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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6일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에서 <1Q84> 3권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책은 12일 만에 일본에서 100만 부를 돌파했고, 덕분에 <1Q84>의 총 판매량은 현재 일본 자국 내에서만 366만 부를 기록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3권이 발표되진 않았지만, 1권과 2권만을 합쳐도 벌써 100만 부 가까이 팔렸다. 한국에서는 6월께 판매될 예정인 <1Q84> 3권은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이미 밀리언셀러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하루키 신드롬'은 이렇게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하루키가 이야기한 세계와 공간의 변화

 

무라카미 하루키. 초기의 그는 사실 '개인의 자리'를 위해 글을 쓰는 작가였다. 그는 이념이 무너진 이후, 허탈한 개인들이 자신의 허무와 사귀는 과정들을 그렇게 글로 표현해 왔다. 국내의 팬들이 생각하는 하루키도 사실 이 지점에 꽤 닿아 있다.  

 

그 이후 하루키는 실제로 작품을 통해 개인을 위해 과거의 이념들을 차츰 씻어낸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마침내 모든 것들을 정리해 개인만을 남기게 되는, 어떤 의미에서는 연대기적인 구성을 나타내어 우리에게 선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에서 '개인'을 '세계'와 등치시켜 종결지음으로써, 하루키는 완전한 '개인의 자리' 마련하기에 성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과정을 통해 계속 전진해서 이야기하는 작가임에 분명하다.  

 

그 이후 하루키는 그 개인이 이제 나서야 할 길을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을 통해 점차로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개인의 자리'는 모호하고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폐적일 수도 있는 신화적 공간으로 표현됐다. 그곳은 세계와 단절되어 있고 근친상간을 하는 공간이지만, 사실 누구나가 알고 있는 세계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신화적인 공간'이란 실은 '무의식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그는 말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가 일본의 저명한 칼 융 심리학자인 '가와이 하야오'와의 긴밀한 친분과 적지 않은 연관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1Q84>

 

그리고 이제 그가 5년 만에 발표한 신작 <1Q84>다. 여전히 신화적인, 거의 SF적인 세계의 분열에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세계가 분열되어 붙인 'Q'에 걸맞도록 말하기의 어려움을 작품의 전체에 걸쳐 다루고 있다.
 

아름다운 소녀 '후카에리'는 글을 쓰지만 그 글은 사실 엉망이라 다른 이에게 글을 맡겨야 할 정도다. 또한 그녀 자신도 타인의 이야기를 읽어내기 어려운 난독증에 시달린다. 작가 지망생이자 수학강사인 '덴고'는 후카에리와는 반대로 문장은 가졌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가 없어 남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그리고 그와 인연을 가졌던 소녀 '아오아메'는 이야기 하기와 이야기 듣기에 실패해, 친구를 자살로 잃고 이제는 이야기를 포기한 채 그렇게 살인자가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여주인공 아오아메의 그 살인은 가장 강한 이야기의 방식이다. 이야기한다. 타인을 이해 시킨다. 그 가장 극점에는, 자신의 이야기로 상대를 죽여버리는 살인이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아오아메의 목표였던 교주는 이야기에 실패해 죄를 저질러 죽음을 기꺼워 했고, 그의 딸이었던 소녀는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을 버거워 했다. 덴고의 아버지는 이야기할 도리가 없어 아들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아오아메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로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한다.

 

덴고의 애인 역시 그의 정부에게 자신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그들은 다만 성욕을 교환하는 사이로만 존재한다. 마침내 그들이 이제 닿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알려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모든것이 오류이며, 단절이며, 살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스런 이야기의 한 가운데, 어쩌면 단 한번 소통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어린 덴고와 아오아메의 이야기였다. 특히 아오아메는 그 이야기가 너무도 소중했기에 심지어 덴고를 찾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완벽한 이야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한 소중한 것인지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천하는 이 어린 시절의 추억은, 하지만 그 파괴력만큼 점차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소중한 이야기는 마침내 그와 그녀가 기적에 가까운 우연을 겹쳐 서로를 의식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한다.

 

하지만 거대하고도 간절한 이들의 바람은 실패한다. 그것은 마치 그들 자신이 자신들의 시간을 견뎌온 방식 그 자체와 닮아 있다. 이야기가 없어 기다려온 덴고와 이야기의 극단에서 죽음을 드러내온 아오아메. 결국 이야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도 그들은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 끝은 결국 비극이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가 각자의 말 밖에는 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야기 하기 그리고 소통하기

 

이렇게 이 책은 소통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본래 그러했다. 언어에 대한 가장 명증하고 깊은 사유를 거듭했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불모를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는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불모함을 뛰어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할 수 없었다. 그리고 <1Q84>처럼 모든 것은 좌절되기 시작한다.

 

침묵할 수 없는 말들. 말들은 본래 그랬다. 같아 보이는 언어조차도 다른 세계, 다른 언어게임의 산물이었다. 나는 이야기가 있다. 나의 규칙이 있다. 그렇지만 저들에게는 저들의 규칙이 있었다. 이야기는 반복되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그것이 품고 있는 이면과 규칙과 상황의 차이가 분열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언제나 '다른 규칙을 가진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며 이야기하기의 좌절감을 언제나 겪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마치 세계, 그 자체를 뛰어넘는 모험일지라도 말이다. 그 이유는 이야기하는 것이야 말로 그것이 단순한 개인을 넘어서서 '개인의 자리'가 아닌, '그들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 좌절에도, 그 아픔에도 말이다.

 

<1Q84>는 결국 그런 이야기다. 개인이 마련된 자신만의 자리를 넘어서서, 신화적인 공통점 속에 서로가 연결해 보고자 했지만 안타깝게 실패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실패한 이야기 하나를 여기에 덧붙여 보자. 그러면 하루키가 말하는 그러한 허망함 뒤에 <1Q84> 3권이 기대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1Q84 1 - 4月-6月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2009)


태그:#1Q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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