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달 29일(토) 오후 아내와 함께 공주를 갔다. 공주 공산성 안에 있는 '영은사'라는 사찰에서 열리는 4대 종단(천주교·불교·원불교·개신교) 연대 '금강 지키기 선언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또 한 번의 먼 길 출타를 결정하기에는 약간의 고민이 있었다. 지난해 11월부터 노친께서 병상생활을 하게 된 이후로는 거의 먼 길 출타를 하지 않아, 먼 길 출타를 자제하거나 기피하는 것이 어느덧 '관성'이 된 상태이기도 했다.
우선 5월 29일은 태안성당 '성모의 밤' 행사가 거행되는 날이었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지지난해 병상생활을 하던 때를 제외하고는 5월 성모의 밤 행사에 참례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천주교 신자에게는 성모의 밤 행사도 중요한 신앙 예절이었다. 그런 행사에 올해 처음으로 참례하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내게 시집오기 전까지 '성모 공경'이 없는 개신교 신자로 살았던 아내는 성모 공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성모의 밤 행사에 나보다 더 열성적이었다. 그런 아내도 동행을 해야 하니(역시 처음으로 부부 모두 본당 성모의 밤 행사에 빠져야 하니) 성모님께 대한 죄송스러움도 있고, 이상한 허전함도 가슴 한구석에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당마다 갖는 5월 성모의 밤 행사는 매년 되풀이되는 연례행사라는 점을 위안 삼기로 했다. 성모의 밤 행사가 연례행사인 반면에 '금강 지키기 선언대회'는 언제 또 있을지 기약이 없는 행사다. 또 매우 절박한 사안이기도 하다.
결국 성당 성모의 밤 행사 참례를 올해는 거르기로 하고, 언제 또 가지게 될지 기약이 없는 채로 절박하기만 한 '금강 지키기' 행사에 참가하기로 결정을 볼 수 있었다.
<2>
먼 길 출타에는 당연히 세 가지 '손실'이 따르기 마련이다. 시간 쓰고, 돈 쓰고, 고생하는 것…. 나는 오래 전부터 '행동하는 양심'에는 그 세 가지 현실적 손실이 결부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해 왔다. 현실적으로 당장 보상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결정적인 보상은 있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시간 쓰고 돈 쓰고 고생하는 그 '투자'는 결국 내가 하늘에 쌓는 보화일 터였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매사에 하느님을 생각하거나 결부시키는 버릇이 있다. '이런 일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판단하시고 행동하실까?'라는 생각도 많이 한다.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자는 다짐도 하곤 한다. 또 '이런 일도 하느님께 점수를 얻는 일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하느님의 점수'를 의식하는 것은 관성 속의 무의식, 또는 무의식 속의 관성일 법도 하다.
아무튼 나는 '행동하는 양심'에 따르는 세 가지 투자도 결국은 '하느님의 점수'를 얻는 일이고,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확신이 나를 이끌어주고 밀어준다는 생각도 한다.
시간에 맞추어 먼 길 출타를 하자니 좀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저런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고, 오후 1시쯤 노친이 계시는 요양병원을 갔다. 마트에 들러 과자 한 봉지를 사 가지고 가서 병실 할머니들께 고루 나누어 드리도록 요양사에게 맡겼다. 그리고 어제 새로 근무를 시작한 요양사에게 특별한 부탁 한 가지를 했다.
"내가 오늘 저녁에는 병원에 오지 못하니까요. 우리 어머니 의치 빼드리는 일을 여사님이 해주셔야겠어요. 어머니가 이제는 스스로 의치를 끼우실 수 있지만, 스스로 의치 빼는 일은 내가 못하게 해요. 여사님에게도 맡기지 않고 내가 매일 저녁마다 와서 내 손으로 의치를 빼드리는 이유가 있어요."
노친은 위 앞니 두 개가 빠졌다. 양쪽에 의치 고리를 걸 수 있는 이만 남아 있다. 의치 착용에 꼭 필요한 그 두 개의 이도 언제 빠지거나 부러질지 불안한 상태다. 하나라도 빠지면 의치의 고리를 걸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내가 저녁식사 후 의치를 뺄 때 각별히 조심을 한다(아침과 점심식사 후에는 빼지 않고 저녁에만 뺀다). 양손 엄지로 의치 고리가 걸린 이를 살짝 받치고 검지 끝으로 가만가만 고리를 벗겨야 한다.
내 손으로 의치를 빼드리는 이유와 조심스럽게 의치 빼는 요령을 설명하니, 요양사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뺀 의치를 깨끗이 씻어다가 소독 상자에 넣는 일은 설명할 필요 없고….그리고 나는 또 한 번 노친께 오늘 오후 부부 함께 공주에 가는 이유를 설명 드렸다. 노친은 이해하고 동의하는 기색이면서도 걱정을 했다.
"또 경찰이 막는 건 아녀? 그런 일에 너무 앞장은 서지 말어. 나이도 있구 허니께…."
"그런 걱정은 마세요."
곧 병실을 나온 나는 아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로 가서 교문 앞에 나와 있는 아내를 태우고 곧장 공주로 달렸다.
<3>
금강변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놓고, 잠시 처가에 들러 혼자 집을 지키시는 장인어른께 꽃게 2㎏가 든 상자를 건네 드리고, 우리 부부는 걸어서 공산성으로 갔다. 오랜만에 금강다리를 걷자니 옛날 신혼 시절의 추억이며 깊은 감회가 가슴을 뻑뻑하게 했다.
일제 때 지어졌다는 공주 금강의 첫 번째 다리였다. 차량은 강북에서 원래 도시인 강남으로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한 일방통행이었고, 그 옆에 인도가 있었다. 분리대로 보호 받고 있는 인도를 따라 금강다리를 건너며, 우리 부부는 다리 위에서 양쪽의 강바닥을 보며 가슴을 쳤다.
여러 대의 굴삭기와 덤프트럭들이 부산하게 준설 작업을 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강은 이미 처참한 형태였다. 밤낮없이 강바닥을 파내는 준설작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댐 수준의 보를 만들기 위한 기초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강이 아니었다. 무서운 속도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일 뿐이었다. 장구한 세월을 안고 흘러내리며 신비한 자연의 질서 속에서 무수한 생명들을 잉태케 해주고 물과 양식을 공급해준 자연생태 자체였던 강이 기계문명의 이기들을 앞세운 인간들의 무분별한 오만과 탐욕으로 무참하게 난도질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물주의 창조 질서를 표징하며 자연생태계의 생명력을 끊임없이 발현해내는 것으로 존재하는 강을 저토록 난자질하는 인간들의 오만과 탐욕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방자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연유로 나타난 것일까?
도대체 MB로 하여금 이런 짓을 하게 만든 근원적인 이유는 뭘까? 그는 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고 민족의 평화통일을 지향할 수 있는 토대 쪽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수만 년의 역사와 삶의 숨결을 안고 흘러내려온 우리의 아름다운 강들을 무차별 파괴하고 변형시키는 일에만 광적으로 집착하는 것일까?
북한 땅에는 우리의 토목기술이 필요한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토목공사 영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왜 그쪽으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우리의 멀쩡한 강들을 난자질하고 죽이는 사업 쪽으로만 올인 하는 것일까?
이게 어떻게 백년대계일 수 있는가? 백년대계를 세우는데,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민주적 절차는 밟았는가? 백년대계의 준비 기간은 얼마였는가? 환경영향평가 등 사전 타당성조사는 어떤 식으로, 얼마나 시행했는가? 일방적으로 순식간에 결정하고, 속도전 식으로 밀어붙이는 이 다짜고짜 사업이 어떻게 백년대계란 말과 어울릴 수 있는가?
끝내 공사를 강행하여 물이 흐르지 않는 강 아닌 강, 기괴한 형태의 도가니들을 만들어 놓은 후, 조물주의 창조 질서를 거스른 업보, 자연의 징벌이 갖가지 형태로 이 땅에 나타나게 될 때, 그 책임은 누가 지는 것일까?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이미 땅속에 묻히고, 이무 죄 없는 우리의 후손들이 고스란히 그 업보를 물려받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암담해지는 심경이었다. 우리 부부는 금강다리 중간에 서서 양쪽의 공사 현장들을 내려다보며 복받치는 심정으로 한숨을 쉬어야 했다. 사람들은 우리 부부 곁을 그저 무심히 지나갔다. 허나 무심한 듯 보일 뿐이었다. 무심한 듯 보이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공사 현장을 보기가 역겨워 외면하는 '기운'도 도사려 있음을 나는 진작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4>
공산성 안의 영은사 앞에는 이미 200명 가량이 모여 있었다. 4대강 파괴사업을 반대하는 말과 그림들이 새겨진 T셔츠를 판매하는 이들도 있고, 가슴에 부착하는 배지들은 무료로 나누어주고 있었다.
불교 스님, 원불교 교무님, 개신교 목사님 외 몇 분이 나란히 서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정식 행사가 시작되었다. 마곡사에서 오신 스님과 대전에서 오신 원불교 교무님, 또 대전의 한 교회에서 오신 목사님이 차례로 '연대사'를 발표했다. 발표 중간 중간에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기도 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님을 대신하여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이 나와서 연대사를 발표했다.
개신교 목사님의 기타 연주와 노래, 원불교 교무님의 대북공연, 중요무형문화재인 노(老) 스님의 고전무용, 시낭송, 대전 '빈들교회' 어린이들의 무용체조와 사물놀이, 두 어린이의 연극 한마당, 공주대학교 사물놀이패의 공연 등이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들은 300명 정도로 늘어났다. 어린이들과 중·고생들도 꽤 많았다. 나는 프로그램에 빠져들고 쉽게 동화되면서도 자주 관객들의 모습을 살피곤 했다. 다른 참가자들의 모습에 자주 눈을 주곤 하는 것은 내 오래 된 버릇이었다.
존경스럽고 사랑스러운 감정 때문이었다. 그들에게서 '행동하는 양심'의 실체를 보는 느낌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들 모두도 '행동하는 양심'의 실천을 위해 시간 쓰고 돈 쓰고 고생하는 사람들이기 까닭이었다.
그들은 보면 절로 마음이 흐뭇해지고 행복해진다. 보면 볼수록 존경스럽고 사랑스러워진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내가 그들 속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영광스러워진다.
한편으로는 야릇한 연민도 있다. 그들로 하여금 시간 쓰고 돈 쓰고 고생하게 만드는 것, 그 동인(動因)은 또한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 얼마나 많은 고뇌와 슬픔을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일까? 각자 그것의 질량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기본은 거의 동일한 것일 터였다.
참가자 모두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 그리고 야릇한 연민도 함께 하는 특이한 마음 때문에 나는 더욱 '동화(同化·同和)의 경지를 얻을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 동화 속에서, 나는 더욱 크게 오래 손뼉을 칠 수 있었다. 소리도 크게 지을 수 있었고, 더욱 절절히 노래도 부를 수 있었다.
두 어린이의 연극 한마당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라는 시였다. 참가자 모두가 절절한 소리로 함께 노래를 불렀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사행시로 된 노래를 참가자들은 세 번이나 거듭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노래 부르기를 마치고 나서 눈물 닦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았다. 나도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2시간이 넘게 진행된 행사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참가자 모두가 함께 하는 퍼포먼스였다. 강에서 사는 갖가지 물고기와 패류, 물새들의 형상을 한 팻말들을 하나씩 들고 영은사 경내를 한 바퀴 돈 다음 여러 곳 지정된 장소에다가 형상의 머리가 금강을 향하도록 팻말을 땅에 꽂는 것이었다.
그 퍼포먼스를 마친 참가자들은 모두 금강 쪽을 행해 섰다. 한창 파괴 공사가 진행 중인 금강을 바라보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굴삭기들과 덤프트럭들을 향해 주먹을 들고 일제히 큰소리로 외쳤다.
"4대강 사업 중단하라!"
"금강을 죽이지 마라!"
"4대강 파괴정권 심판하자!"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며, 오늘의 이 투쟁은 결코 일회적인 것이 아님을, 앞으로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것임을 모두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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