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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이 끝났다. 그리고 연이어 <추노>가 끝났다. 숱한 화제를 뿌리고, 시청자들을 웃기고 울리던 두 드라마의 종영.

이는 기껏해야 TV를 통해 지친 하루를 위로받던 평범한 직장인에게 들이닥친 비보였다. 삶의 활력을 주었던 두 드라마가 이렇게 한꺼번에 끝나다니. 이제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살란 말인가. <지붕킥>에 길들여진 난 어설픈 시트콤에 무덤덤할 것이며, <추노>에 길들여진 난 웬만한 사극을 봐도 지루해할 것이 빤하지 않은가.

아쉬움이 컸기 때문일까? 종영 후에도 두 드라마는 온오프라인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특히 결말에 관해서는 그렇게 끝낸 것이 최선이었는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 어떤 작품보다도 선명하게 각인된 두 드라마의 결말. 과연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그것은 비극이었던가? 대체 작가들은 이와 같은 마무리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예상했던 <추노>의 결말

드라마 <추노> 잊지 못할 드라마
드라마 <추노>잊지 못할 드라마 ⓒ KBS 홈페이지
드라마 초반부터 비중 있는 조연들의 줄초상으로 눈길을 모았던 <추노>의 엔딩은 결국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예상했듯 많은 이들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었다.

업복이를 제외한 노비 당원들은 시커먼 정체를 드러낸 '그분'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던 좌의정 이경식과 그의 수하 '그분' 그리고 송태하를 배신했던 조선비는 모두 업복이의 총에 숨을 거두었다.

업복 역시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며, 주인공 대길이는 언년이를 대신해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대길이와 함께 죽을 줄 알았던 송태하와 언년이가 살아남아 뒷일을 도모했다는 사실인데, 이 역시 미완에 가깝다.

비록 엔딩 내레이션에서 황철웅이 읊조렸듯이 효종 6년(1655년) 도망 노비를 쫓는 노비추쇄가 중지되고 석견이 귀향에서 풀려났지만, 송태하가 이야기했던, 그녀의 아내가 혜원이와 언년이 두 이름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결국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죽음과 채 이루지 못한 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노>를 비극으로 정의하기에는 뭔가 꺼림칙하다. 무엇 때문일까?

우선 <추노>가 비극으로만 기억되지 않는 것은 많은 이들이 그 비극적인 결말을 쉽게 예측하고 대처해왔기 때문이다. 그 시대 역사를 알고 있는 시청자들의 입장으로선 주인공들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이미 예상할 수 있는 바,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결말 대신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 비극적인 시대에 여러 꿈을 안고 사는 인물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때는 양란이 끝나고 무너진 신분질서를 되잡기 위해 지배층이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해석하던 조선 인조 시대. 비록 체제는 하부로부터 서서히 변하고 있었지만, 약화된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배층들은 오히려 악랄해진 그 시대에 민초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따라서 시청자들이 주인공 대길 말고도 <추노>의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쏟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사람들은 비극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대길이 외에 다른 이들에게서 희망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극의 중반부 왕손이와 최장군이 죽었다가 시청자들에 의해 되살아 난 것이나, 그 어느 드라마보다 탄탄했던 <추노>의 조연진이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다. 오죽하면 대길이를 살리기 위해 죽은 천지호 외전을 만들어 달라지 않은가. 아마도 PD는 극이 진행되면서 각 조연들의 캐릭터를 강화시키기 위해 꽤 많은 공을 들였을 것이다.

<추노>를 비극으로 정의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죽음이 여러 희망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대길의 죽음은 비정한 살인귀 황철웅의 뜨거운 눈물과 함께 참회를 낳았고, '지랄 같은 세상'을 바꾸겠다던 송태하와 그의 사랑 언년이를 살렸으며, 왕손이와 최장군을 비롯해 짝귀 식구들이 비극적 시대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생존 자체가 희망이었던 그 시대 대길의 죽음이 곧 희망이 된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민초들의 생존만으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추노> 곽정환 PD의 페르소나라 불릴 수 있는 업복이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어떻게 역사적 원동력으로 산화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추노> 곽PD의 페르소나 우리가 잊고 있던 이들
<추노> 곽PD의 페르소나우리가 잊고 있던 이들 ⓒ KBS 홈페이지

초복이와 도망가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있었다고, 우리와 같은 노비가 있었다고 세상에 꼭 알리고 죽으면 개죽음이 아니라니"라며 궁궐로 들어가 좌의정 등을 죽인 다음에 포박당하는 업복이. 비록 그는 잡혔지만 그의 분노는 다른 노비에게로 전이된다.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던 노비에게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자각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위는 시청자들의 카타르시스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허구의 장면이지만, 이를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건 실제로 우리들의 역사가 이와 같은 개인들의 역사가 모여져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시대 후기 엄격했던 신분제가 무너진 것은 결국 불평등을 인식하기 시작한 개인들의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우리시대 군사독재가 무너진 것 역시 박종철이나 이한열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을 보고 분노할 줄 알았던, 그리고 현재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던 이들에 의해 가능했었다. 드라마 좌의정 이경식의 대사대로 '희망이 희망으로 끝나지 않고 신념이 되면서' 역사는 변하는 것이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 초복이는 해를 가리키며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기에 우리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두운 시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 결국 많은 이들이 <추노>를 떠올리며 감히 비극이라고 정의하지 않는 것은 드라마가 말하는 희망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을 쏘다 절말 속의 희망
희망을 쏘다절말 속의 희망 ⓒ KBS 홈페이지

예상치 못한 <지붕킥>의 결말

<추노>가 예상된 결말로서 시청자들의 충격을 감소시켰다면, <지붕킥>은 예상치 못한 마무리로 시청자들의 충격을 배로 증가시킨 경우이다. 물론 적지 않은 이들이 김병욱 PD의 전례를 들면서 비극적 결말을 조심스레 예측했지만, <지붕킥>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모든 이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이었다.

마지막회 한 편으로 그 동안의 웃음을 눈물로 전환시킨 <지붕킥>. 과연 김병욱 PD는 무슨 생각으로 이와 같은 마무리를 선택했을까?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 이와 같은 시트콤이 또 언제 나올까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이와 같은 시트콤이 또 언제 나올까 ⓒ MBC 홈페이지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지붕킥>의 결말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 80년대식으로 생활하는 가정부 세경. 그녀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물론 시청자들의 바람대로 어설프게 지훈이나 준혁이랑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는 방영 내내 현실성을 담보로 웃음을 선사했던 <지붕킥>스럽지 않다. <지붕킥>은 비록 시트콤이지만 사회의 빈부격차나 청년실업문제, 소외, 학벌주의 등 현재 우리 시대의 비루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현실을 극까지 몰아 비틀어서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경의 죽음은 그녀의 행복을 원했던 PD의 마지막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은 원했든, 원치 않았던 그렇게 드물지만은 않은 우리 시대의 일면이고, 그 사고를 통해 세경은 자신이 원했던 바로 그 순간의 영원성을 담지한다. 그녀의 말대로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이다.

<지붕킥>의 결말 모든 이들의 열망을 식히고 냉정한 사고를 돌려준.
<지붕킥>의 결말모든 이들의 열망을 식히고 냉정한 사고를 돌려준. ⓒ MBC 홈페이지

문제는 이와 같은 세경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시청자들의 반응이다. 이제 더 이상 김병욱 PD의 작품을 보지 않겠다는 네티즌의 선언에서부터 세경이가 원래 귀신이었다는 이야기 등등.

역설적이지만 그와 같은 시청자들의 절망은 희망의 초석이 된다. 비록 <지붕킥>은 마지막에 비극을 선택했지만, 이 때문에 사람들은 왜 세경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수많은 시트콤 중 좀 재미있었던 시트콤으로 남았을 <지붕킥>이 세경의 죽음으로써 이 천박한 사회에 화두를 던진 것이다.

"아저씨 말대로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젠가 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 사다리를 죽기 살기로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서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 누구에게나 공정할 것 같은 '경쟁 이데올로기'가 이제 더 이상 신분상승의 원동력이 아니라 이미 굳어져 있는 계급을 고착화시키는 합리화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세경은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죽음을 맞지만, 그런 세경의 죽음이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다면, 그리고 그와 같은 이들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고자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지붕킥>이 선사한 희망의 끈을 잡는 일이다.

<추노>와 <지붕킥>은 끝났다. 그러나 두 드라마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는 지워지지 않는다. 부디 많은 이들이 두 드라마를 반추하기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추노#지붕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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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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