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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지원은 광주 중심지에서 직선으로 불과 15km 정도 임에도 광주에 비해 확실히 추운 곳이다. 겨울이 빨리 오고 봄은 더듬거리는 곳, 그러다 훌쩍 여름이 오는 곳이다. 평소에도 광주 집보다 개화 시기가 1주일 정도 차이가 난다. 아마 광주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때문일 것이다.

 

그런 숙지원에 지난 겨울은 유난히 길었고 비도 잦았다. 예년에 비해 모든 작물이 1주일 정도 늦었다. 그래도 매화 향기와 자두꽃 향기는 전과 다름없었다. 자두꽃과 거의 같은 시기에 피는 분홍빛 앵두꽃은 하나하나 보면 볼품이 없지만 꽃이 핀 나무 전체로 보면 꽃다발처럼 풍성하고 화려했다.

 

출발은 괜찮은 것처럼 보였다. 매화 열매인 매실은 이미 알려진 대로 쓰임새가 다양하고, 자두는 여름 과일로 사랑을 받는다. 빨갛게 익은 앵두는 보기도 좋지만 그냥 먹으면 상큼하고 술을 담가도 그 빛이 환상적으로 곱다.

 

그러나 지난 4월에는 몇 십 년 만에 눈이 내리고 영하를 맴도는 희한스런 자연의 변덕에  인간의 기대란 그저 꿈일 수밖에 없었다. 열매가 생기던 매실은 눈에 녹았고, 자두 꽃은 추위에 얼었다. 때문에 추위가 지난 후 매실과 자두는 눈을 덜 맞은 나무 아래쪽에만 몇 개 남았다.

 

그나마 4그루의 앵두는 마치 불임의 나무가 된 것처럼 완전히 전멸이다. 벌이 돌아다닐 수 없었던 봄. 날아다니던 벌조차 꽃에 붙어 얼어 죽었다는 추위에 사람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오직 조금 늦게 꽃이 피어 봄의 추위를 빗겨간 보리수만이 그런대로 제구실을 하고 있었다. 보리수하면 떠오르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나무지만 사실 우리나라 보리수는 보리가 필 무렵 익는 과일이라 하여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고장에서는 보리수는 '포리똥'으로 더 알려진 나무이다.

 

보리수의 꽃을 보면 은은한 은색으로 눈에 띄게 화려하지 않으나 기품이 있다. 꽃이 지면 푸른 열매가 맺히는데 열매는 꽃이 진 후 한 달쯤이면 빨갛게 익는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숙지원의 경우 예년 경험으로 볼 때 6월 초순이면 앵두와 함께 따먹을 수 있다.

 

그러나 추위를 겪은 보리수라고 이변이 없을 것인가! 몇 개 맛을 본 아내는 대뜸 지난해보다 알이 작은 것 같다고 했다. 지난 가을 퇴비도 충분히 주었고 작년에 비해 열매의 수량이 많은 것 갚지도 않은데? 그러면서 지난해 6월 2일 찍어 둔 사진과 비교해 봤으나 아내의 직감을 뒷받침할 근거는 될 수 없었다. 다만 현재의 모습은 작년보다 열흘 이상 늦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덜 자랐음에도 바쁘게 익어가는 보리수!

 

오래전 칠산 바다나 연평도 부근에서 잡힌 조기 중 알을 밴 조기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알을 낳기 위해 서해안을 따라 올라오던 조기들이 동지나해에서 무차별 남획되는 바람에 조기들도 인간의 횡포에 맞서 본능적으로 종족보존을 위해 자라기 전에 짝짓기를 한 탓이라는 해설이 인상적이었다.

 

또 섬진강 다슬기와 참게도 점차 알을 배는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의 약탈에 대항 하듯 스스로 진화하여 종족을 보존하려는 조기나 다슬기는 사람의 욕심이라는 덫에 걸려 조혼을 강요당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리수는 인간에 의한 피해자는 아니다. 심술을 부렸던 자연의 횡포에 굽히지 않고  제한된 시간에 맞추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자연이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신의 분신인 열매를 떠나보낸다. 보리수는 그 시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바쁜 것이다.     

 

아무리 시간과 경쟁을 하는 보리수이지만 보리수나무는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이상과 꿈을 실현한다는 미명 하에 남을 쫓아다니며 해치고 짓밟지 않는다.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숙지원의 나무들을 본다. 그 나무에서 바쁘게 익어가는 열매들을 본다. 마지막 남은 열매가 익을 때쯤 더듬거리던 봄날도 추억의 나이테로 남으리라. 문득 떠오르는 생각. 내 시계는 지금 몇 시인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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