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올해 창간 10주년 기획의 일환으로 국내 11개 진보싱크탱크들과 공동으로 '지방선거 10대 어젠다'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삽보다 사람'이라는 주제가 붙은 이번 기획을 통해 거대 담론보다는 주민들의 삶과 밀접한 과제를 구체적으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계획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
"중위권 성적의 아이들은 복습을 갖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하위권 학생들은 자기 계획을 세웠는지 확인해 보고, 나름의 목표를 갖도록 해야죠."경기도 고양시 덕양중학교 3층 컴퓨터실에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흘러나온다. 이미 모든 학교 수업이 끝난 오후 4시. 중하위권 학생들이 나머지 공부나 '정신 교육'을 받고 있는 건가?
슬쩍 교실로 들어갔다. 칠판이 있어야 할 자리에 프리젠테이션 화면이 환하게 떠 있다. 강의를 듣는 '학생' 9명 자세가 진지하다. 저마다 책상 위에 켜진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굴린다. 그리고 클릭을 하고, 수첩에 뭔가를 기록하기에 바쁘다. 이들은 덕양중 교사들. 김삼진 교장도 포함돼 있다. 강의가 끝날 무렵, 한 교사가 손을 들고 질문을 한다.
"솔직히 저의 학교 성적 하위 30% 학생들은 타 학교에 비해서 좀 떨어지는 편입니다. 이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요?"이날 강의를 진행한 장준호 한국가이던스 마음과배움 팀장은 다시 큰 목소리로 답했다.
"성적 하위 30% 아이들의 학습 부진은 지금 당장 벌어진 현상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쌓여온 측면이 있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이나 부모의 영향도 있고, 배우고 느낄 만한 또래의 좋은 모델도 없었을 가능성이 크죠. 공부를 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해 줘야 하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줘야 합니다."교사의 질문과 강사의 대답은 덕양중이 안고 있는 현실적 문제와 고민을 잘 보여준다.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에 위치한 덕양중은 한때 '버려진 학교'나 다름없었다.
50%가 국가와 지역사회에서 지원받는 학생... 한국교육의 단면덕양중은 서울과 일산을 연결하는 도로 주변에 있다. 90년대 초반 일산 신도시가 개발되자 많은 화전동 주민들은 그쪽으로 떠났다. 서울 은평구와 맞닿아 있으니 서울로도 많이 '진입'했다. 그렇게 좀 산다 하는 이들은 하나 둘 남(서울)과 북(일산)으로 떠났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화전동에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늘어났다. 지역은 다소 낙후된 마을로 변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가 온전했다면 그 자체가 '뉴스'다. 덕양중학교는 1968년 9개 학급으로 문을 열었다. 1972년 1회 졸업생 154명을 배출했다. 1979년에는 18학급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규모가 줄어 현재는 학년 당 2개 반 총 6개 학급, 136명이 전부다. (1학년 40명, 2학년48명, 3학년 48명)
학교 규모만 줄어든 게 아니다. 한국은 이미 부모의 경제력과 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비례하는 사회가 됐다. 이 법칙은 덕양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초생활수급권자, 한부모 가정 등의 이유로 덕양중 학생의 약 50% 정도는 국가나 지역사회에게 지원을 받는다.
성적으로 한 줄을 세운다면 덕양중은 뒤쪽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성적으로만 학력을 평가하는 일제고사 결과도 그걸 증명한다. 일제고사는 학생들의 조건과 상황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 오직 숫자와 서열만으로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낙후된 지역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은 덕양중을 이 땅에서 지워야 할까, 아니면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고 배움의 공동체를 통해 '할 수 있다, 한 번 해보자'는 꿈을 심어주는 장소로 바꿔야 할까? 후자를 선택한다면 과연 그것이 실현 가능할까? 누가 봐도 어려운 길이다.
하지만 김삼진 덕양중 교장을 포함한 교원 15명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렇다고 '일제고사에서의 굴욕'을 극복하고자 학생들을 늦게까지 잡아 놓고 문제풀이 시키는 게 아니다. 교사들은 협동학습, 그리고 지역 주민들과 연계해 '가고 싶은 학교, 재밌는 교육'이라는 장기적은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세운다고 목표가 저절로 달성되는 건 아니다. 김 교장과 교사들이 오후 늦게까지 남아 특강을 들으며 연수를 한 것도 목표 달성을 위한 노력의 하나다.
"하나의 자(일제고사)로 일률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좋지만, 여러 면을 평가하는 다양한 자가 필요하다. 성적 향상은 짧은 기간에 안 된다. 여기 학생들은 많이 어려운 상황이고, 하나의 역할 모델을 보여주면서 자존감을 키워주는 게 필요하다. 몇몇 아이들은 졸업만 해줘도 고마운 상황이었다. 학부모, 교사, 지역사회의 참여와 소통을 통해서 아이들을 기다려줘야 한다."김 교장의 말이다. 빈곤과 학습 의욕 저하라는 이중의 어려움은 일제고사라는 약만으로는 치료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리고 학생들 특징과 개성에 따른 맞춤형 교육과 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졸업만 해도 고마웠던 아이들... 그들에게 무슨 일이?김 교장은 2008년 교장공모제를 통해서 덕양중으로 왔다. 김 교장과 교사들은 ▲ 참여와 소통의 교육 ▲ 지역사회 네트워크 강화 ▲ 재미있는 수업, 즐거운 학교 만들기 ▲ 전문적인 학습 공동체 구축 ▲ 책임지는 학교와 교사 등 5대 목표를 만들었다. 또 작년에는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혁신학교를 신청해 지정받기도 했다.
김 교장은 목표 실현을 위해 "우선 슬럼화된 지역에 사는 학생들에게 학교에서만큼은 좋고 올바른 모습을 보고 체험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며 "학생 스스로 '나도 중요한 인간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덕양중은 학교 혼자만이 아닌, 학부모와 주변의 대학 그리고 군과 복지단체와 함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변화의 노력은 교사들이 먼저 시작했다. 덕양중 교사들은 2008년에만 총 22번의 연수를 받았다. 올해도 매주 목요일을 '전문화 연수의 날'로 정해 외부 강사 초청 강연을 듣거나, 공개 수업을 연구한다. 이런 과정은 교사들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스펙 쌓기가 아니다.
김영식 덕양중 교사(사회)는 "가정과 주변 환경으로 인해 공부의 재미를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을 배움의 장으로 끌고 오려면 교사들이 먼저 배워야 한다"며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연구 모임을 만들고 공개 수업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의 예로 덕양중은 학생들이 함께 서로 도와가며 수업을 하는 '협동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 교사는 "협동수업을 하니 자거나 다른 짓을 하던 학생들이 조금씩 수업에 관심을 보이고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또 덕양중은 '학부모 아카데미'를 통해 학부모들도 교육에 참여시킬 방침이다. 학생 교육문제를 학교와 학부모가 서로 떠넘기는 게 아니라, 함께 고민해 문제를 푸는 일종의 '협업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취지다.
군부대와 대학, 봉사단체 똘똘 뭉쳐 '학교 살리기'덕양중은 지역사회와의 적극적인 연계 프로그램도 진행했고, 지금도 추진하고 있다. 지역사회와의 연계는 '덕양중 살리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선, 덕양중은 주변 군부대인 육군 30사단과 교류를 적극 추진한 바 있다.
덕양중 바로 인근에는 30사단이 있다. 하지만 정작 여기서 근무하는 장교와 부사관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덕양중에 보내길 꺼렸다. 그래서 김 교장이 적극 나섰다. 사단장을 초청해 학교에서 특강을 열었고, 유학을 다녀왔거나 외국에서 살다온 장병들에게 '주말 영어 교육'을 맡기기도 했다.
김 교장은 "학교가 학생들에게 노력하고 책임지고 있다는 걸 군에게 보여주고, 군은 지역의 학생들에게 봉사 활동을 하면서 서로 오해와 불신이 풀리기 시작했다"며 "들어오길 꺼리던 군인 자녀들도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고 말했다.
학교 바로 앞에 위치한 한국항공대학교와는 지금도 적극적인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항공대 학생들이 덕양중 학생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면서 방과 후 교실도 열고 있는 것이다. 김영식 교사는 "대학생들은 봉사활동 '스펙'을 쌓고, 덕양중 학생들은 대학생을 직접 만나 공부하면서 자신의 꿈을 만들어 갈 수 있다"며 "같은 지역에서 서로 '윈윈'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교육봉사단'이란 단체는 2009년 2학기부터 덕양중에서 '씨앗학교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방과 후 방치될 위험이 높은 학생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 이 단체는 지난학기에 학생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정서교육에 집중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올해는 학습 지원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교육을 진행하는 밑바탕에는 "학습부진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학생들의 자존감이 있다"는 고민과 인식이 있다. 또 흰돌사회복지관은 주 2회 덕양중을 방문해 학교부적응 학생들에 대한 상담은 물론이고 생활지원까지 지원하고 있다.
이처럼 덕양중은 "오고 싶은 학교, 재미있는 공부"를 위해 교사들의 변화-지역사회와 연계-봉사단체와 협동을 하는 '삼각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김영식 교사는 "성적 미달과 학습부진 등이 학교 책임이라면, 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자유로워야 한다"며 "당장 어떤 성과를 내느냐보다는 어떤 방향을 잡고 가는가가 장기적으로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경기도교육청은 혁신학교 덕양중의 도전과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감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교육청 쪽은 "덕양중이 보란 듯이 성공해야만 다른 학교도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도 2009년 덕양중을 방문해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은 이미 전설이 됐다. 대신 '학력은 부모의 재력'이라는 말이 굳어졌다. 이런 현실에서 덕양중은 다시 전설의 재구성을 모색하고 있다. 구체적인 변화의 모습의 발견하고 달콤한 성과의 열매를 맛보려면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교육은 원래 '기다려 주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