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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혜화문(惠化門)'은 지난 1992년에 복원되어 서울성곽에 남아 있는 다른 어떤 문보다도 새롭고 깨끗하게 정비된 문이다. 흔히 동소문(東小門), 홍화문(弘化門)이라고도 불린다.

 

조선 초기 한양성곽에는 4개의 큰문과 4개의 작은 문이 설치되었는데, 혜화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홍화문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 동문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84년(숙종 10) 문루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여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가 혜화동과 돈암동을 잇는 전차 길을 내면서 이마저도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었다.

 

원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은 음기를 몰고 온다고 하여 문을 상시적으로 열어두면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가뭄 때만 간혹 문을 열어 출입을 허가했던 관계로, 혜화문은 사실상의 북문 역할을 하여 경기 동북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였다.

일행은 혜화문을 둘러 본 다음, 성곽 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길 우측에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가 보였다. 주로 인사동과 북촌에 많은 외국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혜화동과 성북동 일부에도 있는 것을 보면 이곳도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가 보다.

 

마당까지 있는 비교적 넓은 정갈하고 깔끔한 집이었다. 이런 곳에서 나도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길을 계속하여 가면 성곽 위에 단독 주택과 빌라가 보이기도 한다. 신당동 인근에서 보던 많은 집들과 유사한 느낌이다. 현재는 개인의 사유재산이기는 하지만 성곽 위에 집들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또 길을 더 가다보면 성곽 위에 지어진 혜성교회와 경신중고등학교가 나온다. 교회의 초석과 담장이 분명 성곽 돌이다. 또한 경신중고등학교의 담장 역시도 성곽 위에 쌓여져 있다. 이곳도 역시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사실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것은 임산부의 배나 복부비만자의 배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온 성곽 돌들이었다. 또한 석축 곳곳에 나무들이 돌 틈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 여러 군데 보인다. 그대로 장기간 방치를 하면 반드시 붕괴위험이 있어 보였다. 이런 붕괴위험이 있는 성곽 위에 집, 빌라, 교회, 학교가 있다는 사실도 위험천만해 보인다. 

        

이어서 길을 더 가면 성북동에 유명한 명소 중에 하나인 '왕 돈까스 집'이다. "서울성곽을 둘러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간다."며 신나게 호객행위를 한다. 우리 일행도 그들과 농담을 하면서 식사 유혹에 빠져보지만, 아직 30분 정도는 더 예정된 길을 가야 하기에 길을 좀 더 올라 '와룡공원'까지 간다. 

     

뒤편의 성북동과 아랫 편의 혜화동, 성균관대학 등이 전부 눈 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계속 전진을 하면 숙정문이 나오고 북악산에 오르게 되지만, 오늘은 '성균관(成均館)'을 둘러보는 것으로 길을 잡는다. 

화룡공원에서 성균관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지만, 쉽지는 않은 길이다. 두어 시간을 걸어서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가는 길이라 넘어질 것 같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좋아 감탄을 하게 된다. 대학의 많은 건물과 나무들도 좋지만, 창경궁을 반쯤 내려다보는 느낌이 남다르다. 멀리 남산도 보인다.

 

고려시대부터 국가최고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은 성균관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에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양현고, 존경각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학생들과 고관대작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입학을 허가했다. 성균관 유생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세종 조에 들어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현재 성균관대학 안에는 성균관과 문묘 등이 남아 있다. 문묘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워졌다. 지금의 문묘는 임진왜란으로 타버린 것을 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는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배가 고파 성균관과 문묘를 주마간산으로 둘러 본 다음, 성대 정문 안쪽에 있는 하마비와 작은 비각을 살펴 본 후, 대학로로 이동하여 해물 탕으로 점심을 하면서 막걸리를 한잔 마셨다.

 

3월말이라 아침은 약간 춥고, 오후가 되니 피곤하기도 하고 노곤한데 식사와 막걸리까지 한잔을 하니 졸음이 몰려왔다. 식사를 마친 다음 일행들과 헤어진 나는 마로니에공원으로 가서 봄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좀 더 했다.

                 

마로니에공원에는 '고산 윤선도 선생의 생가 터'를 알리는 비석과 예전 '경성제국대학'과 '서울대학이 있었던 사실을 알리는 작은 기념비', '독립운동가 김상옥 열사 상', 무리한 파면으로 두 명의 위원장이 일하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던 '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건물'(구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 본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 방송대 안에는 서울공대의 전신인 '구 공업전습소 본관 건물' 등이 있어 볼 것이 많다. 

           

봄날에 걸어본 서울성곽, 성균관, 대학로는, 햇살을 받으며 기분 좋게 하루를 정리하면서 보낼 수 있는 좋은 여행이었다.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시 종로/중구 걷기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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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서울성곽 , #성균관 , #마로니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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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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