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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자 조중동 1면을 점령한 사진 하나가 있습니다. 전날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시작하기 전, 국민의례 시간에 이명박 대통령과 군 수뇌부가 경례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대한민국 국기법(시행령 제3조)에 따르면, (1)제복을 입지 아니한 국민은 국기를 향하여 오른손을 펴서 왼쪽 가슴에 대고 국기를 주목한다 (2)제복을 입지 아니한 국민 중 모자를 쓴 국민은 국기를 향하여 오른손으로 모자를 벗어 왼쪽 가슴에 대고 국기를 주목한다. 다만, 모자를 벗기 곤란한 경우에는 제1호의 방법에 따를 수 있다 (3)제복을 입은 국민은 국기를 향하여 거수경례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복을 입지 않은 이 대통령은 거수경례가 아니라 오른손을 펴서 왼쪽 가슴에 대야 맞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김태영 국방장관처럼 말이죠. 결국 위 사진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국기법 위반을 폭로·고발하는 충실한 증거물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상기한 신문들 가운데 이런 사실을 바르게 짚고 넘어간 신문이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심지어 디테일에 강한 조선일보조차도.

여담이지만, 조선일보가 어느 정도로 디테일에 강한지 아십니까? 지난 밴쿠버 올림픽 때 있었던 일입니다.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가장 먼저 결승선에 들어오고도 실격처리된 황당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심판의 어이없는 판정에 분노하며 선수들과 같이 아파하느라 정신이 없었드랬지요. 그때 작성된 조선일보 칼럼 한 편.

"선수들이 쥐고 있던 태극기는 자연스레 깃봉과 함께 빙판으로 떨어졌다. 천천히 움직이는 선수들을 따라 태극기는 빙판 위를 질질 끌려다녔다.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 선수들은 은메달을 딴 뒤 대형 태극기를 빙판에 펼쳐놓고 관중석을 향해 큰절을 했다. 선수들이 손에 들고 흔들던 작은 태극기들은 그 대형 태극기 옆 빙판에 방치돼 있었다..."

"선수들이 4년간 흘렸을 땀과 눈물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그 일과 태극기를 다루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남자 계주 선수들이 태극기를 '곱게' 펼쳐놓았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선수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대한민국 국기법'이라는 태극기에 관한 법률이 있다는 사실을 이 기회에 알았으면 하는 뜻이다..."

"이들에게 국기법에 대해 간단한 설명만 해주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과거엔 화가 난다고 들고 있던 태극기를 경기장에 집어던지다시피 한 선수도 있었다. 그 선수가 국기법을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국기법은 행안부 장관에게 '국기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교육·홍보' 의무를 지우고 있다. 이에 따라 행안부가 무엇을 했는지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다. 초등학생들이 졸업하기 전에 최소한 한번이라도 선생님으로부터 태극기 다루는 법을 들었으면 한다..."(조선데스크, <'태극기 法'이 있습니다>, 2010.03.04)


모두가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우리나라 선수들 손에서 미끄러진 태극기의 수모를 상기시키며 근엄·엄숙·숙연한 표정으로 "선수들도 대한민국 국기법을 배워야 한다"고 코치한 조선일보의 알뜰살뜰함이 이 정도입니다.

그런 신문지라면 행정부 수반인 이 대통령이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 대한민국의 별들을 모아 놓고 국기법에 어긋나는 잘못된 경례를 해도 되느냐고 따끔하게 한 마디 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우국충정의 기수'요 '보수의 태두'를 자임하는 조선일보라면 응당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조선일보만 너무 편애(?)한다고 하실까봐, 동아일보의 '개그'도 살짝 언급해 드려야 할 것 같네요. 동아일보는 상기한 경례문제를 사진 밑에 붙인 캡션에서 유일하게 거론한 신문지입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골 때립니다. 제가 여기서 왜 '개그'라는 낱말을 썼는지, 보시면 아마 이해가 되실 겁니다.

"거수경례하는 李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오른쪽)은 4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천안함은 단순한 사고로 침몰하지 않았다'며 국가안보시스템의 총체적 개혁 방침을 밝혔다. 이 대통령 옆으로 김태영 국방부 장관과 한민구 육군참모총장, 이계훈 공군참모총장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민간인인 국방장관은 군의 거수경례에는 거수경례로 응하지만 국민의례 때는 가슴에 손을 얹고 경례한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어떻습니까? "민간인인 국방장관은 국민의례 때는 가슴에 손을 얹고 경례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군대도 안 간 이명박 대통령은 민간인이 아니고 군인이랍니까? 말끝마다 '문민정부'라더니 언제 '군인' 세상이 됐답니까?

보는 이로 하여금 아연실색,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동아일보의 개그실력이 이 정도입니다. 정말 재밌는 신문지들 아닙니까? 어린이날을 맞아 조중동이 이 대통령의 거수경례 사진으로 1면을 장식한 것도 다 이런 깊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태그:#MB 거수경례, #국기법,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조중동 1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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