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혼자만의 방... 사진은 예전에 강원도 원주 토지문학관에 들렀다가 박경리 작가의 살던 집에서 찍어 온 사진입니다...'방' 이미지가 따로 없어서...^^
▲ 혼자만의 방... 사진은 예전에 강원도 원주 토지문학관에 들렀다가 박경리 작가의 살던 집에서 찍어 온 사진입니다...'방' 이미지가 따로 없어서...^^
ⓒ 이명화

관련사진보기


머리통이 굵어지면서 혼자만의 공간이 절실했다. 연극놀이, 소꿉놀이 하며 놀다가도 이불장 안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던 것도 혼자만의 공간을 무의식적으로 갈망한 데서 나온 행동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학생이 되면서 언니와 내가 함께 쓸 수 있는 명목상의 공부방이 생겼다. 시도 때도 없이 동생들이 출현해 번잡스럽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부방이었다. 언니 책상과 내 책상이 나란히 벽 한쪽에 놓이고 제목도 낯선 책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던 것도 그때쯤이었나 보다.

둘만의 공부방은 둘만의 것이 되지 못했다. 나는 그때 '비밀의 정원'이 필요했다. 나는 생각다 못해 공부방 안쪽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다락방을 혼자만의 공간으로, 우리들의 방이 아니라 나만의 방으로 삼기로 했다.

나는 창가에 공부방에서 가져온 필요한 책 몇 권과 노트 등을 진열해 놓고 나 혼자만의 방으로 꾸몄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다락엔 어두워지면 촛불을 켜야 했고, 추운겨울이나 이른 봄, 늦가을 등 좀 쌀쌀한 날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하지만 난 다락방이 좋았다. 그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었고 나만의 것이었다.

가끔 다락방에 누워 창문 밖을 내다보면 사람 사는 이웃들 지붕과 텃밭, 마을을 감싸듯 펼쳐진 푸른 하늘이 가까웠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비 소리 를 들으며 시간가는 것을 잊었고, 여름밤이면 물댄 논에서 밤을 새워 울어대는 개구리들이 합창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의 행진, 잠 못 이루며 혼자만의 방, 나의 다락방에서 내 상상의 세계는 나래를 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의 부침이 많은 환경 속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할 땐 다락방에 숨어들었다.

결혼을 했다. '여자는 여자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결혼을 해서 결혼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죽어간다'고 했던 중학교 때 어느 선생님의 말이 생각난다. 너무 이른 결혼, 나는 내가 누구인지, 결혼이 무엇이며 여자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나의 올곧은 정체성이 확립되기도 전에 결혼을 했고, 결혼 생활 속에서 혼돈을 경험해야 했다.

준비 없는 결혼, 내 앞에 맞닥뜨린 결혼이라는 현실, 그것은 굴레였다. 시댁식구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생활이 모든 것이 미숙했던 내겐 버거웠나보다. 나는 어렸고 서툴렀고 미숙했고 긴장했고 짓눌렸다. 종가집 맏며느리, 그것은 내게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결혼 초기엔 매일 매식마다 뜨끈뜨끈한 밥을 지어서 상 차려야 했고, 다 함께 먹으면 좋으련만 밥 먹는 시간도 달라서 하루에 대여섯 번 이상 차려야 할 때면 밥상 차리다 하루가 가는 듯 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또 시댁을 빤히 아는 동네라 마음 터놓고 얘기 할 곳도 없었고, 여느 집 가정주부들처럼 수다로 풀지도 못했다. 집과 교회를 오가는 것이 내 생활 패턴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가끔 바라보았다. 그들은 쳇바퀴 돌 듯 하는 일상,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하루를 잘도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런 자각증상 없이, 그저 흐르는 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일까. 그냥 주어진 하루하루 적당히 무디어진 마음으로 흘러가면 남들도 내 자신도 편할 텐데.

하지만 나는 그렇질 못했다. 그것이 내가 나를 더 괴롭히는 것이었으리라. 때때로 나는 내 자신을 향해 물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로 갔을까?! ~의 며느리, ~의 아내, ~의 엄마, ~의 올케, ~의...그 많은 대명사들...내게 부여된 책임을 동반한 이름들 그 안에서 여기저기 사방에서 나를 향한 책임과 의무라는 이름은 있는데 보이지 않는 나, 내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책임과 의무의 이름들도 많아서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헉헉거렸고 내 영혼, 내 존재는 희미해지고 날로 파리해졌다. 단 한사람, 그 누군가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마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나, 두개의 나로 살았다. 혼자 있을 때면 내 밖의 나를 벗고 내 안의 나로 돌아왔다. 

어느 날 문득 이러다간 내가 질식해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내 존재가 산산이 흩어지리란 위기감, 꼴깍~숨넘어갈 것 같은 나를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책임과 의무의 굴레에서 빠져죽지 않는 비결, 사방이 막혀도 하늘을 향해 낼 수 있는 나의 창, 나의 숨구멍은 무엇일까. 그 하나의 푸른 창이 절실했던 내가 그때 생각한 것은 읽기와 쓰기였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절여놓은 배추처럼 축 늘어지던 몸과 마음. 나만의 시간이라야 그렇게 밤이 찾아오고 모두들 깊은 잠에 빠졌을 때에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밤의 정적이 찾아오고 내 분주했던 마음도 쉼을 얻었다. 비로소 가쁜 숨을 고르게, 느리고도 편안하게 내쉬었고, 내 마음에도 평안이 찾아오고 몸은 피곤해도 머릿속은 맑아졌다.

깨어있는 시간, 나는 책을 읽거나 일기장이나 습작노트에 내 속에 가득한 생각들, 말하지 못하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것들을 노트에 쏟아 부었다. 내가 나를 위해 낸 창문, 그 숨구멍은 내게 위로였고 나만의 성역이었고 나를 숨쉬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나날들을 견뎠다.

절실했던 마음이 낸 숨구멍, 그 비상구는 이젠 내 삶 속에 확장된 '문'이 되었다. 침몰해가는 내 자신을 붙들기 위해, 숨쉬기 위해, 나를 위로하기 위해, 또한 일상의 탈출구로 붙잡았던 책읽기와 쓰기, 그것 자체가 나의 삶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때 낸 문으로 오늘도 호흡한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내 삶에 중요한 부분이고, 일상 그 자체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만의 방이 필요하다. 더불어 살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과 여백이 필요하다. 타인과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나눔과 교제의 시간을 위해 혼자만의 방을 필요로 한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서로 더 사랑하고 존중하고 귀히 여김 받는 삶을 위해서도 혼자만의 방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시간으로 충일감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면할 수 있다. 혼자만의 방에서 자기충일감을 충분히 경험했으므로.


#혼자만의 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