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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에 개봉한 영화 <작은 연못>은 한국전쟁기 미 공군 전폭기의 폭격과 미 육군의 집중사격으로 수백 명의 민간인이 죽임을 당한 비극적인 현대사를 뛰어난 영상미와 함께 진지하게 그려내고 있다. 올해가 한국전쟁 60주년이고, 민간인 학살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대중의 인식 지평을 넓혀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는 증언으로만 전해져 오던 그때의 지옥과 같던 현장을 영상으로 재현함으로써, 전쟁의 참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전후세대에게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영화 속 폭격 장면과 다리 밑에서 미군의 표적이 된 채 수차례의 집중 사격을 받는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순간이다.

 

  이 글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미군은 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피난민 대열에 무차별적인 학살을 저질렀을까? 너무나도 당연한 이 물음은 전후 반세기가 지나서야 던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대답을 회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남의 땅 이라크에서 '오폭'을 해대며 민간인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이런 연유로 이 글은 앞의 물음에 대한 답, 즉 영화 <작은 연못>이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이야기는 한 젊은 연구자의 소중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였다.

('노근리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www.nogunri.net 참조)

 

2

 

김태우는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 연구』(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8년)를 통해, 미군이 한국전쟁 동안 실시한 폭격정책의 실상을 면밀하게 밝혀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노근리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민간인에 대한 폭격은 미 지상군을 근접지원하려는 목적에서 수행된 전술항공작전으로서, 전술항공통제시스템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술항공작전(Tactical Air Operations)이란, 적 지상군과 그 지원 시설의 발견 및 파괴, 제공권 확보 등을 위하여 육군 또는 해군과 협력하여 벌이는 공군작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미 공군의 전술항공작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용되는가? 한국전쟁기 전술항공작전의 실제 운용은, ① 전폭기 운용에서 공항 관제탑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전술항공통제센터(Tactical Air Control Center, TACC), ② 전선에서 지프를 몰고 다니며 목표물을 지정해주는 전술항공통제반(Tactical Aircraft Control Parties, TACP), ③ 공중에서 비행을 하며 목표를 지정해주는 모스키토 공중통제관(TAC Mosquito), ④ 전폭기 등의 상호연계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전폭기는 전투폭격기의 줄임말로, 공중전 임무 및 지상공격임무를 동시에 수행 가능한 다목적 군용 항공기를 일컫는다. 인류 문명의 최첨단 과학기술이 군사부문에서 활용되어 탄생한 살상 무기인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기 미 공군 전폭기의 전술항공통제시스템 

 

전폭기

출격(무기장착)

비행부대

 

귀환(무기소비)

 

 

폭격

 

공격

통제

유도 통제

 

 

 

출격 지시

 

목표

 

 

모스키토

공중통제관

 

 

 

 

요청,

임무협조

 

요청,

임무협조

 

 

연대/사단

전술항공통제반

 

전술항공

통제센터

 

요청

 

참고: 노근리사건조사반, 2001, <노근리사건 조사결과 보고서>, 30쪽

 

  위와 같은 전술항공통제시스템을 통해 미군 전폭기들은 현지의 지상 또는 공중통제관의 폭격지시가 내려질 경우, 해당 목표물이 민간인으로 의심되거나 확인된 경우조차도 어김없이 폭격을 수행했다. <작은 연못>에 등장하는 전폭기에 타고 있던 조종사들은 지상에서 활동하는 전술항공통제반 또는 모스키토 공중통제반의 지시를 받고 철길 위의 피난민들을 향해 미사일과 기총을 난사했을 것이다.

  실제 한국전쟁기 전폭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딘 헤스(Dean E. Hess)는 자서전(『Battle Hymn』, McGraw-Hill Book Company, 1956)을 통해, 자신이 모스키토 공중통제관의 지시에 따라 피난민을 공격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모스키토 통제관은 진주와 마산 사이의 주도로에 있는 병력들을 공격하라고 지시했으며, 딘 헤스는 지시에 따라 도로 위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그런데 헤스가 공격 직후 확인한 바로는 그들은 모두 피난민들이었다. 저공 저속을 비행하는 프로펠러기 T-6을 조정했던 모스키토 공중통제관은 분명 전폭기 파일럿보다 더 정확하게 도로 위 사람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피난민 대열에 대한 공격을 지시했고, 전폭기 조종사는 주저하지 않고 폭격을 가했던 것이다. 딘 헤스의 고백에는 명령에 따른 불가피한 행위였다는 자기 합리화가 전제되어 있다.

 

3

 

  적이 아닌 민간인들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작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상부의 명령과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AP통신은 1950년 7월 25일 미 제5공군 작전부장 터너 로저스(Turner C. Rogers)에 의해 작성된 「Policy on Strafing Civilian Refugee(민간 피난민 기총소사 정책)」라는 문서를 발굴해냈다.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 7월 25일

팀버레이크(Timberlake) 장군에게

제목: 민간 피난민 기총소사 정책

Ⅰ. 문제점

1. 도로로 이동하는 민간 피난민에 대한 제5공군 예하 부대의 기총소사 공격 지침의 수립

Ⅱ. 문제점과 관련된 사실들

2. 북한군으로 구성되어 있거나, 북한군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많은 민간인들이 미군 진지로 침투한다는 보고가 있다.

3. 육군은 미군 진지로 접근하는 모든 민간 피난민들에게 항공기로 기총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4. 현재까지 공군은 미 육군의 요청에 응해왔다.

Ⅲ. 토의

5. 민간인들에 대한 기총 공격을 포함하는 우리의 작전은 광범한 대중의 관심을 받을 것임에 틀림없고, 이런 상황은 UN과의 관계에서 미 공군과 미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 것이다.

6. 이러한 민간인 집단들은 미군 진지를 통과하여 도로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다. 육군이 왜 이러한 인원들을 막지 않고 이들이 통과할 때 사격을 실시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항공작전에는 좀 더 적합한 표적이 있을 것이며, 이러한 표적이 파괴되면 결국 유리할 것으로 판단된다.

Ⅳ. 건의사항

7. 공군의 보호를 위해서, 제5공군은 민간 피난민 무리 속에 북한군이 포함되어 있거나 또는 이들이 적대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을 경우에는 민간 피난민들을 공격하지 말라는 지침을 수립할 것을 건의한다.

8. 또한 상기 내용을 미 8군사령부에 통보할 것을 건의한다.

터너 로저스(Turner C. Rogers) 대령, 작전부장.

 

  위 문서는 1950년 노근리 사건이 발생한 7월 25일 이전부터 미 공군은 육군의 요청에 따라 피난민 대열을 향해 기총소사를 가했음을 밝히고 있다.(Ⅱ-3, 4) 특히 이 자료는 제5공군 정보부장과 함께 남한지역 전술항공작전을 책임졌던 제5공군 작전부장이 작성한 문서였고, 수신자 역시 제5공군 부사령관 팀버레이크였다. 작전부장 로저스는 피난민 대열에 대한 기총소사가 외부에 알려질 경우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Ⅲ-5) 중지를 건의하고 있다.(Ⅳ-7) 미군 스스로도 피난민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부당한 행위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간인 공격 작전에 대한 명확한 근거 문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1년 한미합동조사단이 발표한 <노근리사건 한‧미 공동발표문>에서는 "미 공군 조종사 출신의 증언자들은 그러한 지침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내용을 묵살해버렸다. 미국 정부의 무책임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조차 외면하고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진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왜곡되고 있다. 이 밖에도 한국전쟁 초기의 미 제5공군 임무보고서와 당대 실시된 조종사들의 인터뷰는 무차별 폭격을 증명하고 있다.(김태우 박사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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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최첨단의 군사기술을 바탕으로 한 전술항공통제시스템을 통해, 공식적인 군사작전의 수행 차원에서 적이 아닌 민간인들을 무차별 공격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 미군이 주장하는 대로 전시 군사작전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한 부수적인 피해로 규정하고, 거기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란, 미군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정당한 군사목표가 아닌 사람들이나 사물들에 대해 비의도적 혹은 우발적으로 입힌 상해(injury)나 손해(damage)"를 의미한다.

  백번 양보해서, 미 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이 '학살'이라기보다는 '작전'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사실상 한국의 모든 주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취급한 학살행동이다. 실제 미군 전폭기 조종사들은 민간인들을 '적군의 지원세력' 이나 '위장한 적군'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서 자신들의 무차별 공격을 정당화하고 있다. 또한 민간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한 이면에는 한국인에 대한 미군의 인종주의적 편견도 작용하고 있었다.

  나아가 작전이 수립되고 수행되는 과정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과연 민간인 공격 작전이 이 불가피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인 학살행위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특히 1950년 7월 11일 전북 익산지역에 대한 미 공군 B-29기의 폭격은 전쟁 발발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아직 주민들이 전쟁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며 피난 가는 사람 하나 없는 평화로운 상황에서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1950년 8월 초순에 발생한 경남 창녕, 마산, 사천 지역의 폭격 역시 아직 인민군이 이 지역 근처에도 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세적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작전 행동이었다는 것은 학살에 대한 책임과 반성 없는 미군 측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전쟁에서 민간인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학살을 정당화하는 무리들이 있다. 전쟁의 '기술'은 문명의 진보와 함께 더욱 교묘하고 지능적으로 변해왔지만, 이러한 미명 하에 치러진 전쟁은 훨씬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전쟁 중인 적국의 국민이라도 민간인은 함부로 죽일 수 없으며, 또 적군이라도 항복 의사가 분명하면 처형할 수 없는 것이 국제법의 기본이다. 영화 <작은 연못>에서 실감나게 그려진 피투성이의 악몽이 단지 한국전쟁에서 뿐이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영화 <작은 연못>이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역사의 재구성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반전평화의 실천적 메시지까지 던져준 것이 아닐까.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휴전중인 분단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 세대에게 전쟁의 본성과 함께 양심의 실천적 행동까지 촉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태그:#작은 연못,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노근리사건, #미군 군사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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