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1 토슈즈를 신은 심청기사의 제목을 써놓고 나니 뻘쭘하다. 세계화에 맞서는 우아한 방법(?)이라. 공연 리뷰를 기대한 이들이 의아해할 것 같다. 그러나 당당히 말하련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심청>은 우리의 전통적 단아함을 서양의 문법을 빌려 말하되, 이제 문법의 '독'으로부터 탈피한 작품이라고.
발레는 철저하게 서양의 산물이다. 그리스 신화 속 무용을 관장하는 여신 테르프시코레의 현신으로부터 시작, 13세기 이탈리아 궁중에서 통치를 위한 방법으로, 화합과 용서를 구하는 메시지를 발전시키며 탄생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발레의 기초가 되었다.
발레는 철저하게 닫힌 체계를 지향한다. 기본동작을 수천 번 반복하며 기예에 가까운 정확성을 가진 몸을 가진 무용수를 탄생시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발레공연 레퍼토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러시아 작품이 대부분이다. 서양인의 신체구조와 그 형상에 따른 육체미를 균제한 형식이다 보니, 동양의 발레리나가 극복해야 할 한계들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의 전래 이야기 <심청>을 공연한다는 것은 발레작품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태도와 정서를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 된다.
전통적 작품을 서구의 예술언어로 재현할 경우, 제약요소가 많다. 특히 이야기를 함부로 재구성하거나, 극적 요소를 선별해서 드러낼 경우 원형을 깨뜨렸다는 말을 듣기 일쑤다. 이야기 구조를 따라 무대를 여러 개 만들면, 관객이 이야기를 따라가다 균형감과 긴장을 잃기도 쉽다.
고전 발레들은 대부분 오페라처럼 거대한 스펙터클의 무대를 만들기 일쑤인데, 심청의 경우 심청이 살았던 마을의 모습, 인당수에 빠지는 모습, 용궁과 연꽃, 다시 뭍으로 나와 궁전에 들어가기까지, 무대의 변화가 잦다. 연극만 해도 원형돌출 무대를 중간에 삽입해서 처리라도 한다. 하지만 발레는 무용수의 발 움직임을 위해 이런 장치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번 심청은 3막 구조로 되어 있다. 이야기 구성과 더불어 무대장치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극 구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제약 요인들을 극복하고, 우리의 전통 심청을 발레로 올리기까지, 1986년 초연 이래로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극의 버전도 바뀌었지만 무엇보다 디지털 세대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은 실제 무용수들이 물 속에서 발레하는 모습을 담아 재현했다. 한국적 단아함이 물빛 아래 발산되는 순간이었다. 놀라웠다.
인당수로 뛰어내리는 장면은 이번 발레의 압권이다. 휴머니티를 상실한 무용이 한국의 전통적 메시지를 담아내면서, 강력한 춤의 효용성을 되찾게 되었다는 점이다. 발레공연은 특히 무용수들의 의상이나 무대조성 방식을 기호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된다. 정교하고 섬세하게 옷의 주름 하나하나를 표현해야 하고, 우아함이 무용수의 몸동작과 맞물려서 극단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번 <심청>은 지금껏 발레단이 수많은 해외 공연을 통해 축적한 극에 대한 심도깊은 이해와 서양관객의 미적 코드를 한번에 드러낸다. 시행착오의 과정도 있었을 거고, 관객의 감성을 읽는 인식의 지형도를 그리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제대로 해냈다. 꾸준하게 서양의 발레문법을 우리의 것으로 개조하고 조명해 낸 결과다.
한국적 스토리를 알리기 위해, 과감하게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연출의 용기도 높이 살 만하다. 깔끔하지 않으면 서양관객은 몰입하지 않는다. 뱃사람들의 군무를 역동적으로 처리해서 남성적인 매력을 한껏 드러낸 것도 극의 장점 중의 하나다. 궁중에서 왕과 함께 추는 이인무도, 안무가의 상상력이 전통극 심청의 행간을 메워낸 산물이다. 춤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서양의 문법을 한국적으로 조율해낸 순간이었다.
게다가 한복을 입고도 발레를 할수 있다는 것. 한국의 전통춤사위를 발레에 덧입혀, 서양발레의 한계를 오히려 넘을 수 있었다는 점은 높이살 수밖에 없다. 한국의 미를 '한의 세계'로 국한지으려는 식민사관적 사고의 덫에서 탈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했을지를 가늠케 한다.
서양의 문법을 우리의 것으로 확실하게 만들 때, 전통 춤사위를 오히려 덧입혀 서구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무기로 쓸수 있다. 문제는 이 단계까지 거쳐야 할 수정과정이 꽤 많고, 내부적인 반대의견도 많았을터.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한국의 창작발레로서 선보인 <심청>은 2001년 뉴욕 링컨 센터와 워싱턴 케네디 센터, 등 미국 최고의 극장 흥행을 휩쓸며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 레퍼토리로 성장했다.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세계가 평평하다며 글로벌리즘을 말하는 이들에게, 이제 역으로 우리의 심청이 한발을 내딛는다. 그 평평한 무대 위로 토슈즈를 신고 걸어간다. 서구인들을 사로잡으리라. 기대하라.
덧붙이는 글 | 유니버설 발레단의 <심청>은 5월 24일 부터 30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