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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들.   이들 책 맨 뒷면에는 '우리의 맹세'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오래된 책들. 이들 책 맨 뒷면에는 '우리의 맹세'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 김관숙

늘 아들방에서 책들을 빼다가 읽고는 했는데 오늘은 내 작은 책장속이 들여다 보고 싶어졌습니다. 오래된 책들을 만나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간들이 일 주일에 평균 두 권 정도씩은 채워지고 있는 아들방과 달리 내 작은 책장속은 십여 년째 그대로입니다. 아들방에서 책들을 빼다가 읽는 맛때문에 거의 방치한 상태이기도 하지만 책장이 작아 더는 책들을 넣을 수도 없습니다. 또 특별히 구입해서 읽고 싶은 책도 없는 데다가 신간 구입비도 만만치가 않아서 싫던 좋던 그냥 아들방에서 빼다가 읽고는 합니다.

그러다가도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무엇 때문에 내 작은 책장문을 열어 오래된 책들을 꺼내 보고는 합니다. 오래된 책에는 많은 추억이 어려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다가 작은 추억 하나를 만나서 웃다가 보면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고 또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이 행복하고는 합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책장 한 쪽에 있는 그 오래된 책들을 보자마자 불현듯이 흑백 사진 한 장이 눈앞을 지나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무슨 기념식날에 마이크를 잡은 선생님과 함께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우리의 맹세'를 열창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뿐입니다. '우리의 맹세'라는 제목만이 생각이 날 뿐 뭐라고 열창을 했는지 그 전문이 하나도 생각이 안났습니다. 그 어린시절에 자꾸 헷갈리기만 하는 구구단도 외워야 했고 '우리의 맹세'도 줄줄 외워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맹세' 전문은 누가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어린 나는 한눈에 그 뜻을 알았습니다. 한국전쟁이 지나가고 고통스럽고 힘든 피난살이에서 돌아와 보니 서울거리는 폐허가 되다시피하였고 이웃은 절절한 아픔까지 당했습니다. 자연히 구구단보다 더 쉽게 외워졌습니다.

우리의 맹세 전문입니다 푸슈킹(푸시킨) 시집 뒷면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맹세 전문입니다푸슈킹(푸시킨) 시집 뒷면에 있는 것입니다 ⓒ 김관숙

헬만헤세의 청춘시대 그 뒷면에도 있습니다. 너무 흐려졌습니다
헬만헤세의 청춘시대그 뒷면에도 있습니다. 너무 흐려졌습니다 ⓒ 김관숙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책 뒷면에 것도 흐림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책 뒷면에 것도 흐림니다 ⓒ 김관숙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서울이 세계적인 도시로 변모해서 그 폐허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눈부신 세상에서 나는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구구단을 잘 외우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줄줄 흘러나오고는 합니다. 그런데 구구단 보다 더 쉽게 외우던 '우리의 맹세' 전문은 아주 하얗게 다 잊어버렸습니다. 내가 생각을 해도 어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맹세 전문은 당시 교과서뿐만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나오는 모든 책들의 맨 뒷면에 인쇄되어 있고는 하였습니다. 지금 세대들은 그런 게 있었다는 것조차도 모를 것입니다.

생각이 난김에 오래된 책들을 모두 꺼내어 놓고 하나씩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책들은 지금처럼 지질이 좋지도 않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데다가 간수를 잘못한 탓인지 빛이 누렇게 바랬고 겉표지도 저절로 떨어져 있고 건드리면 부서질 것만 같이 온전치가 못합니다. 냄새도 납니다. 그나마 몇 권만이 남았습니다. 빌려간 이가 돌려주지 않은 것도 몇 있고 또 수 없이 이사를 다니는 중에 상자채로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춘원 이광수의 순수 시집인 '사랑' 을 펼쳐 보았습니다. 역시 책 맨 뒷면에 '우리의 맹세'가 인쇄되어져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보는, 디지털카메라에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주 흐릿하게 빛이 바랜 그 전문을 보자 만감이 교차합니다. 읽고 또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한국전쟁이 지나간 그 시절이 떠오르면서 가슴속이 뭉클거려졌습니다.

한국전쟁이 지나간 그 어려운 시절을 지혜롭게 헤쳐나온 것은 내가 아니라 이제는 거의가 저 세상에 살고 있을 듯한 내 부모님 세대입니다. 어린 나는 병아리처럼 부모님의 따뜻한 품에서 무서운 한국전쟁을 보았고 부모님이 어떻게 어렵게 돈을 벌어 어린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 보냈는지를 보았을 뿐입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맹세' 전문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모든 이에게 조국수호의 정신과 애국심을 길러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뒤 평화로운 세상이 다가오는 눈부신 빛이 보이자 어느 날부터인가 말도 없이 슬며시 출판되어 나오는 모든 책들의 뒷면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시절에 용돈을 아껴서 샀습니다 바로 위에 우리의 맹세 전문이 있는데 너무 흐려서 디카에 잡히지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 용돈을 아껴서 샀습니다바로 위에 우리의 맹세 전문이 있는데 너무 흐려서 디카에 잡히지가 않았습니다. ⓒ 김관숙

단기 4288년 발행한 춘원의 '사랑'은 450환입니다. 그 시절에 그 가격은 싼 것이 아니었습니다. 용돈을 아끼고 아껴서 샀습니다. 푸시킨 시집은 700환입니다. 푸시킨 시집 맨 뒷면에도 '우리의 맹세'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푸시킨에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는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즐겨 암송을 하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희망을 가지게 해주었기때문입니다. 전기 사정이 좋지가 않아 등굣길에 타고 가던 전차가 정전이 되어 십 분, 이십 분씩 멈추고는 해서 지각을 해도 단발머리 소녀이던 나는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가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는 것이려니' 라는 구절을 생각하면서 위안을 받고 예쁜 희망을 꿈꾸고는 했습니다. 

나는 이런 저런 그 시절 이야기들이며 '우리의 맹세'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자식들에게도 내 주변에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꺼내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 것도 같고 또 듣는다고 해도 요즘같이 앞만 보고 달려가도 살기 힘든 세상에 건성으로 들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맹세'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한국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휴전상태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국전쟁을 어렸을 때 만난 나도 휴전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먹고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잊어먹지 않고 살아왔다면 나는 아마도 지난 세월보다는 조금 다르게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힘든 고비가 있을 때마다 남편을 탓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이나 소중하게 생각을 하면서 조금 더 아껴쓰고 조금 더 성실하고 조금 더 겸손하고 조금 더 남을 배려하고 조금 더 나누면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보니 헤르만 헷세의 청춘시대, 푸시킨시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무기여 잘있거라, 로미오와 줄리엣, 좁은 문, 죠르쥬 상드의 마귀의 늪 등에도 '우리의 맹세'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허이옇게 바래어져서 잘 알아볼 수없는 글자가 많습니다. 세월이 그냥 흘러가지만은 않았습니다. 내 머리를 하얗게 바래어 놓은 것도 모자라서 책들도 글자들도 한껏 빛을 바래어 놓고 달아났습니다.

오래된 친구같은 책들 꺼내어 볼 때마다 추억이 새롭습니다
오래된 친구같은 책들꺼내어 볼 때마다 추억이 새롭습니다 ⓒ 김관숙

어느틈엔가 햇볕이 방안에까지 들어왔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비로소 나는 아득한 추억속에서 걸어나왔습니다. 바스라질 것같고 온전치 못한 책들을 조심스럽게 챙겨서 다시 책장속에 넣어두고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오늘은 작은 추억 하나를 만난 기분이 들지를 않았습니다. '우리의 맹세'를 외우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나를 훤히 알고있는 오래된,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가 헤어진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기분전환을 할 겸, 아들방으로 책을 하나 빼러가면서 생각을 해봅니다. 누군가가 내게 오래된 친구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웃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그 오래된 책들을 하나 하나 불러 볼 것입니다. 사랑, 좁은 문, 무기여 잘있거라, 청춘시대, 푸시킨시집----. 책을 유난히 좋아하는 아들에게도 오랜 친구같은 그런 책이 하나 있을려나.


#우리의 맹세 #오래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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