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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모내기
ⓒ 박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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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댄 논에 이앙기가 지나가면 가지런히 줄지어선 모. 절반 쯤 물에 잠긴, 풀보다 작은 모를 보면 쌀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다. 무릇 씨앗은 작아도 씨앗이 싹터 자라면 수백 배의 열매로 수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사람들은 수확의 기쁨이 곧 희망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는다.

해변이면서도 산중이었던 내 고향은 논보다 밭이 많았다. 때문에 보리밥, 서숙밥(조밥)을 지겹게 먹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밥에 섞인 쌀은 어찌 그리 눈에 잘 띄었던지!

할아버지에게 쌀농사는 신앙이었다. 지방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우리 고향에서는 곡우 그러니까 4월 중순 무렵 쟁기로 엎은 무논 귀퉁이를 매끈하게 다듬어 모판을 만들었다고 기억한다. 쟁기질을 못하셨던 할아버지는 경험에 의한 이론만으로 가장 확실한 농부였다.

못자리를 만들면 할아버지는 좋은 날을 받아 곳간에 아껴둔 볍씨를 내어 볕을 쪼였다. 그리고 '옴박지'라고 불렸던 옹기 함지에 깨끗한 물을 절반쯤 담아 소금을 묽게 풀었다. 튼튼한 종자를 가리고 볍씨를 소독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손가락으로 간을 보던 분도 할아버지였다. 그건 벼농사의 여정을 알리는 시작이기도 했다.

물에 담가 둔 볍씨에서 싹이 나오면 모판으로 옮겨 고루 뿌리는 일도 할아버지의 허락 없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볍씨는 싹이 트면 "모"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우리 고향에서는 한 달 쯤 자란 모를 묶는 일을 "모를 찐다"고 했다. 찐 모를 모춤(?)이라고 했던가.

이앙기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모판을 만드는 일, 모를 찌는 일, 모춤을 정식으로 이앙할 논에 바지게로 옮기는 일도 사람의 품을 들이는 일이었다. "이종"이라고 했던 모내기를 하는 날 새참에 넋이 팔려있을 시절이었으니,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지게 뒤를 쫓아가면서 어른들이 힘이 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모내기는 신나는 행사였다. 못줄 잡은 어른들의 육자배기, 농짓거리, 그리고 할머니가 걸러낸 막걸리에 평소 먹을 수 없었던 새참. 지나가는 객까지 불러 못밥을 나누어 먹었던 풍속에 모가 잘 자라 풍년이 되기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신앙의 의미도 있었음을 안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뜨거운 여름 서너 차례의 김매기, 입추 무렵의 피사리는 나의 관심 밖이었다. 품앗이나 두레가 협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농사의 어려움을 덜기 위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였음을 안 것도 먼 훗날의 일이었다.

가뭄에 물대기, 많은 비에는 물 빼기. 병충해, 가뭄과 홍수를 이겨냈는가 싶으면 다가온 태풍은한 순간에 자란 벼를 논바닥에 눕혔다. 벼 세워 묶기, 달려드는 참새를 쫓으려고 세웠던 허수아비, 누렇게 살이 오른 메뚜기….

자연의 힘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알면서도 주술적인 기원을 담아 극복하려고 했던 할아버지를 이해할 쯤 이미 할아버지는 이 세상 분이 아니었다. 기쁨의 표현도 절망의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숙명으로 받아들이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모든 실패를 내 탓으로 돌리면서 체념하는 한국인의 지난 날 모습이었지 않았나 싶다.

모가 자라면 벼가 되고 벼가 패면 나락이 되고. 익은 벼를 묶어 볏단이라고 했다. 볏단을 집으로 져 날라 홀태에 훑어 나락과 볏짚을 분리하고 나락을 찧으면 쌀이 되고. 이제 모 심기에서 탈곡까지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듯 모든 과정이 기계로 처리된다. 들뜬 모내기의 장면은 찾을 수 없고 논둑에서 꼴베는 모습도 찾을 수 없고 김매기는 제초제가 대신한다.

벼농사는 온대 문순 기후에 속하는 우리나라 기후에 맞을 뿐 아니라 다른 작물에 비해 소출량이 많다. 그래서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주곡으로 자리 잡았는지 모른다. 수전이라는 논 답(畓)자가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벼농사의 중요성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년 중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힘들게 노동하여 얻은 쌀, 쌀은 생명의 원천인 밥이었다. 쌀밥은 가정집 제사에서 조상님의 신위에 가장 가까이 올려 졌던 제물이었고, 기우제 등 마을의 제사, 국가의 제사에도 쌀밥은 빠질 수 없는 으뜸의 제물이었다.

개인에게는 부의 상징이었고 사회적으로는 화폐를 대신하는 교환수단이었고, 국가 조세의 기본이었던 쌀. 그러나 이제 쌀은 부의 상징이 아니다. 나라에서도 귀찮은 짐이 되고 있다. 

식량 자급률이 30%도 안 되는 나라. 그러면서 남아도는 쌀과 떨어지는 쌀값을 걱정하는 나라. 20kg의 쌀이면 한 끼니 평균 식사에 소용되는 쌀을 100g으로 계산하면 밥이 200공기가 나온다.

200공기면 한 사람이 세끼를 다 먹을 경우 66일을 먹고, 4인 가족이 16일 먹을 수 있는 양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경우 점심은 밖에서 먹는 경우가 많아 하루 2끼만으로 계산했을 때 거의 한 달을 먹을 수 있다는 결론인데, 20kg 한 포에 약 5만원, 한 끼니 쌀 한 공기의 값이 약 300원으로 한 끼니 4인 가족 식사에 소요되는 쌀값은 약 1200원이 되는 셈이다.

1200원으로 4인 가족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식품은 무엇이 있을까? 껌 한통도 300원으로는 어림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언론은 다른 물가 역시 상대적으로 낮은 중국과 비교하여 우리나라 쌀값이 국제 시세보다 높다고만 한다. 4인 가족이 한 달에 먹는 쌀값이 5만원이라면 과연 국민 소득이 2만 달러인 현실에서 주곡인 쌀값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은 편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앞으로 중국인들의 소득이 높아지고 쌀 소비량이 늘면 중국은 쌀 수입국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보인다. 쌀값이 국제 시세보다 높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공산품 가격도 국제 시세에 비해 낮은 것이 거의 없다는 주장도 들린다. 나 역시 유독 국제 시세보다 낮은 쌀값임을 강조하는 것은 농민 죽이기의 또 다른 음모라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기계화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벼농사는 품이 많이 든다. 계절적인 요인 때문에 자연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그나마 한쪽에서는 4대강 죽이기를 하면서 강 주변의 기름진 옥토를 정부가 앞장서 갈아엎고 있다. 농민의 설자리가 좁아지는 것이다. 점점 줄어드는 농촌 인구, 늘어나는 폐가, 그리고 사라진 아이들의 웃음소리…….

모가 심겨진 논을 본다. 이제 모내기는 더 이상 쌀밥이 신앙이었던 시절처럼 희망을 심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기원을 담은 주술적인 의례도 없다. 마을 노인들도 자기들이 먹고 자식들에게 주기 위해 모를 심는다고 한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논을 놀릴 수 없어 마지못해 짓는 농사. 논을 보는 마음이 쓸쓸해지는 까닭은 들판에 모심는 떠들썩함이 사라진 때문일까? 쌀이 나오는 과정도, 밥의 소중함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모가 심어진 논둑길을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부도 꼭 농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식량이 무기화될 수 있는 시대를 대비하여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농업정책을 세워야 할 때다. 또 남아도는 쌀을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쌀을 매개로 민족 소통의 단초를 열었으면 하는 소망도 덧붙여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모내기, #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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