찾아온 연유를 알아오게 하였다.
다음날, 아직 해뜨기 전이었으나 송화는 숨 가쁘게 달려와 기록 보관실을 찾아들었다. 나름대로 풀리지 않은 매듭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두 해전 좌포도청에서 넘겨받은 자료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당시의 살인사건에 대한 조사기록이 두루마리로 남아 있어 기록을 눈으로 읽은 후 나름대로 확신을 다진 듯했다.
"세 해 전 이맘 때, 남산골에서 목매 죽은 여인이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달려간 포교들의 일처리가 미숙해 현장을 훼손했거든요. 의문이 가는 부분을 몇 번이나 재조사 청구를 했으나 종사관인 김천호(金川濠) 나으리가 시간 낭비라고 봉합해 버린 바람에 유야무야 됐습니다. 그 후 김천호 나으리는 좋지 않은 사건에 연루돼 파직됐고 이후 그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어요."
"네가 보기엔 다르다 그 말이냐?"
"예에, 나리."
"다르다?"
"나리, 이 검시기록을 보십시오. 이것은 소인이 작성하지 않았으나 소인의 주장을 크게 반영한 것입니다. 당시 사건 현장에 소인이 도착했을 때엔 좌포도청에서 포교들이 나와 여인의 주검을 끌어내린 후 목을 매단 끈을 이미 푼 상태인데다···."
"그러니까 너의 주장은 그런 게 아니냐! 목을 매단 끈의 흔적은 단순히 목을 매단 게 아니고, 누군가 올가미를 만들어 뒤에서 목에 건 후 잡아당겼을 가능성을 얘기하지 않았느냐? 목을 매 자진하는 경우, 당연히 대소변이 흐르는데 현장엔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 게 아니라 좌우로 범벅을 이루었다는 것 아니냐?""그, 그렇습니다."
"자연스럽지 못한 결말은 어느 곳에나 있다. 그것을 규명할 시기를 놓치면 나중엔 무엇으로도 증명되지 않는다. 나도 그런 실수를 범한 적 있다. 허면, 네가 품은 생각을 말 하거라."
"예에?"
"네가 서둘러 관아에 달려온 것은 세 해 전 검시기록을 내게 보여주기 위함 아니냐? 아니면, 내가 무얼 어찌 해 주길 바라서냐?"
송화는 그 말엔 말문을 열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 무렵, 관악산에서 잡혀 온 문둥이 부부는 무명천으로 얼굴을 똘똘 휘감은 채 불빛이 없는 곳으로 몸을 웅크렸다. 자신들이 어떤 일을 당할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문둥이 부부는 서기원의 모습을 보자 질겁했고 더구나 사체에서 간이 없어졌다는 관원들의 질책 같은 어투엔 잠시 침묵하는 듯했다. 이윽고 문둥이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서씨 어른을 알고 있습니다. 세 해 전, 산길을 오르던 선비님과 어린 아기를 구해 준 인연으로 지금껏 도움을 받아 사람들 눈을 피해 숨어 지냈습니다만, 이렇듯 은인께서 비명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젠 우리가 갈 길을 떠나야지요."
문둥이 사내가 들려준 얘기는 세 해 전, 동짓달 이때쯤에 갓난아이를 안고 산길을 오르던 서기원이 실족해 쓰러진 걸 발견하면서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서기원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약을 갖다 주었다는 것이다.
"남쪽으로 가겠다고 하자 선비님은 봄까지만 기다리라는 거예요. 관악산을 오르는 땅꾼들에게 명약을 부탁했으니 좋은 소식이 올 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듯 주검으로 발견됐으니···."
간(肝)이 사라진 건 누군가 문둥이 부부에게 혐의를 씌우기 위한 함정 같은 것이라고 정약용은 생각했다. 문둥이 부부를 일단 보호시설로 보낸 후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죽은 서기원은 세 해 전 부인을 잃었다. 당시의 사건 기록은 송화가 알고 있으나 검시기록에 남은 건만으로는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서기원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선산을 비롯해 나라에서 받은 사전(賜田)이 적지 않았으나 본인은 그런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데, 누군가가 서산 인근에 있는 땅을 일부나마 명의를 도용해 착복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좌포도청 종사관을 지낸 김천호(金川濠)였다. 세 해가 지났으니 이미 죗값을 치르고 풀려났을 것이지만 김천호가 호락호락 물러설 위인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기록을 뒤적이니 서기원의 재취가 바로 김천호의 누이동생이라는 점에 관원들은 아연실색이었다.
'경기 오악'의 하나인 관악산(冠岳山). 도성을 감싼 외사산(外四山) 중의 하나로 경복궁의 조산(朝山)이 되고 개성의 송악산(松嶽山), 가평의 화악산(華岳山), 파주의 감악산(紺岳山), 포천의 설악산(雪嶽山)과 함께 경기 오악의 하나로 일명 금강 · 경기금강 또는 백호산(白虎山)으로 불렸다. 태종 때 문신 변 계량(卞季良)은 관악산을 이렇게 노래했다.
관악산 남쪽 청계산 북쪽에절집이 우뚝하여 긴 숲을 눌렀네밤비가 고함지르니 주린 호랑이 부르짖는 듯하고해돋이에 조잘거리니 깊은 새가 우는 듯하네구름이 창밑에서 나니 담쟁이덩굴에 얽히고길이 돌 모퉁이를 도니 소나무 회나무가 우거졌도다멀리 생각건대 혜사(惠師)는 응당 잘 있을 것이고산 가운데서 밤마다 꿈을 찾누나관악산에는 시 · 서 · 화의 삼절(三絶)로 유명한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묵향이 남아있는 자하동을 비롯해 옛 선인들의 자취가 아련했다. 송화와 연주대에 오른 정약용은 강씨 성을 쓰는 은장이 노인을 찾았다. 때마침 막걸리 몇 사발에 얼굴이 불콰해진 노인은 상대를 쓰윽 보고 한마디 내놓았다.
"죄진 놈을 찾으려면 산 밑에서지 어찌 산꼭대기를 찾아와 흉한 놈을 찾는가?"
그런 다음 송화를 향해서는,
"참으로 고운 아가씨가 흉한 일로 고생하는구먼. 하긴 세상살이가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알 수 있는 것만은 아니지."
입맛을 다시던 노인은 펑퍼짐한 바위 위에 엉덩이를 올려놓으며 먼 산에 시선을 던진 채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 어른 중 강 득룡(康得龍)이란 분이 있었소. 공민왕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란 벼슬을 지냈는데 그 분은 신덕왕후 강씨(康氏)의 오라버니였소.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자 홀로 관악산에 들어가 멀리 송악산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답니다. 그래서 생겨난 명칭이 의상대(義相臺)인데 지금은 옛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연주대로 바뀌었지요. 그런 이유로 은장이에 불과한 나 역시 이곳에 머물며 오가는 사람들의 성쇠(盛衰)를 살펴 은반지 안에 써주는 걸 호구지책으로 삼는답니다."
[주]
∎설상사(雪上蛇) ; 눈 위를 달리는 뱀이라고 한다. 부자나 산삼 등을 먹고 겨울잠에 들어가야 할 뱀이 열기를 참지 못하고 뛰어나와 눈 위를 달린다. 이 뱀은 귀약 약제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