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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내리쬐는 봄볕에 온몸을 내맡긴 채 걷고 싶었다. 코를 벌름이며 화려한 봄꽃에 그저 취할 수 있는 산길이라면 더욱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올봄을 꼭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 

황매산 철쭉 군락지에서. 
 황매산 철쭉 군락지에서.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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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나는 경남사계절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황매산(1108m) 산행에 나서게 되었다. 경남 합천군 대병면, 가회면과 산청군 차황면의 경계에 있는 황매산은 아름다운 철쭉 군락지로 유명하다. 아침 7시에 마산서 출발한 우리 일행이 산행 들머리인 대기마을(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에 도착한 시간은 8시 50분께였다.

오랜만의 산행으로 몸은 좀 무거웠지만 마음은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즐거웠다. 군데군데 피어 있는 연홍빛 산철쭉꽃들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매바위 , 하트바위, 칠성바위 등 생김새가 독특한 바위들이 산행의 재미를 더해 주었다.

매바위(왼쪽)와 하트바위(오른쪽) 
 매바위(왼쪽)와 하트바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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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스러운 위엄이 서려 있는 누룩덤.  
 신비스러운 위엄이 서려 있는 누룩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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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누룩덤에 이른 시간이 9시 45분께. 대기마을에서 1.4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신비스러운 위엄이 서려 있는 누룩덤을 올려다보니 왜 그리 가슴이 콩닥콩닥하는지. 우리 인간이 대자연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 주는 듯했다.

나는 웅장하고 경이로운 누룩덤을 지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828고지를 향해 계속 걸었다. 오전 10시 20분께 828고지에 도착했는데, 그곳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감암산(834m, 경남 합천군), 부암산(695m, 경남 산청군) 정상에 이르게 된다. 아름다운 산철쭉을 보기 위해서 나는 초소전망대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10분 정도 가면 천황재가 나온다.

칠성바위(오른쪽) 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산객들. 
 칠성바위(오른쪽) 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산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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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을 즐길 수 있는 구간! 
 스릴을 즐길 수 있는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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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산행 때 왠지 쓸쓸하던 천황재 풍경이 산철쭉꽃의 화려함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예뻐 보였다. 산철쭉 꽃밭에서 몇몇 등산객들이 함께 사진을 찍으며 깔깔대는 소리에도 행복이 묻어 나왔다. 천황재에서는 꽤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는데, 15분 정도 올라가면 바위를 타야 하는 구간이다.

길이는 짧은 편이나 로프를 잡고 오르는 곳이 두 군데이다. 잠시나마 스릴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금물이다. 깎아지른 벼랑에 서 있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할 수도 있다. 그곳에 서면 아스라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고 조망이 탁 트여 기분도 상쾌하다.

화사한 봄날 같은 이 나무가 지금도 그립다.
 화사한 봄날 같은 이 나무가 지금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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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남짓 걸었을까, 화사한 연분홍 꽃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그런데 그 나무를 쳐다보면서 이영애와 유지태가 출연한 <봄날은 간다(2001)>라는 영화가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화사한 봄날이 연상이 되던 그 나무가 지금도 그립다.

혼자서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날 불렀다. 같은 차를 타고 온 일행이었다. 그들과 맛있는 점심을 했다. 사실 도시락을 챙겨 오지 못해서 방울토마토로 대충 허기를 때울 작정이었다. 산을 타는 여자 분 가운데 살림꾼이 많다. 그들이 준비해 오는 음식 맛은 환상적이라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나는 초소전망대 쪽으로 올라갔다. 등산객뿐만 아니라 꽃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려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먼지가 폴폴 날려 입을 손으로 가리고 걸어야 했다. 전망대 철쭉 군락지에 도착한 시간이 낮 12시 10분께. 올해는 이상 기후와 잦은 비 탓으로 개화 시기가 예년에 비해 많이 늦어졌는데, 황매산 봄의 절정은 이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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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연홍색 물감을 뒤집어쓴 듯 내 몸도 연붉게 변해 가는 것 같았다.
 마치 연홍색 물감을 뒤집어쓴 듯 내 몸도 연붉게 변해 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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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락지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수록 마치 연홍색 물감을 뒤집어쓴 듯 내 몸도 연붉게 변해 가는 것 같았다. 이 세상 너머의 하늘 꽃밭이 이런 모습일까. 온통 연붉은색 세상이었다. 꽃들이 내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듯하고, 손을 내밀어 꽃을 살짝 어루만지려 들면 금세 내 손에 연홍색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 김준태의 '감꽃'

한동안 그렇게 드넓은 산철쭉밭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있다 어느새 뜬금없는 생각에 빠져 들었다. 세상살이가 고달픈 요즘 같으면 솔직히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실컷 세어 봤으면 좋겠지만, 먼 훗날에 나는 과연 무엇을 세고 있을까. 설마 황매산 산철쭉밭의 연홍빛 낭만을 나이 먹었다고 잊어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손을 내밀어 꽃을 살짝 어루만지려 들면 금세 내 손에 연홍색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손을 내밀어 꽃을 살짝 어루만지려 들면 금세 내 손에 연홍색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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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에 돛을 달고 떠나가는 배와 흡사한 모산재(767m, 경남 합천군) 황포 돛대바위 쪽으로 하산을 했다. 황매산 철쭉 군락지로 가기 위해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아 모산재에도 사람들이 몹시 북적댔다. 꽃도, 사람도 어우러지니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 하루였다.


태그:#황매산산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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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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