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시가 지난 이슥한 밤. 세자빈이 유폐되어 있는 후원별당. 매봉에서 울던 부엉이도 잠들었는지 고요하다. 사위(四圍)는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있건만 별당의 등촉은 가쁜 숨에 흔들리고 있다.
"마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 흐흑."시종 형란이 울부짖었다.
"마마! 힘을 내십시오. 흑, 흑, 흑."비지땀을 흘리던 세자빈이 의식을 잃고 말았다.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이다. 불수산(佛手散)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별당에선 사치스런 약재다.
"마마! 정신을 차리십시오. 정신을..."당황한 형란이 세자빈의 얼굴을 흔들어 보았으나 의식의 끈을 놓아버린 강빈은 미동도 없다. 이럴 때는 나삼(羅蔘)이 특효인데 안타깝다. 덜컥 겁이 난 형란이 세자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귀를 댔다. 심장은 뛰고 있었다.
몽롱한 의식속에서 만난 지아비,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다. 그 사이를 벌 나비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노닐고 있다. 낙원이 이런 세상일까. 향기가 피어오르고 폭신하다. 얼마쯤 갔을까. 세자가 하얗게 웃고 있다. 가까이 가면 점점 멀어진다. 종종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저하! 신첩이옵니다.""어서 오시오. 빈궁. 왜 이렇게 늦었소?""늦다니요? 왜 소첩 홀로 두고 가셨습니까? 야속합니다."세자빈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빈궁이 곧 뒤 따라 오리라 믿었소.""원손과 석견, 석린은 어떻게 하구요?""그 아이들도 곧 뒤 따라 올 것이오.""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저하께서 우리들 곁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아귀들이 넘실대는 세상으로 왜 다시 돌아간단 말이오. 이승의 미련일랑 강물에 띄워버리고 어서 빨리 오시오." 세자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저하! 너무 힘듭니다."애원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빈궁! 힘을 내시오."세자가 강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얼굴을 묻고 싶다. 따뜻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오열하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가면 갈수록 세자가 멀어져 갔다.
의식을 되찾은 세자빈은 행복한 얼굴이었다"저하! 저하!!"허공을 휘젓는 세자빈의 손을 형란이 잡아 주었다.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여기가 어디냐?"혼절에서 깨어난 세자빈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네, 후원 별당입니다.""그렇구나. 내가 잠시 정신을 놓았나 보구나."좌우를 휘둘러보던 세자빈이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실수록 힘을 내셔야 합니다.""저하도 그리 말씀하시더구나.""네? 승하하신 세자 저하께서요??""그렇단다. 잠시 혼절한 그 사이에 저하를 만났단다."세자빈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그려졌다. 그것은 행복한 웃음이었다.
"저하와 함께 구름 위를 걷는데 그렇게 푹신하고 편안할 수가 없더구나. 계속 걷고 싶었는데 돌아와서 안타깝구나.""그리 좋으셨어요?""이승도 저승도 아닌 딴 세상 같았다. 그런 세상에서 세자저하와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힘을 내라고 하시면서 손목을 잡아주는데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자신의 손등을 만져보던 세자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도 잠시, 또다시 통증이 밀려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세자빈이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거의 같은 시각. 하복부를 가로막고 있던 그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며 보가 터졌다. 거듭 비명을 지르던 세자빈이 하초에 피를 쏟으며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그 순간, 세자와의 사랑의 증거물이 세상에 나왔다.
만인의 경하를 받아야 할 회임, 그녀에겐 악재였다왕비와 세자빈이 회임하면 임신 3개월부터 세상과 담을 쌓고 태교에 들어가는 것이 궁중법도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늘 정숙을 유지하며 왕실을 이어갈 왕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이 소일이다. 여기에는 지아비와의 잠자리도 금지된다. 후궁의 존재 이유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 유폐되어 있는 세자빈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을 지켰다. 단, 그것이 자의에 의한 지킴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유폐였기에 정신적으로 피곤했으며 마음고생이 심했다.
5개월부터는 육선을 피하고 콩으로 만든 음식과 채소를 상식했다. 건강한 왕자를 낳기 위한 섭생이다. 별당에 유폐된 세자빈은 영양과잉은 언감생심.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이 제공 되었다. 자신의 영양실조는 물론 태내의 생명도 심한 발육부진을 겪었다. 죽지 않고 태동하는 것이 기적이었다.
7개월이 접어들면 산실청이 설치되었다. 산실청에는 도제조와 권초관이 임명되며 내의원의 의관과 의녀가 배치되었다. 즉, 왕비와 세자빈의 임신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중대 사항이라는 의미다. 허나, 강빈은 만인의 경하를 받아야 할 자신의 회임 사실을 밝히기는커녕 불러오는 배를 감추느라 전전긍긍했다.
산기가 있으면 산실이 마련되었다. 맨 아래에 짚을 깔고 가마니 위에 초석을 깔았다. 그 위에 양모자리를 깔고 기름먹인 장판을 깔았다. 흘러내린 분비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다. 그리고 백마 가죽을 깔았다. 순수의 색 백색과 양기의 상징 백마의 기를 받아 출산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자리가 마련되면 북쪽 벽에 최생부(催生符)를 붙였다. 순산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장치다. 마지막으로 천정에 사슴 가죽으로 만든 고삐를 매달면 준비 끝이다. 이러한 호사는 호란이 일어나던 병자년, 석철을 낳을 때 이외에는 누려보지 못했다. 세자빈이 유폐되어 있는 별당에는 이 모든 것이 사치에 불과했다.
세자빈이 혼절하여 의식불명 상태다. 그렇다고 어의를 부를 수도 없다. 세자빈은 죄인 신분으로 후원 별당에 유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켜보고 있는 형란은 무엇을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덧붙이는 글 | 불수산(佛手散)-산모가 아기를 쉽게 낳도록 하는데 쓰는 탕약(湯藥). 태반을 줄어들게 하는 효과가 있다.
나삼(羅蔘)-인삼을 빻아 체에 거른 가루. 원기가 쇠진하여 힘이 부칠 때 달여 마시는 약재. 산모에게 많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