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異國) 여행이 가진 특별한 장점은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를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십대 중반의 첫 유럽여행은 그때껏 품고 있던 대륙의 개념을 실체화시켰고(예를 들면 아시아와 한반도의 물리적 비율 같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에서 나 자신과 내 나라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3월 훌쩍 바다건너 일본으로 온 것도 다르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400여 년이 흐르도록 '이웃집 원수'로 지내는 상대국의 참모습을 알고 싶었고, 반대로 적당한 거리에서 내 집 돌아가는 꼴도 보고 싶었다.
이런 의미에서 현지서 보는 일본 서민의 삶과 다양한 문화권의 외국인 여행자와의 만남은 편견과 오해, 무지를 덜어주는 값진 경험이었다. 비록 언어 장벽에 부딪혀 안타까울 때도 있었지만, 낯선 길을 스스로 찾아온 자유에 대한 공감은 그보다 큰 틀에서의 교감과 우정을 키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길벗1)이 소녀의 이름은 마리아나다. 오사카의 첫 번째 숙소에서 만났다.
로비에서 공짜 모닝커피를 홀짝이며 무심코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보는 상황이 되었다. 둘만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은연 중에 몇번 눈이 마주쳤고 결국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은 게 대화의 시작이었다.
수줍은 표정에 조용한 미소가 예쁜 친구였는데, 그보다 이 순간을 기억하는 이유는 참으로 오랜만에 '언어가 생물'임을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인 시절 간간히 위기의식을 느껴 영어학원을 다녔는데 교재 속 활자들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다보면 마치 박제된 동물을 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아주 기본적인 회화 몇 마디도 실전에서 활용해보면, 그 말들이 생명을 얻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본인처럼 외국어를 잘하고 싶으나 좀처럼 의욕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한 달 학원비로 차라리 여행을 떠나라. 분명 그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길벗2)이 아저씨 역시 같은 숙소에서 만났다. 일본인이며 본인 말에 따르면 베트남과 중국, 한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고 있다.
한날 비오는 바깥 풍경에 취해 멍하니 앉았는데 남자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별로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고독한 사람의 절박한 표정이 읽혀 자리를 지켰다.
중국인이냐 물어서 한국사람이라 했고, 이 말을 일본어로 했더니 현지말을 하는줄 알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 그래서 "니홍고 데키마셍(일본어 못해요)" 하며 제지를 하니 되레 재밌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여가며 현지말과 서툰 영어를 쏟아냈다. 한마디로 집요한 사람이었다.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있으니 그가 아무래도 안 되겠단 표정을 짓고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아이폰처럼 생긴 기계의 액정에서 도라에몽이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예의상 몇 번 해보고 돌려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버튼 몇 개를 꾹꾹 누르고 기계를 입에 댄 채 일본어 문장을 또박또박 말하니 이어서 "Are you traveling(여행 중이에요?)" 하는 영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오!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 컴퓨터 활용범위 90%가 타자요, 아이폰 열풍 따위 눈길도 안 줬던 아날로그형 인간인데, 언어의 장벽을 순식간에 허무는 이 문명의 이기 앞에선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그는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듯 그후 한 시간 가까이 수다를 떨었다.
일본어를 공부하지 않은 게 영 아쉽던 차에 현지인 친구를 사귀면 금세 말을 익힐 수 있겠단 생각을 하면서, 현재 우리나라 사교육비 수준이면 차라리 저런 기계를 온국민에게 상용하시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나저나 이 기계의 정체를 아직도 모르겠다. 혹시 한국 건가요?
(길벗3)다음은 많은 걸 생각하게 했던 캐나다 청년과의 일화다. 그는 한국에서 8개월간 영어강사를 한 전력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름 몇 개와 '안녕하세요' 한 마디 외 우리말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어를 몰라도 한국에 사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며 웃는 그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이틀간 시내구경을 같이 다니면서 그는 가끔 내 앞에서 현지인을 희화화시키기도 했다. 일례로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사고 나와서는 "일본 사람들은 영어로 말하면 알겠다 답하지만 실은 못 알아들어. 방금도 커피를 달랬는데 햄버거를 주잖아" 하면서 카운터의 여직원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냈다.
어이없던 순간은 이런 그가 일본에서 강사일을 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일어를 익히고 있다고 말한 때였다. 한국에선 한국어를 알 필요가 없었다는 그가, 영어를 못하는 일본인을 놀리면서도 그 나라 말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 분명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동시에 내 발등을 내가 찧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와 마지막 만나 식사를 하던 날, 한국에 대한 인상을 솔직하게 말해달라 했다. 그러자 웃음기 가신 얼굴로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국 사람들은 처음엔 무척 친절해. 하지만 조금만 친해지면 아주 무례해져. 정말이야.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그랬으니까." 정말로 다 그런 건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많은 부분 공감이 가는 대목이기도 했다. (길벗4·5)
교토에서 만난 프랑스인 사이먼과 러시아인 제니아다. 모두 같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다. 사이먼은 건축을 전공하고 현재 기약없는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며, 제니아는 한국 드라마와 배우 이준기, 강동원의 열혈팬이면서 김기덕 감독 영화의 마니아라고 해서 나를 놀래켰다. 상당히 사교적인데다 술담배를 좋아해 처음으로 주량 면에서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사진 속 이날은 사이먼이 오전에 체크아웃을 했다 심야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다시 숙소로 돌아온 날인데, 일본인 직원의 완강한 태도에 쫓겨나다시피 해 근처 술집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참이다.
말수 적고 차분한 사이먼이 처음으로 흥분을 한 듯 보였는데, 나는 "그저 숙박업계의 상식일 뿐이니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매정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제니아는 "한국 남자들은 왜 영어를 하지 못하냐"고 물었다. 또 자신이 국적을 얘기하면 왜 하나 같이 놀라는 표정을 짓는지도 궁금해 했다.
첫 번째 질문에는 "우리도 물론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다. 그러나 실질적인 말하기 능력은 떨어지는 편"이라고 솔직히 답했다. 두 번째 질문에는 "외국인이니까 신기하고 반가워서 그럴 거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녀가 국적을 말했을 때 다소 의외였다. 러시아 여자 하면 금발에 쭉쭉빵빵 8등신 미녀가 떠올랐기 때문인데, 이 말은 안 하는 게 나을 듯 했다.
그리고 이날 사이먼이 가진 영어판 일본 가이드북을 보니 동해가 'Sea of Japan(일본해)'으로 적혀 있었다. 각국의 여행자들이 드나드는 오사카의 유명한 숙소 벽면에 붙은 지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나라의 영토 분쟁을 그들에게 설명하기란 내게는 역부족이었다.
(길벗6)
이 친구들 역시 교토에서, 앞서 말했듯 사교성 뛰어난 제니아의 중재로 알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건 사진 왼쪽에 있는 재일교포 3세 최용수 군이다.
둘은 이날 소개팅을 한 사이였고, 시내 구경을 하던 제니아가 제안을 해 1차를 함께 한 뒤였다. 숙소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던 나와는 우연히 만나 2차를 오게 됐는데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용수 군이 술자리가 무르익자 상당히 예리한 질문을 던져왔다.
그는 최근 도요타 사태를 예로 들며, "한국의 삼성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니 "일본 도요타가 한국의 삼성과 그 위치가 비슷한 걸로 아는데, 최근에 도요타가 제품 결함으로 대량 리콜 사태를 맞지 않았나. 그렇다면 삼성은 이대로 괜찮은지 궁금하다"라고 했다. 자신이 볼 때는 "당장은 삼성이 잘 나갈지 몰라도, 지금처럼 한다면 분명 나중에 큰 일이 생길 거다"라고 덧붙였다.
너무 옳은 말이라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국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는가가 앞으로의 관건이다"라고 내 생각을 전했다.
용수 군의 말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삼성. 그 회장은 천문학적인 규모의(물론 본인에겐 예외겠지만) 조세포탈로 유죄를 선고받은 경제사범이다. 그러나 경제를 최우선하는 이 나라 대통령은 다시금 올림픽 유치로 경제를 부흥시키란 특명과 함께 그를 특별사면했다. 그리고 삼성의 회장은 최근 "앞만 보고 가자"는 의미심장한 취임사와 함께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삼대째 일본에 사는 용수군도 아는 '삼성 위기'의 진정한 의미를 이건희 회장과 이명박 대통령은 왜 모를까 생각하며 빠른 속도로 취해갔다.
(길벗7)
페덱스에서 근무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 써니다.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피겨 여왕' 김연아도, 삼성도 몰랐다. 요즘 모 CF에 '대한민국은 이제 전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란 카피가 기억나는데, 이 사람에겐 그건 어디까지나 '니 생각'에 불과했다.
일본의 지하철 시스템을 이야기하다 그가 문득 "한국에도 지하철이 있냐"고 묻기에 "지하철도 있고 비행기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의 언어가 따로 있냐"고 해서 "세계 많은 사람들이 그 우수성을 인정한 한글이라는 문자가 있다. 너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일침을 가했다.
물론 나 역시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현지서 만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일본과 같은 나라로 여기거나, 일본은 알되 한국은 모르는 혹은 후자엔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경우와 맞닥뜨리면 어이없는 일을 당한 듯 속이 상했다.
나는 일본에서 한국까지 비행기로 불과 2시간 거리이며, 언젠가 내 나라에 방문해줄 것을 그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일본에 와 처음으로 한식가게에 들러 무려 천 엔이나 하는 소주와 족발, 김치찌개를 시켜 그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최근 받은 이메일 내용에 따르면 아마도 가까운 날에 그가 한국을 방문할 듯 하다. 그가 입이 떡 벌어지도록, 지금부터 그를 위한 한국 가이드를 준비해야겠다.
(길벗 8·9·10)
끝으로 오사카 신이마미야역의 CHUO호텔과 이웃해 있는 여행자정보센터(TOURIST INFORMATION CENTER) 자원봉사 대학생들이다.
이들은 각 나라 여행자들을 위해 관광정보를 제공하고 매달 마지막 주에 현지인이 아니면 찾기 힘든 도심 속 알짜배기 명소들을 둘러보는 행사를 계획한다. 처음엔 젊은 학생들이라 혹시 한국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기우에 불과했다.
영어를 거의 못하는 그들과 일어를 전혀 못하는 내가 사용한 것은 99%가 바디랭귀지.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친구가 되는 데 장애가 되진 않았다.
한번은 오사카성을 구경하고 온 내가 그들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피차 말이 안 통하니 난감한 상황이 되었는데, 사진 속 오른쪽 청년이 친구에게 귓속말을 하는 게 들렸다. 일본과 한국 사이의 갈등을 짤막하게 알려준 듯 한데 그 말을 들은 여학생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니었다. 행여 일본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것으로 오해할까 우려됐지만 이후 그들의 태도에서 내 뜻이 왜곡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일본어로 인사를 하려 애썼고, 그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서로의 말을 가르쳐주었다.
"마타 오아이시마쇼(또 만나요)" 그들과 헤어질 때 내가 한 인사였다.
나는 지난달 25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일본이 독도가 자국영토임을 교과서에 싣는 문제를 놓고 두 나라가 반목하는 상황을 보고 있다. 풀어야 할 문제는 명백하게 풀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이 내가 이번 여행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미워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리는 진심을 나누었으며, 그 사실은 과거로부터 쌓여온 두 나라 간의 숱한 문제들이 바꿀 수 없는 오늘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기사 속 모든 사진은 당사자들의 동의를 얻어 촬영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