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저자도에 배가 닿았다. 돼지 냄새가 코 속을 파고들었다. 동호삼경(東湖三景)으로 명성을 날리던 저자도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안타까웠다. 닥나무가 아름다운 저자도는 고려 말 한종유의 별장 터였으며 세종은 그의 딸 정의공주에게 이 섬을 하사하여 부마 안연창이 시인 묵객들을 불러들여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풍광이 아름다워 동호삼경이라 불렸던 저자도한양 동북쪽에 있는 북한산과 도봉산 그리고 수락산과 불암산은 바위산이다. 저자도는 산에서 쓸려 내려온 자갈과 모래가 퇴적작용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저자도는 두모포에 있는 황화정, 강남의 압구정과 함께 동호 3대 명소로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곳이다. 사공이 배를 댔다. 한 순간 '공동운명체'가 되었던 승객들이 서둘러 배를 빠져 나갔다.
"왜 배 삯을 안 주십니까요?"다른 사람들은 모두 운임을 주고 내리는데 맨상투에 두건을 두른 사나이가 그냥 내리려 하자 사공이 제지하고 나섰다.
"손해배상금을 내놓으라 하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지 무슨 놈의 배 삯이야?"사나이가 눈알을 부라리며 배에서 내렸다. 저자도는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있는 섬이지만 갈수기에는 독도와 연결된다. 승객들이 잠실도에 내리지 못했지만 도성에 진입 하는 데는 지름길이다. 과객이라면 살곶이다리 건너 전관원에서 하룻밤을 묵고 흥인문을 통하여 과장에 갔다.
입이 째져도 표정관리를 하라광희문에 볼일이 있는 맨상투 사나이 역시 내심 입이 째졌지만 표정관리를 하며 목적지에 내려주지 않았다는 빌미를 들어 호통치고 내린 것이다. 부보상들이 짐 보따리를 챙기고 있는 사이 일단의 사나이들이 거칠게 배에 올랐다.
"넌 어디서 온 놈이야?"뱃사공 턱밑에 얼굴을 들이민 사나이가 눈동자를 굴렸다.
"송파에서 왔는뎁쇼.""누가 여길 들어오라고 했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낭심을 걷어찼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사공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엉 부리지 말고 일어나 임마." 앞으로 고꾸라진 사공의 멱살을 거머쥔 사나이가 일으켜 세웠다.
"네놈이들이 드나들면서 쓸데없는 말을 물어낸단 말이야. 여기는 네가 들어오고 싶다고 네 맘대로 들어오는 곳이 아니야. 다시는 들어오지 마. 아써?"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나이가 사공을 바닥에 내쳤다. 스며든 물이 자박한 뱃바닥에 엎어진 뱃사공의 모습이 흡사 악동들이 패대기친 개구리 같았다. 사나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짓밟으려 하자 꺽쇠가 나섰다.
"힘없는 사공은 때리라는 법이라도 있소?""여긴 우리가 법이다. 네놈이 뭔데 끼어들어?"곧바로 발길이 날아들었다. 살짝 피아자 중심을 잃은 사나이가 고꾸라졌다. 꺽쇠가 날렵한 솜씨로 엎어진 사나이의 어깨를 발로 밟았다.
"여긴 조선 땅이다. 네놈들의 땅이면서 우리들 땅이다. 힘없는 사공을 패는 것은 천하의 소인배들이 하는 짓이다. 힘이 남아돌거들랑 우리를 핍박하는 놈들을 향해서 쓰고 그래도 남거들랑 청나라를 향해서 쓰거라."꺽쇠가 발에 힘을 빼며 손을 털었다. 사나이들이 설설 기었다. 산천초목이 임금 것이라는 왕조시대. 조선 땅이 우리들 땅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무뢰배들이 줄행랑을 쳤다.
큰 나루에나 있는 작부가 있는 주막, 돈이 펑펑 도는 작은 나루에도 있었다꺽쇠가 뭍에 올랐다. 나루터는 제법 시끌벅적했다. 섬 규모에 비해 사람도 많고 메어있는 배도 많았다. 주막도 있었다. 먼 길 떠나는 큰 나루에나 있는 주막이 작은 섬 나루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주막 앞을 지날 때였다. 벙거지에 곰방대를 손에 쥔 건장한 사나이가 앞을 가로 막았다.
"네놈이 우리 애들을 팼냐?"아청색(鴉靑色) 세 자락 옷에 송기색(松肌色) 더그레를 입고 검은색 벙거지를 쓰고 있는 사나이였다. 벙거지에 흰색과 빨간색 실을 꼬아 만든 줄을 두르고 장끼 깃털을 매단 홰를 늘어뜨린 것으로 보아 군관 같았다.
"힘없는 사공을 패기에 때리지 말라고 일러줬소." "하하하, 발로 짓밟았으면서 일러주었다고? 여기에서 죽어나가는 돼지들이 웃겠다. 얘들아 뭐하는 게냐? 이자를 멱 따놓은 돼지대가리로 만들어 주어라."곰방대가 위에서 아래로 허공을 가르자 10여명의 졸개들이 꺽쇠 주위를 빙 둘러쌌다. 꺽쇠도 방어태세를 취했다. 일순 침묵이 흐르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벙거지를 쓴 사나이를 쳐다봤다.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한판 붙어 패하기라도 하면 수장(水葬)될 분위기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다졸개들을 경계하며 벙거지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다. 그러나 긴장해서일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였다. 뒷전에서 지켜보고 있던 곰방대 사나이가 졸개들을 제치며 앞으로 나왔다.
"아니, 이거 박포교 형님 아니십니까?""누구시더라?""에이, 형님 두, 저 피맛골에 점돌이 옵니다."그자의 관자놀이를 살펴봤다. 분명 점이 있었다.
"난리가 쳐들어오고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형님 모습이 이게 웬일이십니까? 맨상투에 갓도 없이…."점돌이가 통곡할 듯 울먹였다.
"얘들아, 이분은 내가 옛날에 끔찍이 모셨던 형님이다. 발도 빨랐지만 쇠도리깨라면 조선 팔도에서 일인자셨다. 인사드려라."경계를 푼 졸개들이 꺽쇠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에이, 언니 두, 주먹 한번 쓰려했는데 김 샜잖우."졸개들이 투덜거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이 부러진 격이었다.
덧붙이는 글 | 아청색(鴉靑色)-검 푸른색
송기색(松肌色)-옅은 붉은색
더그레-웃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