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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선생의 3남인 심재호(75)씨가 미국 버지니아주 자택에 마련한 <심훈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는 선생의 유품
심훈 선생의 3남인 심재호(75)씨가 미국 버지니아주 자택에 마련한 <심훈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는 선생의 유품 ⓒ 심규상

미국에 있는 심훈 선생의 유품이 생전 선생의 문학의 산실이었던 고국의 필경사(충남 당진 소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지난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에 거주하는, 심훈(沈熏, 1901~1936) 선생의 아들인 심재호(75)씨를 만나고 돌아온 당진군 '심훈선생 유품인수 추진위원회' 위원들이 전한 결과는 긍정적이다. 미국에 사는 유가족을 방문한 추진위원들은 최종길 상록문화제집행위원장과 이병성 추진위원 상록문화제 부집행위원장을 비롯하여 신현만 당진군 문화체육과 공무원 등이다.

미국을 방문한 추진위원들에 따르면 당진군과 심훈 선생의 유가족들은 미국에서 보관중인 선생의 유품을 고국의 품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 추진위원들 미국방문 논의결과= 이병성 추진위원(상록문화제 부집행위원장)은 "심훈 선생의 유가족인 심재호씨의 자택 등에서 수차례 논의를 갖고 유가족들이 미국 자택에 마련된 '심훈기념관'에서 전시, 보관 중인 선생의 유품을 모두 당진으로 이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심훈 선생의 유품은 율필원고만 1000여 매에 달한다.
심훈 선생의 유품은 율필원고만 1000여 매에 달한다. ⓒ 심규상

미국에 전시보관중인 심훈 선생의 유품은 유가족들이 수십 년 동안 전국을 돌며 어렵게 모은 것이다. 이에 따라 당진군은 유품 이전에 앞서 현재 운영 중인 '필경사'(筆耕舍, 소설 상록수 집필지) 및 '상록수 문학관'을 재정비하고 관련 운영 조례를 제정하기로 했다. 또 유품을 토대로 심훈 선생에 대한 연구 작업도 병행하기로 했다. 중장기적으로는 '심훈기념관'을 조성해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영화 감독, 문학가로 살아왔던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 유품이전시기 및 사전 작업= 유품의 이전시기는 심훈기념관 조성계획을 비롯해 유품전시 및 세부 활용계획 등이 마무리된 때에 이루어질 예정이다. 때문에 정확한 시기를 못 박을 수는 없지만 당진군의 사전 유품인수에 필요한 제반 준비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올 연말 또는 늦어도 내년 중순 이전에는 유품이전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당진군 문화체육과 관계자는 "유가족들이 미국에 있는 선생의 유품을 당진으로 이전하기로 한 만큼 이에 필요한 관련 시설을 제대로 정비하는 등 준비 작업에 속도를 낼 예정"이라며 "특히 심훈 선생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 작업에 착수해 자료전시 및 향후 '심훈기념관' 조성에 대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유품가치 해외에서 먼저 인정= 사실 심훈 선생의 유품에 대해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먼저 가치를 인정했다. 일본 도쿄대와 미국 시카고대 등이 한동안 선생의 유고를 사겠다며 백지수표를 건넸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는 선생의 시를 번역했다.

 미국 버니니아주에 거주하며 심훈 선생의 유품을 전시보관중인 심재호(75)씨. 심훈 선생의 3남이다.
미국 버니니아주에 거주하며 심훈 선생의 유품을 전시보관중인 심재호(75)씨. 심훈 선생의 3남이다. ⓒ 심규상
심훈 선생이 남긴 육필 원고가 다른 나라에서 세계적인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 외면해 왔던 것. 다행히 최근에는 문화재청에서 가치를 인정하고 유품을 문화재로 등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유가족들이 유품을 지켜온 것은 독립운동가였던 심훈 선생의 얼이 조국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유품의 당진 이전은 당진이야말로 심훈 문학의 산실이자 작품 속 상록수 사람들이 당진 사람들인 데 기인한다.

여기에 당진군민들이 매년 상록문화제를 열어 온데다 당진군이 심훈정신 계승을 위한 다양한 사업 등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한 것도 유품이전을 결정하는 주요요인이 됐다.   

▲ 심훈 선생의 유품= 미국을 방문한 위원들은 선생의 유품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심훈 선생의 유품은 ▲ 장편소설 <상록수> 및 <직녀성> <영원의 미소> 친필 원고를 비롯 ▲ 단편소설 <황공의 최후> 친필 원고 ▲ 시집 <그날이 오면> 일제총독부검열판 ▲ 장편영화 <상록수> 각본 ▲ 영화소설 <탈춤> 각본 ▲ 영화 <먼동이 틀 때> 촬영 원본 ▲ 붓으로 쓴 절필 원고인 <오오 조선의 남아여> 등 다양하다. 특히 국내 근대 작가 중 이처럼 풍부한 육필 원고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심훈 선생= 심훈(1901~1936)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겸 영화인, 언론인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영화계에 투신,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와 직접 영화를 원작·각색·감독하기도 했다. 충남 당진에서 기거하며 <상록수> 등 작품 활동에 열중하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심재호 씨. (지난 2008년 <상록수> 집필지인 충남 당진 필경사에 있는 부친의 묘소 앞에서)
심재호 씨. (지난 2008년 <상록수> 집필지인 충남 당진 필경사에 있는 부친의 묘소 앞에서) ⓒ 심규상

근대 문학계 작가들이 남긴 친필원고가 거의 없는데도 이례적으로 심훈 선생의 육필원고가 1000매가 넘게 남아 있는 데는 그만한 연유가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50여년 동안 심훈 선생의 유품을 모아 간직해온 선생의 3남인 심재호씨(75)의 역할이다. 

그는 1936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지만 같은 해 아버지 심훈은 세상을 떴다.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1974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미주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미주동포신문인 <일간뉴욕>을 창간하고 13년 동안 편집국장 겸 발행인을 역임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부친의 지인과 유품을 찾아 삼천리 방방곡곡을 오갔다. 북한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1988년 '뉴욕이산가족찾기' 후원회를 조직해 1995년까지 북한을 19차례를 방문, 1000여 명이 넘는 남북 해외이산가족을 찾아주는 성과를 올렸다. 북쪽에 거주하는 부친의 지인들도 만나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산가족들을 찾아 주느라 미국에서 피나게 벌어서 장만한  내 집 한 채를 날렸다"며 "그러나 문서 없는 수많은 집들을 미국과 내 조국 남쪽과 북쪽에 장만했다"며 흡족해 했다.

그는 "아버님은 <상록수>를 통해 일제에 수탈 당하는 농촌과 농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제에 저항하고 자립자조하면서 자주교육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며 "하지만 지금 살아 계신다면 농촌 소설보다는 남북통일과 민족화합 문제에 주된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근 큰 수술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고향 당진에서 부친의 작품과 발자취를 정리, 연구하는 일을 희망하고 있다.


#심훈#유품#심재호#상록수#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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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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