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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온 지 벌써 사흘째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처럼 하루하루 설레고 즐겁지만 금세 '뒷장'이 돼버리는 시간의 흐름이 아쉽다. 하지만 별수 있나, 쏜살 같이 가는 시간이 선명하게 기억되도록 알차게 채우는 수밖에. 

셋째날


신칸센을 타고 혼슈에서 규슈로 이동해 왔다. 티켓 한 장 가격이 1만 4천80엔이나 했다. 대략 그 반값에 고속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그러려면 10시간도 넘게 이동해야 했다. 경비 절감보다 어머니의 체력과 일정을 고려해야 했다. 

 오사카에서 후쿠오카(하카타)로 이동하는 신칸센 차표.
오사카에서 후쿠오카(하카타)로 이동하는 신칸센 차표. ⓒ 이명주

오후 1시경 후쿠오카 하카타역에 도착. 오사카 우메다역을 출발한 지 3시간 만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어머니를 대기실에 남겨놓고 호텔을 예약하고 왔는데 역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상황인즉, 나갈 때 검표원에게 표를 주며 "어머니를 모시러 올 거다. 나중에 들여보내달라" 설명을 했는데 바로 그 당사자인 여직원이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이었다.

"당신한테 분명 표를 줬다" 몇 번을 말해도 "노(No)!", 이 한마디로 묵살했다. 사나운 표정의 여직원과 동행해 어머니를 만나는 것까지 성공했지만 두 사람 표가 있어야 보내준다고 했다. 이미 본인이 회수해간 표가 나한테 있을 리 없고, 게다가 속사포처럼 내뱉는 현지어를 이해할 수 없어 "니홍고 데키마셍(일본어를 못합니다)"이라고 해도 '그건 네 사정'이란 태도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 여직원이 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머니와 나를 근처 안내소로 인도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내가 다시 한번 상황 설명을 했고, 데스크에 있던 한결 호의적인 남자직원이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도 좋다"고 답했다. 허탈해서 몸이 휘청했다. 그때까지 옆에 서 있던 여직원의 뺨이라도 내려치고 싶었지만 어머니도 계시거니와 이국의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숨 돌리고 생각하니 하루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상대하는 그녀 직업의 애환도 이해가 됐다.  

무려 1시간이 넘는 소동을 치르고 역을 벗어났다. 하지만 이것으로 액땜이 된 건지 다른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우리가 묵은 호텔부터가 그랬다. '골든위크(공휴일과 주말이 붙은 주말)'를 맞아 근처 모든 숙소가 초만원이었는데 역에서 5분 거리의 중급호텔에서 토요일 할인가가 적용된 트윈룸(8000엔)을 구한 것이다. 게다가 시내구경을 하다보니 마침 이틀 후가 이 지역 대표축제 '하카타 돈타쿠'의 개막일이었다. 

 구시자 진자 안에 있는 야마가사. 어른 키 서너 배쯤 되는 크기로 7월의 '하카타 기온 야마가사' 축제에서 이 야마가사 빨리 옮기기 경기가 열린다.
구시자 진자 안에 있는 야마가사. 어른 키 서너 배쯤 되는 크기로 7월의 '하카타 기온 야마가사' 축제에서 이 야마가사 빨리 옮기기 경기가 열린다. ⓒ 이명주

그리고 진정 행운이라 할 만한 일이 점심
식사를 하던 중 일어났다. 호텔 맞은편 식당에서 고기덮밥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한국사람이네?" 하셨다. 허기를 채우는 데 급급해 처음엔 무슨 말씀인가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바로 옆에 한국인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피로가 심해 모른 척 할까 싶었지만 유용한 현지정보를 얻을 수 있을 듯해 말을 걸었다. 오고간 대화의 핵심은 그들이 선교를 위해 5년 전 일본에 왔고 후쿠오카 공항 근처에 숙소가 있으니 원하면 하루 2000엔에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의 닷새 일정이 끝나면 홀로 3주 정도를 더 머물러야 하고 벌써 꽤 많은 현금을 써서 슬슬 걱정이 되던 차였다. 게다가 후쿠오카 물가가 꽤 비싸 웬만한 게스트하우스 가격이 오사카나 교토의 두 배였다.

그런데 하루 2000엔이라니! 어떻게 도심 한가운데서 너무나 적시에 이들을 만난 건지 생각할 수록 신기했다. 되짚어보면 역에서 그냥 무사히 나왔다면 없었을 일이다. 이래서 세상일 한치 앞을 모른다 했나 보다. 그렇게 해서 다음날 그들과 만날 시각을 정하고 식당을 나왔다.

오후에는 하카타역 인근을 걸어서 구경했다. '만교지절'과 '구시다진자', '하카타마치야 후루사토칸'을 차례로 봤는데 하타카(후쿠오카의 옛 지명. 현지에선 여전히 이 지명이 통용되고 있다)를 대표하는 신사인 구시다진자만이 볼 만했다. 특히 7월 지역축제인 '하카타 기온 야마가사'에 실제로 쓰이는 원색의 화려한 야마가사가 인상적이었다.

첫날 관광은 이쯤 해서 끝내고 간단히 장을 봐서 숙소로 왔다. 저녁은 사발면으로 때웠는데 면이 익는 동안 어머니께서 슈퍼에서 사온 왕단무지를 과자처럼 맛있게 드셨다. 면 위주에 찬이 적은 현지음식이 영 입에 안 맞으신 듯 했다. 칼이 없어 주고받으며 한입씩 먹다보니 새삼 별미다 싶었다.

 하카타를 수호하는 대표 신사인 구시다진자는 가와바타 상점가 초입 캐널시티 구름다리 앞에 있다.
하카타를 수호하는 대표 신사인 구시다진자는 가와바타 상점가 초입 캐널시티 구름다리 앞에 있다. ⓒ 이명주

넷째날

눈을 뜨니 몸이 무겁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신 듯 "여행이 사흘쯤이면 딱 적당하겠다" 하셨다. 전날까지는 거금을 들여 후쿠오카에 왔으니 속된말로 '뽕을 뽑자'는 심산이었는데 날이 밝고보니 그보다 휴식이 절실했다.  

어머니와 오늘 하루는 맘껏 쉬자는 데 합의를 하고 'ㄴ'자로 맞닿아 있는 각자의 침대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푸짐한 식사를 하고 11시쯤 외출을 했다. 원래는 덴진에 가려 했으나 가까운 하카타 시내를 하루 더 보는 걸로 했다. 아직 둘러볼 곳이 많았다.

 캐널시티에 있는 '백남준 비디오아트'
캐널시티에 있는 '백남준 비디오아트' ⓒ 이명주
숙소에서 나와 어제 봤던 구시다진자를 지나 '하카타 캐널시티'에 갔다. 캐널시티는 온갖 브랜드의 의류점과 장난감 가게, 음식점, 호텔 등이 모여있는 거대 복합상가인데 쇼핑엔 관심이 없지만 이곳에 있는 '백남준 비디오아트'를 실제로 보고 싶었다.

오전 시간인데도 건물 안은 인파로 북적였다. 때마침 인공운하에서 '춤추는 분수'의 댄스와 이어 외국 밴드의 공연이 시작됐다. 백남준 씨의 작품은 1층 안내데스크 상공 벽면에서 현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적합한 장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비유하자면 도심 교차로 같은 곳에서 빳빳하게 각잡힌 제복과 검정 선글라스로 무장한 퇴역군인을 만난 듯 했다. 고유한 임무는 사라지고 그저 눈요깃거리로 전락한 그런.

점심은 캐널시티의 유명한 '라멘스타디움'에서 먹을까 했지만 끝이 안 보이는 대기자들에 질려 돌아섰다. 대신 건물 밖으로 나와 커리전문점 '코코'에서 커리덮밥을 먹었다. 이 집의 장점은 전국 체인점이라 일본 전역에서 이용할 수 있고 덮밥 위에 올릴 수십 가지 재료를 선택할 수 있으며, 특히 커리 만큼 맛있는 무 장아찌를 무한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우연히 접어든 골목에서 일본식 정원 라스쿠이엔을 보고 어느 이름 모를 신사를 거쳐 호텔로 돌아왔다. 숙소를 제공하기로 한 선교사 일행과 약속한 시각이 가까워서였다. 

오후 2시, 어제 본 여자 간사와 앳돼 보이는 또다른 여자 두 명이 차를 몰고 호텔 앞으로 왔다. 그리고 후쿠오카 공항을 지나 차로 10여 분쯤 간 곳에 선교사 합숙소가 있었다. 내부가 일반 주택과 다름 없는 가건물이었는데 우리가 사용할 곳은 방 두 개에 주방을 겸한 거실, 세탁실과 욕조까지 딸린 2층 전실이었다. 이런 곳을 하루 2000엔에 빌려주다니, 후쿠오카에서 '이게 웬 하나님의 은총인가' 싶어 얼떨떨했다.

 하카타 시내에서 만난 '개 같은 고양이'
하카타 시내에서 만난 '개 같은 고양이' ⓒ 이명주
점심을 만들어먹고 짧은 낮잠을 즐긴 뒤 다시 집을 나섰다. 오후엔 서일본 제일의 유흥가라는 나카스를 찾아 '야타이(포장마차)'에서 군것질도 하고 야경을 즐겨볼 참이었다. 하지만 해가 길어진 탓에 야타이가 불 밝히길 기다리는 일은 포기하고 대신 노을지는 후쿠오카 강변을 거닐었다.

한편 후쿠오카 강변으로 통하는 가와바타 상점가에선 희한한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일명 '개 같은 고양이'로 일단 고양이들의 체격이 남달랐다. 여지껏 보아온 고양이들과는 달리 체격이 여느 개 만큼이나 우람하고 다부졌다.

게다가 보통 개들이 담당하는 경호역할을 그들이 담당하는 듯 보였다. 다리가 불편한 한 여인이 개와 고양이를 태운 유모차에 의지해 걸어오는데, 우람한 고양이가 마치 "비켜주세요"라고 하듯 행인들을 향해 목청껏 '야옹' 거렸다. 반면 귀를 늘어뜨린 개는 기죽은 표정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게 다였다. 

이렇게 해서 나흘째 날도 저물었다. 내일 이 시각이면 어머니는 곁에 안 계실 것이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땐 닷새도 길게 느껴졌는데 정말 눈 깜빡할 새 시간이 지나갔다. 일본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는 마지막 밤이다. 햇살과 바람을 만끽하며 함께 걷고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으며 친구처럼 수다를 떨고 그저 존재감으로 마음 든든한, 노래 가사 그대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내 어머니. 어머니가 가시고 나면 며칠쯤 적잖이 허전할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이다.

 '오늘의 포토제닉' 현지음식이 영 입에 안 맞다며 슈퍼에서 산 단무지를 장난스레 입에 물고 계신 어머니.
'오늘의 포토제닉' 현지음식이 영 입에 안 맞다며 슈퍼에서 산 단무지를 장난스레 입에 물고 계신 어머니. ⓒ 이명주


#일본여행#자유#여행#후쿠오카#하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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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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