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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은애하는 처자가 있다네. 상대방은 내가 그런 마음을 지녔는지 모르지. 속은 바글바글 끓는데 애타는 마음 전할 길 없으니 이렇듯 몸과 마음이 말라가네."

"자네 마음을 전하는 길이란 여러 가지네. 아름다운 꽃을 선사하거나 음악을 들을 수도 있지. 또한 자네가 글을 읽으니 이름다운 시를 전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시라···. 내 처지엔 그게 좋겠네. 하면 어떤 시가 좋을까?"
"상대방을 은애한다 했으니 그런 시를 써야겠지? 그렇다면 이규보(李奎報) 선생의 회문시(回文詩)가 좋겠네."

민지운 역시 이규보 선생을 알고 있었으나 회문시가 어떤 것인진 몰랐다. 다만, 회문시가 시인들이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기법을 추구하는 창조적인 노력이라고는 들은 바 있었다. 그래서 친구인 정태현이 익숙하게 끼적인 미인원(美人怨)을 베끼는 데 주력했다.

장당체앵춘(腸斷啼鶯春)
낙화홍족지(落花紅簇地)
향금효침고(香衾曉枕孤)
옥검상류려(玉臉雙流淚)

낭신박여운(郎信薄如雲)
첩정소사수(妾情撓似水)
장일도여수(長日度與誰)
추각수미취(皺却愁眉翠)

꾀꼬리 우는 봄날 애간장이 타는 데
꽃이 떨어져 온 땅을 붉게 덮었구나
이불속 새벽잠은 외롭기만 하여
고운 뺨엔 두 줄기 눈물 흐르누나

님의 약속 믿음 없기 뜬 구름 같고
이내 마음 일렁이는 강물 같구나
긴긴 밤을 그 누구와 함께 지내며
수심에 찡그린 눈썹 펼 수 있을까

이규보의 회문시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민지운은 감지덕지해 그날의 술상을 자신이 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날 저녁 집에 도착해 중문을 벗어나던 차에 형수를 만났다. 형님과는 세 살 터울이지만 자신과는 동갑이다. 그날따라 집안에 어른들이 안 계신 터라 자신의 마음을 술김에 내비쳤다.

"내가 형수님을 지금에 와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형님과 혼약이 있기 전부터 은애하고 있었어요. 형님이 장가를 안간 처지니 내가 먼저 가겠다고 나설 수 없는 일이라 그냥 이놈의 나이가 차기만을 기다렸는데 매파(媒婆)가 가져온 혼담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만, 그래도 한 집에 함께 지낼 수 있다는 마음에 자위하며 지금껏 지내왔습니다. 형님이 과장에서 동방에 입격해 삼현육각 울리며 집으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갑자기 놀란 말에 채어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형수님, 형님이 없으니 제가 형수님을 아내로 맞아 형님 몫까지 잘 해드리겠습니다."

형수는 놀란 표정이었으나 일체의 대꾸가 없더니 돌아서던 길에 한 마디 뱉었다.
"늦은 밤 별당에 오면 방 입구의 오동나무에 쥘부채가 있을 거예요. 내가 쓴 시구 위에 답시를 써 주면 그것으로 내 마음을 정하겠어요."

단번에 반대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뜻하지 않은 말을 듣자 하늘에 뛰어오를 듯 기뻤다. 밤늦게 오동나무 앞에 섰더니 나무 가지에 쥘부채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방으로 가져가 펼쳐보니 장일도여수(長日度與誰)였다. '긴긴 밤을 누구와 함께 보내랴'였다.

민지운은 즉시 답변을 휘갈겼다. 시구가 이규보 선생의 회문시 '미인원'이라는 걸 알았기에 '추각수미취(皺却愁眉翠)'라 운을 맞추었다. '수심에 찡그린 눈썹을 펼 수 있을까'였다. 그러나 문장의 맥을 보면 전연 엉뚱하다는 걸 민지운은 눈치 채지 못했다.

몇 날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쥘부채는 담 너머 숲에 내던져진 후였으니 답장이 올 리 만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형수의 그림자라도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별당 근처를 배회하다 사람 그림자를 발견하고 쫓아갔다.

그날 담 아래서 쥘부채 하나를 발견했다. 거기엔 놀랍게도 이규보의 회문시가 끼적여 있었다. 위에 있는 시구는 장일도여수(長日度與誰)이고 아래쪽엔 수여도일장(誰與度日長)이었다. 자신은 회문시를 순서에 입각해 다음 구절을 썼고, 누군가의 쥘부채엔 상대가 썼던 시구를 반대로 답시한 것이다.

민지운은 부채에 달린 죽두(竹頭)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 정태현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모른 척 하고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새로운 즐거움을 찾은 듯 들떠 있었다.

"내가 첫 경험을 한 건 집에서 부리던 사금(絲禽)이란 아이였네. 무당 집안의 딸로 신내림을 받기 싫어 도망쳤는데, 그 계집이 날 유혹하지 뭔가.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는데 어찌나 영악한지 기생처럼 사내 후리는 요본 감창이 절창이더란 말일세. 그 아이가 오래도록 우리 집에 있었으면 심심찮게 몸을 풀 수 있어 좋았으련만 큰 무당이 죽자 뒤를 잇는다고 가버렸다네. 해서 얼마 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 사람을 넣어 내 뜻을 전했더니 쥘 부채에 시구 하나를 써 보낼 터니 답시를 달라는 거야. 해서 그리했는데 그만 담을 넘다 쥘부채를 떨어뜨렸지 뭔가. 도대체 그 부채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모르겠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그만 잊어버리기로 했네."

민지운은 모른척 시구 내용을 물었다. 내용은 예상했던 것처럼 이규보의 회문시였다. 자신과는 달리 상대가 쓴 시구의 내용을 정태현은 뒤집어 보낸 것이다.

정약용은 단도직입적으로 민우기 대감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모든 정황이 둘째 아드님에게 불리한 증거들만 나오고 있으므로 큰 며느님의 사체를 해부하지 않으면 일단 잡아들여야 함을 명백히 밝혔다.

"허허허, 집안에 불덩어리를 놓아 두었어. 두어 해 데리고 있다가 좋은 사내 나오면 재취 시킬까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어찌 알았는가."

민대감은 허탄한 웃음을 뿌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제 오후 권문(權門)에 사인(舍人)으로 있는 송가(宋哥)가 찾아왔었다. 세월이 하수상 하고 한때 같은 밥상을 받았던 권문의 동역이니 즐겁게 만나 한담이나 나눌까 해서였다. 송가는 자신과는 달리 권문에 들어와 책사(策士)로서 자릴 굳혔다. 눈을 감고 오리를 생각하고 눈을 뜨면 십리를 생각으로 달린다는 송가는 젊었을 적 영암의 월출산에 들어가 그 자신 진리라고 믿는 황노술(黃老術)에 심취했었다.

도력 20년! 이젠 세상에 나가 자신이 익힌 학문을 써먹어야겠다고 하산해 권문에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 송가는 민우기 대감이 뽑아든 첨자(籤字)를 보며 경고했었다.

"대감이 뽑은 건 오리 부(鳧)잡니다. 오리는 새지만 결코 하늘을 날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하는 일이 결코 오래 가진 못합니다. 대감께서 쓰신 부(鳧) 자는 털이 빠진 난새(鸞鳥) 같고, 어찌 보면 깃이 부러진 앵무새 모양이니 무엇을 하건 소득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건 순리를 따라야 합니다."

첫 머리에 말하진 않았지만 이러한 일을 풀려면 사냥으로 잡은 짐승의 수자만큼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 경우 더 큰 액화(厄禍)가 찾아올 것이라 경고했다.

"송가 자네는 언제 보아도 듬직하이. 권문에 몸 담았을 적엔 내가 함부로 나서는 걸 경계하더니 지금은 당시에 했던 살생에 대해 피할 방법을 알려주니 자네 같은 모사(謀士)는 없을 것이네. 내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자네 충고는 잊지 않을 것이네."

다시 하루쯤 생각하고 관아에 통보했다. 죽은 며느리의 몸을 해부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여인의 몸을 해부할 때엔 현장에 송화가 참석하고 휘장을 친 뒤쪽에서 정약용이 사체의 상황을 묻기 마련이다. 해부를 하기 전, 몸을 감초즙으로 닦아내 몸 상태를 점검한 후 준비된 법식대로 수술이 행해졌다. 악즙(惡汁)은 흐르지 않았지만 주검에서 풍기는 냄새로 보아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코 밑에 진마유를 바르고 수건으로 근처를 가린 채 검험에 들어갔다. 이미 송화는 갯버들 나무껍질을 다리 쪽에 덮고 한 시간쯤 지나 떼어낸 상태였다.

"뭐가 나타났느냐?"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엔 준비해간 백매(白梅) 껍질을 찧어 짓이긴 것을 골고루 붙여라."

다시 한 시각이 경과해 물었다.
"무엇이 나타났느냐?"
"없습니다."
"허면?"

"독극에 중독됐지만 몸 안까진 침범한 게 아니고, 손가락끝이 검은 것으로 보아 서책같은 걸 보다 중독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약용은 검시기록을 작성하는 항인들에게 명했다.
"날 따르게."

그의 걸음은 곧장 민우기 대감 집으로 향했다. 일행들이 도착했을 때, 가족들은 한자리에 둘러앉아 음란서생 화자허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이 민대감의 뜻이라는 걸 알았지만 부인을 비롯해 아들과 종놈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낯이었다. 얘기는 분위기가 무거운 가운데 진행됐다.

"시생이 이집에 오기 전 부탁을 받았습니다. 진사를 지낸 정씨 집안의 자제 정태현이라는 선빕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작은 도련님과 동문수학하는 친구지요. 그 분이 내게 한 말은 민대감 댁 며느리는 과수댁인데 한 밤중에 월장해도 되겠느냐는 물음이셨습니다. 소인이 대답하기를 도둑고양이처럼 담을 넘는 건 권할 바 아니나 그 전에 아가씨의 마음이 어떤 지를 살피는 게 바른 법이라 했습니다. 마음을 살피는 방법으로 회문시(回文詩)를 이용하라 권했지요."

"어찌 그 같은 방법을 권했느냐?"

[주]
∎진마유 ; 참기름


#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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