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만화는 이제 하나의 문학이다.
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겐 그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김현 (문학평론가)

권영섭
 권영섭
ⓒ 송유미

관련사진보기


나를 키운 건 동네 만화방 & 권영섭 봉선이 시리즈 만화

나는 어릴 적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방에서 살았다. 어느정도 만화를 좋아했던지 우리동네 만화방의 책 다 보고, 이웃동네 만화방까지 원정가서 보았던 것이다. 내 초등학교시절은 60년대 초반에서 중반사이…. 그 당시 아동층에게 적당한 볼거리가 없었다. 요즘이야 TV 없는 집 없고, 동화책도 너무 다양하고 아동도서관 등 아동을 위한 볼거리 문화시설 상당히 많다.

그러니까 60년대 초입에는 동네 골목가의 만화방이 유일한 독서 문화 공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다. 나는 내 어울려 다니는 소꼽친구들보다 만화를 너무 좋아해서, 어머니가 하시는 가게의 잔심부름 열심히해서 탄 심부름 값을 전부 만화보는 데 투자하곤 했다.

그런데 한번 화가 나면 호랑이보다 무서운 어머니께선 만화는 백해무익하다고, 어린 내가 생각하기엔 말도 안되는 이유들로, 회초리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어머니께 꾸중과 회초리 맞아가면서 내가 봤던 만화는 권영섭 선생의 <봉선이와 아나>,<봉선이하고 바둑이>, <울밑에서 선 봉선이> 등이었다.

나는 '봉선이'가 나오는 만화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또래들보다는 조숙했던 나는 당돌하게도 권영섭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봉선이 얼굴 좀 크게 그려서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권작가는 이 당돌한 꼬마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도화지에 크게 그려서 보내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 그림을 들고 다니며 온 동네 친구들에게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른다.

그럴 것이다. 60년대를 유년시절로 보낸 아동이라면, 형이나 누나와 인기 몰이 베스트셀러 만화 <울밑에서 선 봉선이>의 주인공 소녀 가장 '봉선이'의 입장이 되어 눈물깨나 흘렸을 터이다. 볼거리가 너무 빈약했던 그 물질적으로 가난했던 보릿고개 시절, 만화방에서 내가 읽은 봉선이의 끈질긴 생활력 등은 오늘의 내 문학과 성격형성에도 큰 영향 주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권영섭 만화작가
 권영섭 만화작가
ⓒ 권영섭

관련사진보기


인생은 때때로...너무나 만화 같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만화가 그렇게 백해무익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아마 이해하셨으리라. 그 시절 솔직히 만화에 대한 개념은 미숙했다. 한국 만화가 오늘날처럼 대중문화의 담론을 이끌어내면서 자리잡게 된 것은, 90년대 이후, 기존 지성의 진중성 부족을 몰아부치는 신세대 인문주의자에서 비롯된 것.

어쨌든 대중의 마음을 울리고 웃기는 만화는, 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상품적 가치와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예술 장르다. 일본인들이 만화에 환호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부족한 '진실의 축도'를 마음껏 구사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만화. 만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들과 정립된 개념들로 날로 한국만화의 위상은 높아가고 있다.  

그 어떤 장르도 쉽게 대신 할 수 없는 만화의 세계는 우리 대중들에게 치열한 삶의 모색과 성찰을 통해 달콤한 꿈과 환상을 손에 쥘듯이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행운이나 예기치 않는 이변이 일어나면 종종 '정말 만화 같아..'하고 얘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어릴 적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했던 '봉선이' 만화 시리즈의 작가 권영섭 선생을, 새털 같이 많은 날들이 저만큼 흘러 가버린, 2008년 6월 어느날 갑자기 만난 것이다. 미국에 사는 인척 오라버니를 만나는 장소에 권영섭 선생이 예의 베레모 모자를 쓰고, 인척 오라버니와 함께 나오신 것이었다.

이런 인연의 기회로 나는 어릴 적 미처 알지 못한 권영섭 선생의 만화의 창작 세계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알고 싶었다. 그리고 자주 메일과 통화를 통해,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봉선이' 만화팬이 되었다.

60년대 최고 인기 만화, 봉선이와 아나, 봉선이하고 바둑이
 60년대 최고 인기 만화, 봉선이와 아나, 봉선이하고 바둑이
ⓒ 송유미

관련사진보기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영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울밑에서 봉선화>- 김형준 작사

<울밑에 선 봉선이>는 6. 25 전쟁의 고통을 육화한 작품

그렇다. 만화는 일단 그림과 글. 시각적으로 그림이 가장 먼저 인식된다. 이차적으로 내레이션, 지문 대화 등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시각적 형상이 주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칸과 칸을 연결하는 스토리 라인이 없다면 만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문학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문학적 형식과 만화가 결코 유리될 수 없다.

권선생의 <울밑에서 봉선이>의 경우는 우리 가곡 <울밑에서 봉선화>에서 그 작품의 테마를 삼았다고 한다. 이 작품은 너무나 한국적인, 한국정서가 담뿍 묻어난다. 그러나 아쉽게도 권 선생의 작품들은 대개 보관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60년대-70년대 최고의 인기만화작가로 활동했던 권영섭 작가의 <봉선이와 아나>는 소녀 봉선이와 봉선이 고양이 친구 아나가 6. 25 전쟁이후 역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눈물겹게 그린 스토리의 순정만화다.

당시 권영섭 선생의 만화들은, 대개 가냘프고 앳된 '봉선이'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해서 만화평론가들은 한국형 순정만화의 출발점으로 권영섭 선생의 대표작 <울밑에서 봉선이>을 손꼽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만화작가 권영섭 선생이 이 만화를 그릴 때는 20대초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권영섭 원로작가는 나이를 잊는 영원한 현역 작가이길 원하고 젊은 만화작가 들과 나란히 어깨를 하며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60년의 기억, 그 6. 25의 상처'전에 권영섭 만화 작가 외 원로 작가들 참가

지난 22일부터 오는 30일까지 부천시 청사 로비에서, 권영섭 작가는 고바우, 김성환 화백, 신문수, 김기백 등 원로 만화가 29명과 함께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카툰을 그려 전시한다. 전시 제목은 '60년의 기억, 그 6·25의 상처'. 전시되는 52점은 소재별로 한국전쟁 27점, 광복 10점, 안중근 의사 15점.

이번에 열린 전시는 6·25전쟁 60주년 기념행사다. 6. 25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감내한  원로 만화작가들이 젊은 세대에게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전하기 위해 마련된 것. 또한 광복 기념과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 추도도 겸한다.

권영섭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우리들이 겪은 6.25를 알리기 위해 작품을 냈다"면서 "이를 통해 6.25의 진실을 알고 국가관도 철저히 갖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60년의 기억, 그 6.25의 상처'의 전시가 끝난 뒤 이들 작품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인천 자유공원 등을 돌며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권영섭 작 효자 석돌이
 권영섭 작 효자 석돌이
ⓒ 송유미

관련사진보기


권영섭 선생은 60-70년대 대표 순정만화 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아동만화에의 한길로 걸어왔다. 1959년에 만화 연재를 시작하여 근 50년의 세월을 한결 같이 어린이들의 세계를 표현하는 내용과 학습만화에 전력했다.

왕성한 창작활동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만화의 영역을 대변하기 위한 단체결성 등 만화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이런 권영섭 선생에게 평생 만화에의 한길을 걸어오면서 후회는 혹시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 ... 세상에 나와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우연처럼 만화작가의 길을 접어들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사실은 신문시사 만화를 창작하고픈 열정이 늘 내 맘속을 지배해 왔습니다. 90년대에는 잠시(3개월간) 한 일간신문의 만화와 만평을 창작, 그 열정을 조금이나마 달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창작에 전념하고 있으며, 기력이 남는 날까지 '현장 작가'로 지내고 싶습니다. 만화 작가들은 개인적으로는 뛰어나나, 결집력이 약해 항상 '소외된' 전문 직업인으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이런 환경이 안타까워 협회일 등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습니다. 장기간의 만화가 협회장 재직을 놓고, 이런저런 비판의 목소리들이 있었으나 나는 오로지 '만화작가의 권익대변'을 위해 발 벗고 나섰던 그 때의 일들이 여간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그렇다. 권영섭 선생은 이렇게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하나에서 열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머나먼 타국에서 조국에 존재하는 조상 묘소를 돌보기 힘든 친구(나의 인척 오라버니)의 묘소 돌보기  등 자신의 일처럼 궂은 잔부름을 척척 알아서 해주는 깊이 사람을 배려해주는 마음에서 익히 읽을 수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는 이해관계를 따지고 드는 나의 일가친척보다, 더 내게 소중한 이웃이자 내 유년의 가난한 뜰을 풍성하게 가꾸어 준 은인이었다….

권영섭
 권영섭
ⓒ 송유미

관련사진보기


권영섭 선생은, 2008년(제24회) 눈솔상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눈솔상은 소파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를 이끈 고(故) 눈솔 정인섭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1985년부터 해마다 어린이를 위한 문화활동에 힘쓴 2명을 뽑아 시상하는 제도이다.

돌아오는 오는 6. 25 전쟁 기념일에는, 권영섭 만화작가가 참여하고 있는 ' 60년의 기억, 그 6. 25의 상처' 전시회에 꼭 참석해야겠다. 우리의 기억 속에 점점 희미해진 6. 25 전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환기하기 위해서...  

권영섭 만화작가
1959년- 1961년 연합신문에 '우리들의 척척박사' 연재,  첫 단행본 만화 '퉁탕이' 발표
1960년 첫 소년만화 '오손이 도손이', '울밑에 선 봉선이' 발표, 1962년 10월21일 - 1964년 5월31일 : 조선일보에 '꼬마박사'(주간) 연재, 1971년 : 소년동아일보에 매일 연재, 1989년 - 1991년 : 한국교회신문에 주간 연재, 1992년 - 1997년 : 유아교육신문, 보훈신문에 연재, 1985 - 1993년까지 발표한 성경만화 36권, 신학교 시청각 교재 등 창작, 2001년 6월말 발행 : '방울이의 자연과학 교실'(파랑새어린이)  외 1960년대에 약 800권,  1970년대 소년한국일보 전속으로 약 700권 창작, 1959년부터 1981년까지 만화 단행본 약 300타이틀, 통권 1200여권 창작 등 제 24회 눈솔상 수상 외 만화가협회장 역임 등


태그:#권영섭, #만화가, #봉선이와 아나, #하얀장미, #6. 25전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