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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군산세관 본관. 102년 된 건물로 독일인이 설계했고 한국은행본점과 같은 건축양식이다. 외부는 붉은 벽돌이지만 내부는 목조건축이다. 지붕위의 뾰족한 첨탑은 일본군국주의 우월성을 상징한다고.
 구 군산세관 본관. 102년 된 건물로 독일인이 설계했고 한국은행본점과 같은 건축양식이다. 외부는 붉은 벽돌이지만 내부는 목조건축이다. 지붕위의 뾰족한 첨탑은 일본군국주의 우월성을 상징한다고.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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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는 한반도 서해안 남부에서 금강 하구와 만경강 하구로 구획되는 옥구반도와 연안의 섬들로 구성된다. 금강은 하구에서 강물을 따라 50여㎞까지 수상 교통이 가능하며, 논산평야 등 넓은 충적평야가 그 주변에 발달해있다.

만경강 하류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평야인 호남평야가 있다. 이처럼 군산시는 호남평야의 일부를 차지하면서, 나머지의 호남평야와 논산평야 등을 그 배후지로 옥구반도 주변과 금강, 만경강 하구의 간석지를 간척지로 확대시키면서 서해의 항구도시로 발달했다. 이 같은 군산의 지리적 위치가 일제 강점기에는 '쌀 반출항으로서의 군산'이 되었다.

1899년 5월 1일 개항과 더불어 금강내륙과 전북 내륙지방에 대한 일제의 수탈전진기지가 된 군산은, 항만, 행정, 철도 교통로의 개설, 근대산업시설의 설치가 이뤄져 도내에서 제일 먼저 부로 승격되어 근대도시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개항장이란 연안  항구 중에서 선택하여 조약에 따라 외국 선박의 출입이 허용된 곳이다. 이곳은 외국인 거류지가 설정되고 감리소가 설치되어 외교관이 주재해 출입외화의 관세처가 되는 곳이다. 시에는 한때 독일, 러시아, 프랑스, 중국, 일본의 영사관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로 일본이 주도하게 됐다.

구 조선은행 건물. 새 단장을 위해 가림막이 쳐져있다.
 구 조선은행 건물. 새 단장을 위해 가림막이 쳐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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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지점
 구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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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당시 군산은 150호, 인구 510명의 작은 한촌으로 일본인 등 외국인의 정식거주자는 없었다. 하지만 계속된 일본인의 증가로 1907년에 조선인은 2903명인데 비해 일본인은 2956명으로 일본인 거주자가 더 많았다.

1905년 외무성 통상국에서 발간한 <통상휘찬>을 보면 직업별 호구수에서 농업 47, 광공업 73, 상업 209, 공무·자유업 36, 기타 36호로 농업호수와 상업이 증가하고 의사, 변호사, 관리 등의 전문직 인구가 증가했다.

상업에서는 미곡상의 증가가 두드러지고, 농업인구의 증가가 두드러지는데 4호에서 47호로 증가한 것은 일본인이 군산 부근에 농장을 설치하고 영농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곡상과 정미업에 종사하는 호수가 증가한 것은 군산이 미곡의 수집과 반출에 깊은 관련이 있음을 말해준다.

러일전쟁 이후 군산에서는 미곡을 위주로 수출초과 현상이 나타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미곡이 되었다. 미곡의 수출증대로 인근의 충남 서천군, 보령군, 부여군, 홍성군과 전북의 김제군, 부안군, 정읍군, 익산군, 완주군 일대 만경강과 동진강유역의 미곡 집단지가 되고 미곡 수출항의 기능이 강화됐다.

일제가 축항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쌓아놓은 쌀가마니. 한국사람들은 배고파 죽어가고 있는데 쌀을 높이 쌓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사진. 식민지 국민의 비애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일제가 축항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쌓아놓은 쌀가마니. 한국사람들은 배고파 죽어가고 있는데 쌀을 높이 쌓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사진. 식민지 국민의 비애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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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와 내륙 곡창지대와의 원활한 교통을 위하여 조선정부는 1906년 국내 주요지역간의 도로계획 제1기 계획으로 치도국을 설치했다. 치도국이 1907년 설치한 노폭 7m, 연장 46.472m의  군산-전주간 전군가도는 1912년 호남선철도의 개통 전까지 내륙교통의 큰 몫을 담당했다. 당시 일등 도로인 전군가도는 서울 시가지보다 빨리 개통되었다.

1909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군산의 일본에 대한 수출의존도는 99.9%, 수입의 89.8%를 일본에 의지하고 있었다. 수출품의 대종은 현미, 정미 등의 미곡이 약 90%를 차지하고, 나머지도 우피, 대두, 소맥 등의 농산물이었다. 한편 수입품은 면직사, 수직물 등 직물류와 설탕, 청주 등의 식료품 및 각종 건자재들이 주종이었다.

이때부터 국내 미곡 대일반출량의 20%를 차지하며 부산, 인천 다음 가는 제3위의 항구로 부상하여 시가지는 날로 번창했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위한 원활한 자금조달을 위해 1903년에 제일은행 군산지점을 개점했다. 이어 조선은행 지점 등 11개의 은행이 진출해 당시 도청소재지인 전주보다 많은 금융기관이 밀집한 것은 군산의 경제 상태를 엿볼 수 있다.     

58년의 맛과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집 빈해원. 이층으로 된 구조가 아름다워 몇번에 걸쳐 영화촬영 장소가 되기도 했다.
 58년의 맛과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집 빈해원. 이층으로 된 구조가 아름다워 몇번에 걸쳐 영화촬영 장소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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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 최정옥씨가 군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문화해설사 최정옥씨가 군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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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18년에 완료된 토지조사사업을 바탕으로 산미증산정책을 추진하게 되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대만 등지는 산미증산계획기지가 되었다. 1933년에 전체 미곡생산량의 53.4%를 일본으로 반출해 갔으며 전국 반출량의 20.5%를 군산을 통해 반출했다.

미곡의 반출을 위해서는 부두지역에 미곡을 가공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며 부두와 철도시설이 있는 곳에 집중 분포되었다. 부두 부근의 서빈정, 본정통, 빈정 등에 미곡창고가 부두를 따라 띠처럼 분포하고 시가지 쪽의 행정(幸町), 명치정, 강호정, 동영정 일대에는 10개소의 정미도정공장이 금융기관과 결부 밀집되어 '쌀의 군산'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경암동의 철로는 주변의 민가지붕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깝다. 일제 때 미곡반출 경로로 만들어진 이 철도는 수많은 애환이 깃든 철로다. 작년까지 제지회사에 자재를 실어 나르기 위해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이용됐지만 이 철로도 곧 사라질 운명이다.

역사적 의미를 지닌 이 길을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광주 조선대학교 앞에는 폐선부지가 있다. 폐선을 두고 개발론자와 시민단체들 간에 수많은 토론이 있었다. 결국 폐선을 살려 꽃길과 보행로로 만들자는 의견에 합의해 아름다운 길로 재탄생했다. 문화해설사 최정옥씨는,

"군산사람들은 이 철도의 소중함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오히려 외지인들이 구경하러 오고 있습니다. 이 철도를 아무 의미없이 없앤다면 군산의 중요한 역사 하나가 사라지는 겁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제당시 건립됐던 공공건물이 많이 헐렸어요.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어른들은 건물이 싫어서 헐릴 때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당시는 일제 잔재를 없애는 분위기였으니까요. 제가 만약 그때 그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적극 반대를 했을 겁니다. 건물을 그대로 남겨 후손들에게 교훈을 줘야 하는데 아쉬워요. 아무튼 이제라도 문화해설사로 일하면서 보람을 느낍니다."  

빈해원은 58년의 전통을 가진 중국집이다. 몇 번에 걸쳐 영화촬영을 한 이곳은 이층으로 된 장식이 아름답다. 건물벽에는 44년전에 방문했던 대만대사의 친필액자가 걸려 있었다.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소란정(57)씨는,

"아버지가 이 식당을 오픈한 직후 제가 태어났어요. 손님이 가득 할 때는 150~200명 정도가 됐었죠. 도심이 신도시로 이동해가고 사무실이 근방에 없기 때문에 손님이 줄었지만 옛날에는 구도심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도 단골손님이 꾸준히 오고 있습니다."

옛 군산세관은 중세 유럽풍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908년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 등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유럽양식으로 지었다. 서울역과 한국은행 건물을 합해 단 세곳만이 남아있다. 내부에는 군산항 개항 이후의 모습과 군산세관의 옛모습들이 전시되어 있다.

쌀을 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로로 기차가 지나갈때면 지붕이 닿을 정도로 가깝다. 작년까지 하루에 한 두번 이용됐던 이 철로도 곧 사라질 운명이다. 영화세트장으로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쌀을 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로로 기차가 지나갈때면 지붕이 닿을 정도로 가깝다. 작년까지 하루에 한 두번 이용됐던 이 철로도 곧 사라질 운명이다. 영화세트장으로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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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야경 중 가장 아름답다는 은파유원지 주변의 모습
 군산 야경 중 가장 아름답다는 은파유원지 주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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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는 쌀의 도시라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동 이름에 쌀이라는 의미의 '미'라는 이름을 가진 동이 몇 개있다. 미원동, 미장동, 장미동, 미성동, 미룡동 등이 그것이다.

부두가에 지어진 옛 건물들은 흉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외부를 손질해 보전할 계획이라는 얘기다. 혹자는 흉물이니까 해체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문화재를 보전할까?

호주는 유럽인 이주 역사가 300년도 안 된다. 하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오래된 건물의 외형은 그대로 보존하고 내부는 편리하게 고쳐 쓰도록 문화재 보존 정책을 한다. 아픈 역사도 후손에게 교훈을 주는 역사자료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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