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는 노동자의 감정까지 평가기준으로 체크한다. 한없이 비굴해지지 않으면 어떻게든 노동자는 굶어죽게끔 되어있다. 웃긴 것은 소비자들이다. 본인 스스로가 철저하게 감정노동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이면서,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왕'인줄 알고 기세등등하다.
그런데 누군가가 '하녀'에게 무례하게 대했다고 난리법석이 일어났다. 평소에 하녀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고용조건으로 계약이 이루어졌는지, 복지상태가 과연 인간적인지에 대해서 한 번도 관심 없었던 이들이 갑자기 충만한 도덕성으로 무장했다. 피식~. 지난 글은 여기까지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런 젊은이들을 키웠단 말인가? 어쩌다가 우리 젊은이들이 이토록 개념상실의 인간이 되었단 말인가? 오늘은 이 '탓'을 부모에게 돌려보자. 물론 이들 부모들은 이른바 '한국적 부모'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지극히도 당연히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
20대의 부모세대, 이들은 자녀들이 아바타가 되길 원했다 최근의 10~20대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 중 하나는 이들이 너무나 '경쟁'에만 목숨을 건 비인간적 로봇이라는 거다. 부모는 왜 이렇게 자녀들의 인생을 불쌍하게 만들었을까? 물론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갔으면 하는 것이 당연한 부모심정 아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이들의 부모가 누군가?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386세대 아닌가. 뭔가 대범할 듯하고 또한 사회보편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듯한 이들이 사회구조적 모순에 허우적거리는 자녀들을 외면하는 것은 좀 거시기하지 않은가?
이 부모세대가 우리 사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대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이 변수는 실로 막강했다.
빨갱이라고 오해를 받아도, 혹은 집안걱정은 왜 안하냐고 잔소리를 들어도, 아울러 스스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때문에 혼란스러워지더라도, 이 하나의 변수! "난 대학생이다! 대학생답게!"라는 의미심장한 분위기가 이를 언제나 긍정적으로 희석시켰다.
실제로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다른 점'도 많이 경험했다. 80년대는 워낙 폐쇄된 사회였으니 대학에서만 맛볼 수 있는 '어둠의 경로'를 통한 진짜 진리들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80년대의 대학생활은 '민주화운동'이라는 목적 때문에 고달팠지만, 이 시기에 대학생으로 살았다는 것은 다른 세대가 누리지 못한 엄청난 기쁨이기도 했다. 이른바 이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 세대'였다.
그런 이들이 대학을 졸업했고 취업을 했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자녀들을 출산했다. '거시영역'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미시영역', 즉 일상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던 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담론이 등장한다. 아울러 기업의 메커니즘도 달라진다. 말 그대로 '창조적 상상력'이 강조된다. 이른바 '단박에 잘릴 가능성'과 '단번에 대박을 터뜨릴 가능성'이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 사회구조에서 이른바 386세대는 특유의 엘리트적 꼼꼼함, 그리고 정말로 대학 때 발휘했던 상상력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한다. 게다가 연공서열에 목숨 걸었던 산업화 세대는 IMF라는 딱지 속에서 스스로가 무능력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버렸다. 역시 사람은 대학을 나오고 볼 일이다.
물론 과거에도 대학이라는 변수는 사회적으로 중요했다. 하지만 그때는 고졸출신자가 20~30년 동안 일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지금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데, 이 영역에서 근속년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2년마다 '새로' 근무년수가 카운트된다. 이것도 운이 좋아야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이를 미안해하지 않고 아주 공정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이 구축되면서 이른바 비정규직은 '합법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그래, 일단 대학을 간 다음 생각하자 자녀교육의 버전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부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너희들은 꼭 대학가라!'면서 격려하는 식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서 대학 안 나온 사람을 보니~'라는 식이다. 이건 격려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스펙'의 차원이 된다. 이른바 '사람대우 받고 싶으면 대학가야 한다'는 버전이다. 성공하기 위해서 '대학가자!'는 것이 아니라 '대학 안가고 바보 될래!'라는 식이다.
그런데 대학은 어떻게 보내는가? 9할이 사교육과 직결된다. 돈을 넣을수록 성적은 오르는 아주 솔직한 공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점에서 386세대는 엄청난 수혜자다. 이들 엘리트 386세대들은 이른바 선동렬 방어율로도 취업이 가능한 세대였고 펜보다 화염병을 더 많이 들어도 취업이 가능한 세대였다. 그것도 든든한 정규직으로.
당연히 현시점에서 '사교육 투자'에 한층 유리한 세대가 된 것이다. 이론을 현장에 적용할 요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돈을 넣을수록 가시적인 성과를 얻게되면 이른바 신바람이 분다.
이크, 그런데 신바람이 너무 '거칠게' 분다. 이른바 경쟁이다. 그러니 단순히 공부만 열심히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공부열심히 하면 '잘난 놈'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이 나보다 못난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단순히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학습이 필요했다. 이른바 정보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여기에 엄마들의 몫이 등장한다. 그녀들 역시 엘리트 아닌가. 그녀들은 도시락만 싸주는 시대의 어머니상을 거부했다. 그때는 부모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시절이었고 이제는 본인이 '더' 잘 아는 시대라는 거다. 그래서 정보전쟁을 진두지휘하며, 로드매니저로 뛰어다니며, 재활군 코치가 되어 심리상담까지 책임진다. 당연히 아이들은 부모들의 아바타가 된다. 그리고 부모처럼 아이들도 엘리트가 된다.
아바타는 배신이 생명이다 아마도 부모들은 아바타가 엘리트 자격을 얻었으니 이제 엘리트'다운' 삶을 살기를 바랄 것이다. 자신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아바타는 배신을 하게 되어있다. 자녀들은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의 메커니즘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경쟁'. 그리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 말이다.
이것이 자녀들의 내면 깊숙히 체화되었다. 이런 이들에게 사회구조적 모순을 바라보는 눈? 그건 '아바타를 만든' 제작자의 의도였을 뿐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너무 순진하게 보았던 거다. 엘리트가 되면 당연히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것이라고 믿었던 부모세대의 가설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거 영화와 너무 똑같다. 이 상황에서 패륜녀가 싸가지 없다? 아니 누가 그렇게 키우래?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온라인 이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