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50돌과 '5·18 광주항쟁' 30돌을 맞이하여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진행 중이다. 4월 14일 한겨레신문사와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가 공동주관한 토론회는 '4·19 50주년, 광주항쟁 30주년 기념'이라고 하였고, 같은 날 열린 혁명 50주년 국제학술대회의 주제는 '4·19 민주혁명의 회고와 성찰'이었다. 여성학회 또한 '4·19혁명과 여성'을 주제로 17일 토론회를 개최한다.
4·19, 5·18, 6·10에서처럼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유독 특정한 날짜로 명명되고, 기억되어 왔다. 특히 '4·19'은 '4월 혁명', '4·19' 등으로 불리며 학계에서도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떠한 명명이 그 역사적 의미를 가장 잘 담아낼지에 대한 고민과 논의가 적었던 것이다. 과연 혁명 앞에 '4·19'라는 특정 날짜가 붙었을 때, 혁명의 과정과 의미는 제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지난 3월에는 날짜로 명명되는 또 하나의 국가공식 기념일이 지정되었다. '3·15의거 기념일'이 그것이다. 3·15의거 단체는 '기념일 제정에 대한 의견'에서 3·15의거가 "민주지향의 가치를 따라 시민과 학생계층이 함께 참여한 대중혁명"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4·19혁명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는 셈인데 왜 3·15의거를 따로 기념하고자 한 것일까. 관련단체는 3·15의거가 "한국사상 초유의 유혈사태가 발발하여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이 출범한 후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는 4·19혁명을 최초의 민주화운동으로 평가해왔는데, 3.15 의거를 최초의 민주화운동으로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1960년의 혁명 앞에 '4·19'가 붙으면서 4월 19일 이전의 역사는 간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혁명의 전사(前史), 기폭제, 도화선으로만 간주되어 '4·19'라는 기호 속으로 흡수되고 만 것이다. 즉 '4·19혁명'은 4월 19일만을 혁명으로 기억하면서 그날이 오기까지 장기적으로 진행되었던 부정선거 규탄과 민주화의 외침을 사장 시키는 용어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3·15의거의 의미 또한 축소되었고, 이를 기념하고자 할 때 3·15의거가 4·19혁명에 앞서는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음을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15의거와 4·19혁명 중 무엇이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는가는 간단히 답을 하기 어렵다. 두 사건 중 어느 하나가 '최초'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혁명의 역사가 단발, 단 하루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어느 지역의 어느 날 사건을 시작으로 둘 것인가 또한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에 대해 2007~2008년 전북 정읍시와 고창군이 황토현 전승일과 무장 기포일 중 어느 사건을 기념일로 할 것인지 갈등하다가 지금까지 기념일을 정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엄밀하게 따져볼 때 3·15의거와 4·19혁명은 둘 다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1960년 혁명은 기실 3월 15일 마산에서의 유혈사태가 있기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를 따지자면 2월 28일 대구 경북고 학생들의 시위가 '최초'였다. 민주당 장면 후보의 유세 연설에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2월 28일에 강제등교를 하게 한 학교의 처사에 반발하며 '학원의 정치도구화'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데모에 나선 것이다.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3월 8일에는 대전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대전고교 학생들과 경찰은 난투극을 벌이다가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3·15의거를 "한국사상 초유의 유혈사태"라고 하는 것 또한 맞지는 않을 것이다. 시위자 가운데 공식적으로 사망자가 나온 것이 3월 15일 마산에서의 항쟁인 것은 틀리지 않다.
그 후에도 3월 14일까지 수원, 충주, 청주의 고교생과 포항, 인천, 원주, 부산의 고교생 역시 시위에 나섰다. 서울에서 선거 '전야'를 맞은 학생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쓰인 삐라를 뿌리고 있었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에는 "공명선거"도 있었다. 3월 15일 선거 이전부터 부정과 폭력이 횡행하였고,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와 "부정선거 배격"을 강하게 외치고 있었다.
물론 3월 15일 마산의 시민, 학생의 항쟁이 혁명의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저녁 8시 경 경찰의 발포가 시작된 후 이 날 하루만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2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선거 다음 날부터 시위는 계속되었는데, 4월 11일은 또 다른 분기점이 되었다. 부두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사체가 발견된 것이다. 그날 밤 시신이 안치된 도립병원 앞에는 3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고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창원군청 앞에서 시위 및 기물파괴가 잇따랐다. 이른 바 '2차 마산사건'이 발발한 것이다.
마산시민들의 분노는 고교생에서 대학생으로, 각 지역에서 서울로 이어져 마침내 4월 19일에 폭발하였다. 이처럼 의거 앞에 붙은 '3·15는 '2차 마산사건을 포함하여 이후에 벌어진 사태의 전모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4·19'가 3월의 항쟁들을 모두 빨아들였다면 '3·15'는 3월 15일 이전에 있었던 각 지역 학생들의 시위와 그 이후의 항쟁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다수의 시민들이 폭발적인 열기를 보였고, 대규모의 유혈사태가 있었던 바로 그날이 기억되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학생과 시민이 스스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외쳤던 혁명은 바로 그날에만 있었던 것 또한 아니었다.
따라서 '3·15의거'를 4·19혁명과 달리 기억,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2월 말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에서 대통령의 하야까지를 아우르는 장기의 '민주혁명'이라는 발상이 필요하다. '의거'와 '혁명'을 구분 짓고, 3·15와 4·19를 분리하여 기억하는 것은 혁명의 연속적 과정을 특정한 기호 속에 용해시켜 버리고 만다. 3·15와 4·19는 '1960년 민주혁명'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분기점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아람 기자는 역사를 통해 소통과 화합을 모색하는 통통통(通統筒)의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