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으로 이사한 뒤 3개월 동안 텔레비전 없이 살았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고지서를 뽑아 보던 도중 전기세 안에 수신료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달에 2500원씩 꼬박꼬박 수신료를 내왔다. 수신료가 전기세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수신료가 준조세의 개념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KBS 한국방송-"이라는 로고송이 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수신료를 내는 손이 민망해지는 사건이 생겼다. KBS 이사회가 오는 23일 정기이사회를 열어 2500원의 수신료를 6500원까지 올리는 방안을 놓고 논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상식과 우리의 상식
지난 1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수신료를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상식과 국민의 상식은 다른가 보다. 그의 상식은 경제 여건을 생각하지만 국민의 상식은 KBS의 공영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KBS는 준조세 개념의 수신료를 받을 정도로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방송일까?
KBS는 공식 사이트에서 수신료를 '공영방송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고, 공정성과 공익성을 추구하면서 소수의 이익을 배려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시청자들이 납부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2010년 지금 사이트에서 이 문구를 지워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KBS는 공영방송의 모습과는 한참 멀어져 있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 확보는커녕 현 정권만을 위한 홍보 방송으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신료는 공영방송의 서비스가 적절히 이루어졌을 때 국민들이 그에 대해 지불하는 것이다.
가치가 다른 2500원
물론 지난 20년간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감안할 때 2500원은 적은 액수다. 1981년 2500원으로 정해진 뒤 29년 동안 한 번도 인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 독일, 일본의 공영방송과 비교해봐도 KBS의 수신료가 저렴한 것은 사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재 KBS는 수신료 비중이 매출액에서 40%를 약간 넘는 수준이다. 결국 재정적으로 매우 취약해 공영방송만이 제작할 수 있는 질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또한 공영방송이라는 타이틀이 부끄러울 정도로 KBS의 수신료 의존율은 매우 낮다. 공영방송이 수신료가 아닌 광고로 먹고 산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는 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신료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KBS의 전체 수입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을 현재 41.9%에서 20%로 낮출 경우 수신료는 4820원으로 인상되어야 한다고 한다. 게다가 KBS가 수신료를 인상하면 7000억~8000억 원 규모의 광고가 민간방송 시장으로 이전되어 광고시장 확대 효과도 기대된다.
그러나 이 모든 달콤한 유혹이 반갑지 않은 이유는 KBS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이은 공정보도 논란 속에서 수신료 인상을 논하는 것은 모순당착이다. 실제로 KBS는 현 정권이 출범한 이후 KTV(한국정책방송)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작년 연말 아랍에미레이트 원전수주, G20 유치 홍보, 세종시 수정안 발표 등과 관련한 보도의 공정성 논란 문제를 들 수 있다.
KBS는 지난 2001년 각종 여론조사에서 영향력있는 언론 1위에 오른 후 8년 연속으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로 선정됐었다. 이는 KBS가 국민들에게 공영방송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지난해 8월 KBS는 2위로 밀려났다. 또한 2003년부터 5년 연속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언론사로 선정되었던 반면 최근 신뢰도 1위 자리를 MBC와 한겨레에 내줬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KBS의 불공정 보도에 있다. 실제로 한국기자협회가 전국 기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4.8%가 이병순 사장 취임 후 KBS 보도가 불공정해졌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KBS의 2500원은 참치김밥 한 줄 값인 2500원과는 다르다. 국민들이 KBS에게 주는 2500원은 공정한 방송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정부의 홍보 방송으로 전락한 KBS를 보면서 2500원마저도 아까워하고 있다. 한 국가의 공영방송이 권력의 시녀라는 별명을 얻은 지금, KBS의 수신료 인상 논쟁은 무의미하다. 수신료 논의는 KBS가 국민들에게 인정받는 공영방송이 된 뒤에 논의할 수 있는 문제다. KBS가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방송이 된다면 국민들은 기꺼이 참치김밥 한 줄이 아닌 세줄 가격의 수신료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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