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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통로 아무도 가지 않은길, 그러기에 다들 겁내는 길을 소리없이, 온몸의 힘을 짜내어 밀어본다
문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통로아무도 가지 않은길, 그러기에 다들 겁내는 길을 소리없이, 온몸의 힘을 짜내어 밀어본다 ⓒ 일러스트 - 조을영

 

28. 극복에 관하여

 

"자기소개를 먼저 해주시죠."

할머니는 차를 한 입 마시며 빨간 하이힐의 여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다가 피디를 흘끗 보고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디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여자 팔에 살짝 기댔다. 그제야 여자도 결심한 듯이 느릿느릿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들 이니셜을 쓰시니.. 저도 그에 맞는 특혜를 누릴 권리쯤은 있겠지요? 저는..'빨간 하이힐'이라고 해두죠. 알뿌리 상자는 저희 집 냉장고에 보관돼 있어요. 저희는...그러니까 여기 피디님과 저는 그게 꼭 필요해요. 그 알뿌리는 원래 주인이 따로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대신해서 오랫동안 찾았던 것이고요."

 

여자는 더 할 말이 있지만 조금 아끼자는 심사를 내비치며 입을 살며시 다물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피디는 턱을 살짝 치켜들곤 으쓱거리며 여자의 축 처진 뱃살을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톡톡 건드리며 내려다보다가 사랑스럽단 표정을 가득 담아서는 여자를 올려다봤다.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 말씀 해주시죠. 그리고 그 알뿌리를 왜 그토록 찾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청자들도 알아야 하니까요."

할머니는 메모를 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제가 이 남자를 만나서 한창 열애 중일 때...이 남자가 살던 아파트 옆집에 어떤 아가씨가 살고 있었어요. 몇 번 복도에서 마주쳤는데..얼굴이 굉장히 창백하고 안색이 항상 어두웠어요. 어린 나이인데 혼자 사는 것 같아서 조금 불쌍하기도 했고...해변에 혼자 앉아서 고개를 묻고 우는 것을 여러 번 봤어요. 그러다가 얼마 쯤 지난 뒤부터는 말을 트고 지내게 됐죠. 처음엔 그 애가 극도로 사람을 꺼려했어요. 특히 낯선 사람을요..."

나는 순간적으로 눈앞에서 섬광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얘기하는 건....그 일기장과 관련된 내용 아닌가! 그럼 이 여자가 옆집의 그 음탕녀? 그렇다면 저 피디는..

 

여자는 자신의 빨간 하이힐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1999년 여름에 자신은 남자의 아파트로 짐을 완전히 옮기고 남자와 동거에 들어갔다고 한다.

 

'빨간 하이힐' 이 여자는 그때 당시 어떤 이유로 인해서 정신이 나간 듯이 심적 안정을 찾아 숨을 곳이 필요했고, 그게 저 피디였고, 그와의 성적인 집착에 탐닉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마음의 집을 얻은 셈이었다 말했다.

 

그리고 둘이 함께 살게 되면서 여자는 이른 아침에 나가서 늦은 저녁에 집에 오느라 자주는 아니지만 그 아가씨를 봤다고 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 저녁, 주홍빛 능소화가 만발한 아파트 앞 벤치에서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다. 저녁 무렵의 기분 좋은 바닷바람이 조금씩 밀려오는 언덕에는...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파도소리가 조금씩 밀려오고 익숙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쳐지나갔다. 멀리서 뱃고동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떠 보았을 때 스튜디오에선 이야기와 관련된 영상이 나가고 있었다.

 

바람결에 날리는 능소화 꽃잎 아래서 아가씨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조금 전에 스튜디오에 앉아있던 '빨간 하이힐'은 현재 보다 젊어 뵈는 얼굴로 곁눈질을 하며 자신도 아이스크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행복하세요?"

아가씨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조용히 묻는다.

"글쎄..아직은 행복하다고도 해야겠죠. 아직은.."

 

'빨간 하이힐'은 곁에 떨어진 꽃잎을 주워 모으며 별 시덥잖게 말하자 아가씨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더니 먼 곳으로 지그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저는요...이제 더 헤어나올 수 없는 진흙 속에 빠진 것 같아요. 빠져나가려고 애쓸수록 미친 듯이 발을 끌어당기는 물컹물컹하고 끈적한 진흙..어릴 적에 어떤 공터에 나무를 심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곳이 있었는데...저는 뭣 모르고 빠진 적이 있어요. 너무 무서웠고 지독하게 징그러웠죠. 그 물컹한 흙이 다리에 닿는 느낌이란...."

 

그리고 밤마다 꿈을 꿔요. 그 진흙 속에서 잃어버리고 온 샌들의 꽃 장식을 열심히 찾아 헤매는 꿈을요...열심히 있는 힘을  쥐어짜내서 진흙 속에 손을 집어넣어 봐도 그 끝없는 바닥의 깊이를 감당 할 수가 없는 거죠. 저는요..그 징그럽고 축축한 흙을 향해서 용기를 내어본 거라구요...하지만 아무것도 건질 수가 없었어요.

 

그리곤 꿈에서 깬 채 체념하고 주저앉아서 마냥 생각을 하는 거죠. 그건..남에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제겐 너무 선명히 잠재되어 있는 기억들이에요.

 

초등학교 1학년 봄에 담임선생님이 미술도구를 준비해서 어느 공원으로 집합하라고 반의 대표로 저를 호명했어요. 저는 순진한 마음에 '공원으로 미술도구를 왜 갖고 오라는 걸까?'하면서 궁금해 하죠. 선생님은 그저 '그곳에 가서 지시하는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만 하셨어요.

 

엄마가 그땐 바쁘셨기 때문에 버스로 열 정거장이 넘는 그곳까지 바래다 줄 수가 없었지요. 때마침 화판을 들고 공원으로 향하던 제 또래 소녀 두 명과 할머니가 집 앞을 지나가자 엄마는 그들을 따라가면 공원에 도착할 수 있다고 일러줘요. 너무나 다급하게. 그러면 내가 투정 부릴 여유가 없는 상황이 돼 버리는 거죠. '아! 저들을 놓치면 나는 오늘 공원으로 갈 수가 없다. 그러면 선생님 말씀을 거역하는 나쁜 아이가 되고 만다. 그럴 수는 없다!'하면서 정신없이 그들을 쫓아가는 거죠.

 

할머니의 손에 의지한 두 손녀가 열대어 가게의 수족관을 통해서 신비한 물고기 비늘색을 감상하거나 앵무새의 귀여운 울음소리에 즐거워할 때도 저는 멀찌감치 서서 내가 그들을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않도록 딴청을 부리다가 그들이 움직이면 정신없이 따라가는 거죠.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어린 여자애가 온 신경을 집중하고 그 붐비는 시장 길을 거쳐서 바짝 긴장한 상태로 근 두 시간을 걸어서 공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반은 넋이 나가있는 상태였고요. 하지만 아직도 하나의 산이 남아 있었어요. 왜 공원으로 가라고 했는지 어린 저의 상식으론 도통 알 수가 없던 그 비밀을 풀어야했으니까요.

 

그리고 꽤 비싼 돈을 내밀고 받아든 도화지 한 장과 열 가지 정도의 그림 주제가 적힌 종이를 받아들고서야 오늘 이 자리가 미술대회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늘이 갑자기 쏟아져 내리고 몸이 땅 아래로 꺼져버리는 기분에 사로잡히는 거죠. 그건 난생 처음 남에게 당해본 배신에 대한 처절한 아픔이라고 해야겠죠. 나는 단 한 번도 선생님께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오늘 나를 철저히 속였다는 생각에 분노와 억울함이 밀려들었지요.

 

그리곤 혼자서 한쪽 구석에 앉아서 엉망으로 주눅 든 아이가 그릴 수 있었던 것은 화지 가운데에 조그맣게 사람 두 명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었지요. 더 이상은 어떤 방법으로도 그림이 나오지가 않았으니까요.

 

이미 상처받은 내게서 그림은 그렇게 두렵고 아픈 존재로 다가왔어요.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로 시작됐기에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미술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지게 되었고, 더불어서 어린 시절의 그 괴로운 기억을 잊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버렸어요. 미술을 전공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결국에는 그 어린 날의 상처가 나를 평생 옭아맬 상처로 남고 말아버린 거죠. 실수로 진흙에 빠졌지만 용기를 내어서 내 소중한 것을 다시 찾아려고 그 무서움에 손을 집어넣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던 그때 처럼 말이죠."

 

아가씨의 옆모습과 오버랩 되어서 스튜디오 안의 우리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빨간 하이힐'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나는 그 아가씨가 미술을 했었단 사실을 알게 되자 호기심이 더욱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알뿌리, 분노의 술, 열망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무슨 관계가 있는거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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