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비밀의 알뿌리
흰 갈매기라? 멜레나와 탱고를 추던 그 남자 아닌가. 그는 여전히 탱고 복장을 입고 왔는데, 나는 과연 그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걸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나름대로 날카로운 눈빛으로 스튜디오를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묘한 미소가 일었다.
"흰 갈매기씨, 멋진 옷을 입고 오셨군요. 아, 여자 분은 성함이...."
하면서 할머니는 큐시트를 뒤적거렸다. 그리곤 아가씨로 되돌아간 것처럼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무명의 안내원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셨군요."
하면서 여자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안내원은 엉망이 된 머리를 쓰다듬으며 짐짓 화가 덜 풀린 듯 피디를 사정없이 쏘아보더니 카메라를 의식하곤 45도 각도로 다리를 오므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개새끼!"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꼬맹이는 흰 갈매기가 아빠라도 되는 양 팔짱을 끼고 매달렸고 화면에 잡힌 장면만 본다면야 어느 화목한 가정의 거실에서 부부와 아이 그리고 고모와 할머니가 함께 담소를 나누는 그런 장면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가정이나 그 내막을 보면 일그러지고 금이 간 부분이 있듯이 '근사해 보일 법한 이 가정' 역시도 마찬가지 사실을 가지고 있단 거다.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한 분씩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할머니는 찻잔을 집어 들며 조용히 눈을 깔고 말했다.
"저요! 제가 먼저 말할래요."
안내원은 몸을 앞으로 젖히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흠칫하며 순간적으로 깜빡 잊었다는 듯이 자세를 고쳐 앉더니 안내원 톤의 경쾌한 음성으로 가다듬어서는 속사포 같지만 자제력을 잃지 않은 말투로 입을 뗐다.
"세상에는 도덕과 윤리라는 것이 있는 법이죠. 그러니 그것을 잘 지켜야만 할 의무가 있는 법이고요. 남의 것을 탐해서는 자신도 옳은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제법 훈계조의 초등 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교탁에 서서 턱을 치켜든 채 으스대는 듯한 분위기로 자신의 이야기에 조금씩 도취되어 가는 중이었다.
"저는 지금껏 관광 회사의 전화안내원으로 11년을 근속했어요.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통해서 우리 회사와 만났지요. 그 덕에 한 번이라도 저와 통화한 사람의 목소리는 모두 기억할 만큼 고객 한분 한 분을 대하는 저의 서비스는 남달랐답니다. 저는 이것을 제 직업 정신의 자랑스러운 단면이라고 여겨요. 그런데! 오늘 오전에 다급하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지요."
전화를 건 사람은 보카의 멜레나였고, 그녀는 관광버스에 두고 내린 어느 식물업자의 집에서 받아온 구근(球根.식물의 알뿌리,수선화, 튤립 등의 뿌리가 이에 속함)과 그것을 활용하여 열망사냥꾼을 퇴치할 방책이 깨알 같이 쓰여 있는 작은 메모장을 정신없이 찾고 있었다고 한다.
오랜 동안 보카와의 교류를 이어오던 그 식물업자는 열망사냥꾼과 분노의 술에 얽힌 관계를 풀어낼 비방을 연구하기 위해서 수년 동안을 연구에 골몰한 결과, 드디어 그 방책의 일부를 찾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막 연구의 탄력을 받아갈 즈음의 어느 아침, 쏟아지는 햇살속에서 무리져 핀 수선화가 산들바람에 춤추던 연못가에서 그는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한다.
시름시름 앓던 그 식물업자는 지난주에 이미 노환으로 사망하여, 며칠 전에 장례식을 치른 그의 가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유언대로 벽장을 뒤져서 그 상자를 찾아냈다고 한다. 그리곤 여러 경로를 통해서 보카에 연락을 취했고, 상자를 가져 갈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때마침 보카에서 가장 한가하여 시간이 남아돌던 멜레나는 bar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오전 시간을 이용하여 이곳으로 온 것인데, 그녀는 살아생전에 그 식물업자가 소중히 쓸고 닦아서 고이 여기던 실험실 한 켠에 있던 냉장고에서 신문지에 돌돌 쌓인 채 보관 중이던 구근(球根) 덩이들을 몇 개 담아가지고 왔다는 거다.
식물업자가 사망하기 직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구근은 일반적인 식물들의 것과는 다른 종자개량을 한 것이기에 절대로 함부로 내돌려선 안 되고 반드시 용법을 지키라고 부탁을 하더란다.
그리고 멜레나는 보카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것들이 든 상자를 깜빡 두고 내렸단 거다. 그런데 때마침 이곳의 피디도 다큐멘터리 취재를 의논 차 버스에 올랐고, 그가 멜레나의 상자를 발견하고 지극한 호기심으로 그것을 내놓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게다가 그는 보카에 도착해서도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곧장 줄행랑을 쳐서 방송국으로 도망을 와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도덕과 양심을 잃고서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깎아내리는 행동을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고객님의 무한한 감동을..."
하면서 안내원은 순간적으로 전화 안내 멘트로 착각한 듯 무심결에 말이 튀어나와 자신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옆모습을 지그시 지켜보면서 흰 갈매기는 슬쩍 쓴 웃음을 짓더니 담배 한 개피를 꺼내다가 방송임을 깨닫고는, 할머니를 향해서 피워도 되냐는 눈짓을 했다.
"연기를 내뿜지 말고 삼킬 의향이 있다면 맘껏 피우세요."
할머니의 친절하지만 실속 있는 한마디에 흰 갈매기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 틈을 타서 피디는 잠시 할머니 곁으로 다가오더니 소근 소근 귀엣말을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어서는
"저희 피디님께서 이 부분의 해명을 위해서 손님을 한 분 모셨다고 하네요. 직접 자신이 이야기 하면 개인적 감정이 겹쳐서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으니 대리인을 부르시겠답니다. 그럼 초대 손님 한분을 더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잔잔한 음악 속에서 여자 하나가 걸어들어오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고, 나는 잠시 잠깐의 의아함이 밀려들었다. 붉은 하이힐을 신고 적당히 살집이 잡힌 40대 여자였다. 여자는 절대 미인이랄 수 없는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 였으며 싸구려 옷에 몸을 감싼 채 주눅 든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방송 전에 피디는 멋진 몸매의 여성분이 초대 손님으로 온다고 했었다. 그런데?
무심결에 피디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는 겸연쩍어 하면서 여자의 곁에 다가가더니 슬쩍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하이힐 소리가 정말 섹시해'라고 재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이제 프로그램은 늘어난 초대 손님만큼 변화가 더 많이 생겨버렸다. 피디도 동참을 하려는 듯이 여자의 곁에서 자세를 잡고 앉았는데, 이제는 어느 대가족의 명절 마지막 날 싸움판으로 번질 위기의 풍경이 된 느낌이었다.
상황으로 봐서는 피디와 여자는 부부나 연인사이가 분명했다. 아마도 그에 의해서 여자도 강제징집 당한 것 같았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안내원이 눈을 흘기며 그 둘을 번갈아가며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 둘 사이를 질투하는 듯이도 보였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는 상자를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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