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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와 4·19혁명을 이어준 김주열(1943~1960) 열사. 고등학교 입학 동기였던 친구가 50주년을 맞아 그 중심에 섰던 김주열 열사의 현재적 의미와 미래적 가치를 함께 생각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친구야, 미안하다>라는 제목이 붙은 다큐멘터리다.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마산대표 백남해)는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감독과 시나리오, 내레이션을 한 사람이 맡았다. 김주열 열사의 '친구'인 김영만(65) 전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대표다.

김주열과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 잊지 못해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시사회에 참석한 강정철씨가 방명록에 "잊지 말자 김주열"이라고 써 놓았다.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시사회에 참석한 강정철씨가 방명록에 "잊지 말자 김주열"이라고 써 놓았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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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은 1960년 4월 11일 옛 마산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 안치실에서 있었다. 김주열 열사는 3·15의거 때 데모에 참여했고, 행방불명된 지 27일 만에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됐다.

"주열이가 도립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김영만씨는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깊숙이 박힌 채 바닷물에 퉁퉁 불어 있는 친구의 시신을 한참 동안 응시하며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후 그는 김주열 열사와 마산상고 입학 동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큐멘터리는 '친구'의 시신 인양지인 마산 앞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마산에는 주열이를 기리는 돌멩이 하나 없었다"는 말도 나왔다.

2000년 사업회가 만들어진 뒤부터 숱한 기념사업을 해왔다. 그해부터 '김주열 열사 추모제'를 시작으로, 시신 인양지에 '역사 표지판'을 세웠으며, 흉상·조형물 제막, '소통·화합 186김주열 대장정'을 벌이기도 했다.

김주열 열사는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지만 '마산의 아들'로 죽었고 역사 속에서는 '국민의 아들'이 되었다. 김영만씨는 영·호남 갈등을 치유하고 소통·화합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김주열 열사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마산~남원 사이 거리(186km)에 3·15와 4·19 때 희생 당한 186명의 민주영령을 기리며 이태 동안 '소통'과 '화합'을 내걸고 '김주열 대장정'을 벌이기도 했다.

 김영만 전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대표(오른쪽)가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시사회를 지켜보고 있다.
 김영만 전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대표(오른쪽)가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시사회를 지켜보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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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당시 경찰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남원으로 가져가 선산에 묻었는데,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지난 11일 마산에서는 50년 만에 '민주수호 정신계승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이 열렸다. 김영만씨는 이 모든 일을 중심에서 해왔다.

45분 가량의 상영이 끝난 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무대에 오른 김영만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잠시 뒤돌아서기도 했다. 김씨는 "오늘 아침에 집사람이 '이제 모든 거 다 끝난 거죠?'라고 하더라"며 "여보, 미안해. 범국민장 치른다고 빚도 남았는데"라고 말했다.

그는 "범국민장도 치르고 다큐멘터리도 한꺼번에 만들다 보니 정말 바빴다. 초대장을 2000여 장 만들어 놓고 발송 작업할 시간이 없어 보내지 못했다"면서 "다큐멘터리는 좀 더 손을 봐야 할 것 같다. CD로 만들어 판매해서 빚 갚는 데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시사회 이후 김영만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데모 구경하다 죽었다? 주열이를 욕보이지 말라"

 김영만 전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대표가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시사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김영만 전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대표가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시사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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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면?
"제목 그대로다. 먼지 덮인 역사책 속에서 새삼스럽게 추모사업 한답시고 주열이를 불러내서 동서화합이니 뭐니 하면서 이 친구를 오히려 욕보이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 마지막 부분에 주열이에 대한 내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우리는 그날, 영웅이 되려던 것도 열사가 되려던 것도 아니었다. 이제 네 어깨의 무거운 역사의 짐을 내려 나는 너를 너에게로 보낸다'고 했다. 최근에도 주열이와 모든 민주영령들에게 참 미안한 일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런 심정을 담으려고 했다."

- 다큐멘터리를 만든 취지는?
"저와 주열이는 마산상고 입학동기다. 우리의 만남은 1960년 주열이가 참혹한 시신으로 마산도립병원에 누워있는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날 주열이의 모습이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산자와 죽은 자를 통틀어 오직 주열이만이 할일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바로 동서화합이었다. 지금의 영호남 분위기로 볼 때 남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으로 유학 오는 학생이 있겠나.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지금과 같은 영호남 갈등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동서화합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주열이를 폄훼하는 소문만 무성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니 주열이에게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심정을 좀 적극적으로 표해볼 방법을 이렇게 찾은 것이다.

- 김주열 열사에 대한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고자 했다는데, 설명하면?
"언제부터인가 마산에서 '주열이는 이모할머니 집(자산동 샛별미장원) 앞에서 데모구경하다 죽었다'거나 심지어는 '주열이는 이모할머니집 앞에서 파자마(잠옷) 바람에 데모구경하다 죽었다'는 말이 퍼져나가 많은 시민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이건 누군가가의 의도적인 작업이 있었다고 저희들은 판단하고 있다.

첫째 이모할머니 집으로 지정하는 장소부터 잘못된 것이다. 이건 당시 언론보도 자료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모든 기사는 꼭 같이 이모할머니 집을 장군동이라고 쓰고 있다. 즉, 집 앞에서 데모 구경하다 죽을 그런 장소가 아니었다. 이번에 다큐 제작을 하면서 그날 주열이가 기거했던 이모할머니 집을 찾아냈다. 50년 만에 처음 밝혀진 것이다."

- 다큐를 보니 옛 자료도 많던데?
"주열이가 저의 친구이니까 제가 주열이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했다. 서툴지만 직접 내레이션을 했다. 많은 부분들은 기존의 언론보도 자료와 추모사업회 행사 자료 화면을 썼다.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내는 부분은 일부 연출도 했다. 또 일부는 증언자들과 함께 당시 상황과 현장을 확인하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 다큐를 만들면서 어려웠던 점?
"경험이 없으니 당연히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만일 내가 잘 모르는 일을 했다면 엄청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 큰 강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촬영과 여러 가지 보조를 해준 사람들도 우리 회원들이었기에 호흡이 잘 맞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욕심이 넘쳐 앞으로 2부작, 3부작을 내놓아도 될 정도로 많은 촬영을 하면서 너무 무리를 하는 바람에 병을 얻게 되어 지금도 저를 힘들게 한다."

- 앞으로 계획은?
"몇몇 방송에서 우리가 다큐를 제작하는 장면과 영상 일부를 복사해 갔다. 그런 것을 통해 일단 내용 소개 정도는 될 것이라 보고 있다. 기회가 되면 영화제 다큐부분에 출품도 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언론사나 학교 등에 한해서 요청이 있으면 DVD를 제공해 드릴 생각이다."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시사회를 마친 뒤 꽃다발을 받은 김영만씨가 정성기 경남대 교수와 소감을 나누며 이야기하고 있다.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시사회를 마친 뒤 꽃다발을 받은 김영만씨가 정성기 경남대 교수와 소감을 나누며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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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뜻 이제 후배들이 받아 이어갈 것"

시사회를 본 사람들은 김주열 열사뿐만 아니라 김영만씨한테도 '미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성기 경남대 교수는 "김영만 전 대표는 마음의 빚을 갚았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좀 쉬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 뜻은 이제 후배들이 받아 이어갈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다큐멘터리를 관람했다. 김주열 열사의 후배라 할 수 있는 용마고 학생들이었다. 김상웅(2학년)군은 "지난 범국민장 때 참가했다가 초대권을 받고 왔다"면서 "김주열 열사에 대해 많이 몰랐는데 보고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배유영(2학년)군은 "학교 방송부에 있는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고 싶기도 해서 왔다"면서 "다큐멘터리를 잘 만든 것 같다. 평소 김주열 열사에 대해 잘 몰랐던 부분까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주열 열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의 감독을 맡았던 김영만씨가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시사회를 연 뒤 촬영했던 심재훈(왼쪽)씨를 소개하고 있다.
 김주열 열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의 감독을 맡았던 김영만씨가 15일 저녁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시사회를 연 뒤 촬영했던 심재훈(왼쪽)씨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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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경남진보연합 공동대표는 "민주화의 뒤안길에 피 묻힌 역사를 제대로 정리한 것 같다.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시점에 이런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져 더 의미가 크다"고, 자흥 스님(부산경남불교평화연대 집행위원장)은 "민주화 인물을 폄훼하고 호도해 안타까웠는데 김영만 전 대표가 바로 잡아 주었고 열사 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촬영감독을 맡았던 심재훈씨는 "옛날 내용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니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촬영은 지난 2월부터 시작했다. 범국민장도 앞두고 있다 보니 정말 바빴다. 김영만 전 대표의 일정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몸도 편찮으셨다. 어떨 때는 하루 병원에 세 번이나 갈 때가 있었다. 내레이션 작업은 시사회를 이틀 앞두고 했는데, 병원 처방전을 받아서 약을 먹으면서 했다."


#3.15의거#4.19혁명#김주열 열사#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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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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