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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두 명이 기관총에 맞아 쓰러졌다. 미군 헬기 조종사는 무전으로 태연하게 말한다. "이라크 경찰들이 병원에 데리고 가겠지", "전쟁터에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이 잘못이지". 경악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다. 민간인 12명이 사망했다. 총에 맞은 사람들을 수습하려는 구조인원까지 쏘아서 12명이다.

 

2007년 7월 12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미군 아파치 헬기의 시점으로 촬영된 영상에 담긴 내용이다. 현재 이 영상은 '위키릭스'라는 비리 폭로 사이트에 공개되어 현재 큰 충격을 주고 있다. 17분짜리 흑백영상에는 헬기 조종사들이 "내가 쏠게(let me shoot)"를 외치며 십자과녁에 잡힌 사람들을 조준하는 광기가 담겨있다. 살기 위해 도망치는 이들을 끝까지 따라가 기관총으로 쏘아 죽이는 모습도 있다.

 

물론 변명도 있다. 죽음을 당해야 했던 이들은 전쟁의 실상을 취재하던 기자들이었다. 그들이 들고 있었던 카메라와 망원렌즈를 AK소총과 로켓추진 수류탄 발사기로 오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에 맞은 사람을 실어가려고 온 차까지 다 박살냈단다.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이 변명은 60년 전 노근리에서 미군이 피난민을 학살할 때 했던 말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기 때문이다.

 

노근리 앞에 무릎 꿇고 사죄했다면

 

60년 전 한국전쟁 당시 미군 전투기는 노근리에서 피란 가는 민간인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잠재적인 적, 위장한 인민군으로 간주되었다. 전쟁 초기 퇴각을 거듭하던 미군 상부는 '과감한 공격'을 명령했다. 의심되면 일단 죽이고 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피란 보따리 짊어 매고, 덥고 배고프다고 찡얼거리는 아이들 달래면서 모여 앉아있던 사람들 머리 위로 기관총 사례를 퍼부었다. 노근리는 오늘의 이라크였고, 이라크는 60년 전 노근리였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이 빨리 알려지고, 제대로 해결되었다면 베트남의 학살도, 광주의 희생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노근리에서 미국이 벌였던 민간인 학살이 명백하게 밝혀지고 미국이 사죄와 재발방지약속을 희생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 앞에서 했다면 어땠을까? 2007년 7월 12일, 이라크에서 12명의 사람들은 살 수 있지 않았을까?

 

60년 전 노근리 학살은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이 땅에서 겪은, 노근리의 아픔을 숨죽여 품어온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조차 노근리를 몰랐다. 우리마저 노근리를 잊었는데, 그 누가 기억할 수 있을까? 이러한 망각 속에서 노근리 사건은 베트남에서 이라크에서 반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후퇴하면서 시민들에게 피난을 명령하는 '소개령'을 집행하면서 발생했다. 피난민들은 미군 통제 속에서 이동했는데, 이는 인도적으로 시민들의 피난을 도운 것이 아니라 피난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을 막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었다.

 

당시 피난민들은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 퇴각을 거듭하던 미군 내부에서는 "과감한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실제 노근리 사건이 일어났던 1950년 7월 26일에는 "언제 어떠한 피난민도 전선을 넘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50년을 기다린 노근리의 진실은 다시 망각 속으로

 

바로 그 7월 26일, 미군은 노근리 근처에 다다른 피난행렬을 가로막고 짐을 검색했다. 이 검색으로 피난민들이 철길 주위에 모여 있자 미군 전투기는 기총 사격을 가했고, 지상의 미군 역시 총격을 시작했다. 생존자들은 이때 1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전한다. 이 총격을 피해서 노근리 마을 앞 쌍굴 다리로 들어간 피난민들에게 미군은 이후 만 3일 동안 계속해서 총격과 공중공격을 가했다.

 

"일단 공격이 시작되자 미친 듯 연쇄반응이 일어났습니다. … 사격을 해본 적이 없던 병사들은 사격명령이 떨어지자 일단 쏘고 보자는 식으로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 당시 상황은 '움직이는 것은 다 쏜다'는 분위기였어요."

 

당시 대대 지휘본부의 통신담당이었던 로렌스 레빈(Lawrence Levine)의 증언이다.

 

도망치다 총을 맞거나 굴속에서 죽은 사람들이 최대 300명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생존한 이들 대부분은 부모형제나 친지의 시체더미 속에 숨어서 총알을 피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시간은 비참했다. 이들은 이후 TV에서 총소리만 들어도 기겁을 하고, 길을 지나가는 미군만 봐도 도망가면서 살아야 했다.

 

정은용씨와 같은 유가족들이 이미 4·19 이후부터 미국정부에 사건조사를 호소해 왔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월간 <말>과 1999년 AP통신(Associated Press, 미국 통신사)의 노근리 보도 이후 국내외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비로소 이 문제를 주목하게 되었다. 2000년 7월 26일에는 노근리 사건이 발생한 쌍굴에서 사건 발생 반세기만에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이 학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지만, 결코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이다. 50년을 숨죽여 지켜온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라크에서 참혹한 죽음을 보고서야 노근리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비참한 일이다. 결국 또 누군가 죽어야 기억될 수 있단 말인가.

 

영화 <작은 연못>... 기억의 의무

 

그래서였을까. 노근리를 최초로 영화화 한 <작은 연못>의 시사회장에 앉아있는 것은 힘들었다. 무대 인사를 나온 문성근씨의 말이 절절했다.

 

"백기완 선생님이 어제 보러 오셨다. 끝나고 그러시더라. '저것보다 훨씬 더 처참했어. 얼마나 처참했는데'."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했던 사람들의 비명은, "도와주세요(Help me)"와 "우리는 무고한 사람들이에요(We are innocent people)"를 외쳤던 쌍굴다리 속 목소리는 차마 영화관에서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전해주었다.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 불편할 것이다. 그리고 처참한 비명과 절규가 자신의 눈앞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되어야만 비로소 "아, 노근리가 있었지"하고 말하는 우리 사회가 불편할 것이다.

 

<작은 연못>의 이상우 감독은 인터뷰에서 "전쟁의 본질이 뭐냐고, 정신 차리고 물어본다면 학살이지, 학살 말고는 없다"며 "그것을 스크린에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마치 게임을 하듯 사람을 죽이며 좋아하는 미군의 영상을 보고, 노근리의 아픔을 담은 <작은 연못>을 보고 우리는 그저 슬픔과 동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물어야 한다. 왜 나는 아파치 헬기의 표적이 되지 않는가라고. 수많은 이들의 주검 속에서 왜 내가, 우리 가족이 없었는가라고. 노근리를 기억해야 하는 의무는 어쩌면 우리가 살기 위함일 수도 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작은 연못>을 봤으면 한다. 보다 많은 이들이 지금도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는 역겨운 이름으로 이라크에서 학살이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노근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태그:#이라크, #민간인학살, #노근리, #작은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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