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키모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한 자리에 모여서 5일 동안 그 사람의 일생을 소재로 얘기를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의 치열한 기억을 통해 죽은 사람의 일생은 가지런히 맞춰지고, 산 사람의 슬픔은 승화된다. 비슷한 이유에서일까. 오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가 가까워지면서 그를 다시 기억해내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깝게 지냈던 여러 명의 지인들이 떠올린 기억으로 구성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오마이뉴스>의 출판 브랜드 '오마이북'에서 펴낸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는 주변 사람들이 보고 느꼈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기록이다.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문성근, 문재인, 이정우, 정찬용, 정연주, 도종환, 박원순 등 10명의 저자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억과 '노무현'이라는 이름에 담긴 시대 정신의 가치, 우리 사회의 현 주소와 진보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담담하게 풀어냈다.
10명의 기억으로 노무현을 기록하다
지난 2009년 8월에 열렸던 '노무현 시민학교' 1기 강좌 내용을 묶은 이 책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현장성이다.
각각의 장은 각 분야를 대표하는 강사들의 경험과 기억, 자료를 버무려 놓은 강의와 400여 명에 달하는 청중들이 던진 예닐곱 개의 질의·응답으로 구성됐다. 구어체로 쓰여진 문장들은 현장에서 이야기를 듣듯이 쉽게 읽힌다.
노 대통령은 퇴임하고 나서 봉하로 가셨는데,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서 매일 몇 번이고 방문객들한테 인사 말씀을 하셨죠. 그 때문에 얽매여서 힘들다고 저희한테 하소연도 하셨는데요. 제가 보기엔 그러면서도 방문객들한테 인사 말씀하는 걸 참 좋아하셨어요. 자신도 모르게 말씀에 빠져서 방문객들 붙잡고 한 시간 넘게 이야기하기도 하셨고요. 때론 관광버스 타고 오신 연세 많은 분들 상대로 대학 강의하듯이 어려운 내용을 이야기하기도 하시고. (청중 웃음) -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해찬 전 총리를 비롯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노 전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던 참모들의 얘기에서는 대중이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노무현스러운' 일화들도 등장한다.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은 현실정치 참여 의사를 묻는 한 청중의 질문에 "정치는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고민하고 있다"며 노 전 대통령과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한다. 지난 2009년 4월 30일, 검찰청 출두를 앞두고 그는 정 전 수석에게 정치하는 것에 대한 착잡한 심경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날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정치인 후원회 행사를 열면 1년에 1000만 원, 2000만 원, 평소 한 번에 100만 원, 500만 원씩 후원하는 사람은 자꾸 곁에 오고 인사도 한답니다. 그런데 봉하 친구들, 어렸을 때 벌거벗고 미꾸라지도 잡고 놀던 친구들은 저쪽 귀퉁이 자리에 있대요. 부산 사하구에서 조그만 슈퍼마켓을 하면서 하루 매상을 10만 원이나 올릴까 말까 하는 친구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내 친구가 오늘 후원회 한다고 해서 가자는데 30만 원 가져갈까?… 10만 원이어도 될거야 무현이가 내 형편 잘 알지. 아니야 그래도 그렇지 50만 원은 가져가야 하는데…' 그러다 20만 원 가져와서는 당신 곁에 가까이 못 오고 귀퉁이에 있다가 손만 흔들고 간다는 거에요. 그러면 그걸 보고 대통령 억장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중략) 저한테 평소에는 "정 수석, 정치하시오" 하셨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정치하지 말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그게 저한테는 큰 반향으로 돌아옵니다. '인마, 사람 사는 세상을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이룰 수 있어? 인마, 사람 사는 세상을 울고 웃고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어?' 이런 가르침으로 자꾸 다가옵니다." 노무현 다룬 10개의 주제, 결론은 '깨어있는 시민'책 속에서 저자들은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꿈'(이해찬), '진보'(유시민), '분노'(문성근), '소통'(정연주), '얼굴'(도종환), '민주주의'(박원순), '경제정책'(이정우), '법치주의'(문재인), '인사·지역정책'(정찬용), '사람사는 세상'(한명숙)의 10가지 주제로 나누어 설명한다.
10명의 저자가 각기 다른 주제에 대해 얘기를 풀어가지만 책 전체의 고민과 결론은 하나로 모아진다. 저자들은 노 전 대통령의 인생을 설명하면서도, 지금 사회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꼽으면서도 공통적으로 '시민 참여'를 강조한다.
미국에 '무브온'이라는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1998년에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하고 바람피웠다고 탄핵될 때 보수 세력이 클린턴을 무너뜨리려 하니 클린턴을 지켜주자고 해서 생긴 단체입니다. 온·오프라인 활동을 아주 열심히 하는데 지금 회원이 약 500만 명 됩니다. 500만 명의 회원을 바탕으로 1998년부터 열심히 사람과 돈과 재능을 모아서 부시를 깨고 오바마를 당선시킨 일등공신이 무브온입니다. - 정연주 전 KBS 사장 '깨어있는 시민'. 이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화두이면서 그의 묘비에 새겨진 말이기도 하다. 그는 임기 후 봉하에 내려와 다양한 책을 읽고 학자 및 참모들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면서 '진보의 미래'에 대한 책을 집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초안을 다섯 번 고쳐 썼지만 '시민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끝부분 문구는 매번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왜 그렇게 시민에 천착했을까.
국민은 그냥 주어지는 거죠.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여권 국적란에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라고 그냥 주어지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국민이에요. 시민은 뭔가요? 자기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고 그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는 각성된 국민이 시민이죠. -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노 전 대통령은 '진보의 미래'에 이어 '시민'을 주제로 한 책을 쓸 계획이었다.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엮으려 했던 그 책에는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고, 권력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내용들이 담길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가 생각했던 '깨어있는 시민'은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찾고 올바르게 행사하는 시민',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시민', '학습하고 생각하는 시민'이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노무현 정신'은? "이제는 '완장'과 '만장'을 내려놓고 새로운 그 무엇을 들어야 할 때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 4월 20일 <오마이뉴스>가 주최한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특강'에서 "노 전 대통령의 1주기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장례는 끝났다. 노 전 대통령은 떠났고 남겨진 사람들은 살아가야 한다.
500만 명의 조문객이 애도했고, 1년 간 수십 종의 관련 서적들이 발간됐다. 그 치열한 '기억해내기'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열망하는 것."(이해찬)"의로움과 이로움이 충돌할 때 의로움을 위해 이로움을 버릴 수 있는 삶의 자세."(유시민)"우리 공동체를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굴복하지 않고 싸운다."(문성근)"권위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탈권위, 자율의 가치와 정신을 실천하는 것."(정연주)"원칙을 지키고 불위에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 깨어있는 시민으로 거듭나자."(도종환)"또 다른 세상을 향한 포기하지 않는 원칙."(박원순)"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물려줍시다."(이정우)"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특권·반칙 없는 사회를 위한 투쟁."(문재인)"정직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서럽고 억울하지 않은 세상 만들기."(정찬용)"국민에 대한 무한 신뢰, 소통과 화합의 정신."(한명숙)정답은 다양하다.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를 쓴 10명의 저자들 역시 노 전 대통령의 빈자리에 남겨진 '노무현 정신'에 대해 각자 조금씩 다른 해석들을 내놓았다. 열 줄 해석이 빚어낸 노 전 대통령의 이미지에 '내가 생각한 노무현 정신'을 한 줄 더해보고 생활에서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 책이 그의 1주기에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