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의 녹차밭이 그렇게 좋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선뜻 가보지 못한 건 당일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보성까지 가는 기차가 자주 없고 그나마도 일찍 끊기기 때문에 여유롭게 구경하기란 녹록찮다.
비교적 차편이 넉넉한 서울을 기준으로도 그러한데, 애매한 산자락에 위치한 충남 계룡의 우리집에서 보성을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것은 아예 그냥 불가능이었던 것이다. 자가용이 있다면 모를까.
그러나 이미 내친 걸음인 내게는 문제될 게 없었다. 떠나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길을 나서고 나면 어려울 거 하나 없단 걸 알게 된다. 보성에는 찜질방이 없어서 혼자 숙박하기는 마땅치 않아 밤에 가까운 광주로 넘어가 자기로 했다. 어차피 집에 돌아오려면 광주를 지나야 하기도 하니까.
보성으로 출발, 필요한 건 많지 않다광주 터미널 근처의 찜질방 위치를 확인했고, 보성에서 광주로 넘어가는 막차 시간을 알아본 후 출발한다. 정말이지 여행에 꼭 필요한 정보는 막차 시간과 잠잘 곳, 딱 이 정도면 된다. 요즘 웬만한 도시에는 역이나 터미널, 관광안내소 등지에 안내책자와 지도가 비치되어 있어서, 일단 도착하면 안내책자를 뒤적이면서 마음이 동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면 되는 것이다.
노숙을 하지 않을 정도로만 현지 사정을 알아봐 두고, 여행기를 읽으면서 발견한 정보는 따로 메모해 두고. 아, 그런데 관광안내지도는 축척이 제대로 표시돼 있지 않기 때문에 특히 도보여행 시에 조심해야 한다. 심하면 40분 거리와 4시간 거리가 비슷하게 표현돼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현지인에게 물어서 확인하는 것이 현명하다.
자유석 티켓인 내일로 유저들을 위한 앉아가기 Tip |
- 기차의 맨 앞쪽과 맨 뒤쪽 좌석은 판매가 늦게 되는 자리라서 비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 새마을호의 경우 평일에 비교적 빈자리가 많은데다가 5호차는 아예 자유석이라서 누가 표 들고 찾아올 일 없으니 편하게 앉아 갈 수 있다. - 일반실에 자리가 많지 않을 경우 자리 주인이 탑승하면 서서 가야 하는 수가 있으니 아예 카페 객차에 자리를 잡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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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기분으로 올라탄 열차. 6호차 맨 앞쪽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옆쪽을 힐끗 보니 내일로 여행을 하는 듯한, 내 또래 여학생들이 둘 앉아 있다.
내일로 유저들은 어떻게 된 게 행색에 다 표가 난다. 배낭에 밀짚모자 그리고 티켓 목걸이. 조금 있다가 커다란 배낭을 맨 남학생이 한 명 탔는데 승무원 언니가 와서 검표할 때 보니 역시나, 내일로 티켓 유저다. 다들 어디로 그렇게들 가는 것일까.
여학생 둘은 정읍에서 내렸고 남학생 한 명과 나는 보성에서 내렸다. 다른 객차에서도 내일로 유저로 보이는 여행객들이 하나둘 내려온다. 보성은 내일로 유저들이 대부분 거치는 유명 코스 중 하나다. 그래서 확실히 어제 갔던 대천과는 달리 내일로 유저들이 많다.
대한다원으로 가는 버스가 터미널에서 오후 3시에 출발한다고 들었는데, 기차가 보성역에 도착한 시간이 노후 2시 49분이라서 10분 거리인 터미널까지는 좀 빠듯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궁화호는 몇 분씩 연착되는 일도 흔하니까. 늦으면 40분 후에 있는 다음 차를 타지 뭐, 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역에서 관광안내책자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녹차밭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표지를 따라 철길 위로 다리를 하나 건너니 작은 가게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세 시가 다 됐는데 가게에 물어보니 아직 버스는 안 왔단다. 잘 됐다 생각하며 잠시 앉아 기다리니 곧 농어촌버스가 도착한다. 티머니카드를 찍고 올라탔다.
초록빛이 가득한 세상, 보성 녹차밭10분쯤 걸렸나, 어느새 대한다원 입구다. 커다랗게 대한다원임을 알리는 간판이 붙어 있다. 길을 따라 들어가다보니 녹차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어 냉큼 하나 사먹었다. 보성 녹차밭에 오면 꼭 이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어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다. 약간은 떫고 쌉싸래한 듯한 녹차맛이 있고 별로 달지는 않은데 인공적인 느낌이 덜해서 좋았다.
한쪽에 난 길을 따라 백 미터 쯤은 올라가야 대한다원 입구와 매표소가 나온다. 본격적인 다원에 들어서기 전부터 길 왼편으로는 녹차밭이 한껏 펼쳐져 있다. 눈에 초록빛이 묻어날 것 같다. 입장료 2000원을 내고 표를 사 들어가니 길이 몇 갈래로 나 있어 조금 고민됐지만 일단 제일 중심에 있는 차밭을 향해 갔다.
녹차밭은 소문대로 장관이었다. 평소에 차를 좋아해 녹차, 홍차, 허브차 가리지 않고 즐겨 마시는데 이렇게 차의 재배 장소에 직접 와보니 참 오묘했다. 내가 먹는 차가 여기에서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싶어서. 이 좋은 바람 맞고 햇볕 쬐고.
아르바이트로 인도의 차 역사에 대한 책을 번역한 적이 있다. 서양에서 주로 마시는 홍차는 결국 동양에서 많이 마시는 녹차와 근본이 같다. 이를 생으로 말린 것이 녹차, 발효 가공한 것이 홍차다.
백 쪽이 넘는 내용을 번역하면서 차의 생육 환경과 재배방법, 원산지 등에 관해 읽었는데 워낙 차를 좋아하니 꽤 재미있게 작업했던 기억이다. 그러니까 나는 차에 대해서는 꽤 아는 편이라고 자부하며 차 나무에는 크게 두 가지 품종이 있댔는데 여기에 있는 건 뭘까, 하며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봤는데 뭘 알아낼 수는 없었다.
마침 수학여행인지 소풍인지를 온 초등학생들이 있었다. 교관 역할을 하는 선생님 한 분이 위엄 있게 서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떠들고 말을 안 들으면 사진 촬영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5학년이죠? 내년이면 최고 학년인 6학년이 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행동하면 4학년이 뭘 배우고, 3학년이 뭘 배우고, 2학년이 뭘 배우고, 1학년이 뭘 배우겠습니까? 손 머리! 움직이지 마세요!" 하며 썰을 풀고 계신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 없는 레퍼토리에 피식, 하고 웃으며 얼른 지나갔다.
녹차에도 등급이 있다? |
녹차는 재배 시기에 따라 그 등급이 정해진다. 곡우, 즉 4월 20일 이전에 그 해 처음 난 어린잎으로 만든 고급 차는 우전(雨前)이라고 한다. 5월 상순에 채취한 차는 세작(細雀)이라고 하는데 작설차(雀舌茶)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시중에서 좀 고급이다 싶은 녹차는 대개 작설차인 경우가 많다.
5월 중순까지 채취하는 차는 중작(中雀), 5월 하순까지 채취하는 차는 대작(大雀)이라고 하며 차는 오래 자랄수록 잎이 굳어지고 탄닌 성분이 많아져 떫은 맛이 진하다. 6-7월에 채취하는 엽차는 굳은 잎이 대부분으로 숭늉 대신 끓여마신다.
흔히 티백으로 많이 마시는 저렴한 녹차, 현미녹차 등은 우전이나 세작과는 그 맛과 향을 비교할 수 없다. 녹차와 홍차만큼이나 느낌이 다르달까. 또한 녹차는 너무 오래 우리면 탄닌 성분이 많이 빠져나와 쓴 맛이 강해지니 차의 종류와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1분 이내로 여러 번에 걸쳐 우려 마시는 것이 좋다. * 참고 사이트 (대한다원) http://www.daehandawon.com/Web/GreenTea/index.asp?ReqMenu2=Su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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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하게 걸으며 차밭 구석구석 구경하고 편백나무 산책로를 걸어 반대편으로 나왔다. 값이 싸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워낙 차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치라 생각 않고 최고급 우전차를 작은 상자로 하나 샀다.
내일까지 돌아다니면서 간식으로 먹을 녹차 한과와 집에서 잎차를 우려먹을 때 쓰면 좋을 차 거름망도. 우전녹차 시음장에 들어가 1000원을 내고 그 맛을 보았더니 가방 속에 든 차 상자가 아주 흡족하게 여겨진다.
남해안 최초라는데, 한적한 어촌 율포 해수욕장
대한다원 구경을 마친 후 버스 시간 전까지 근처의 봇재다원을 보러 갔다. 대한다원에서 나와 오르막길을 따라 몇백 미터 걸어가면 나오는 곳. 대한다원보다 규모는 훨씬 작은데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장관이다.
대한다원이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보성에는 그 외에 대한다원2도 있고 봇재다원과 은곡다원, 반야다원, 백록다원 등 차밭이 여럿 있다. 특히 제2다원이라고 하는 대한다원2는 제1다원과는 느낌이 또 많이 달라서 아는 사람만 알고서 찾아온단다.
차편도 잘 모르겠고 막차 시간도 빠듯하여 이번에는 가보진 못했지만 언젠가 운전 연습을 좀 해서(장롱면허가 있기는 있다) 아빠 차를 훔쳐가지고 와보리라, 생각했다.
다음 목적지는 1930년대 남해안에서 가장 먼저 개발되었다는 율포 해수욕장. 해수탕, 녹차탕으로 유명하고 온천욕을 할 게 아니라면 볼거리는 딱히 없다고 들었는데 목욕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난 바다라면 무조건 좋으니까 가보기로 했다.
아직 해수욕장 시즌이 아니어서 그렇기도 하고, 워낙 작고 볼 것 없는 해변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MT온 대학생 한 무리 외에는 사람도 없고 바다는 잔잔했다. 아무튼 바다만 보면 좋아서 정신 못 차리는 나는 샌들을 벗어들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는데 물이 깨끗하지 않았고 작은 게 몇 마리가 내 발을 타고 올라와서 식겁했다.
게다가 죽은 새우 시체가 물에 떠밀려와 있는 걸 보고는 우리나라 해양 생태계를 진지하게 걱정하며 냉큼 수돗가로 가 발을 씻어버렸다. 바닷물이 탁한 건 갯벌이 어쩌고 유효성분이 어쩌고 하여 걱정할 필요 없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기는 했는데 시체를 보고 나니 별로 믿을 수가 없었다.
한강물이 더럽대도 반포대교 건너면서 보면 그저 햇볕 받아 반짝거리듯이 한 발짝 물러나 해변에서 멀찍이 바라다보니 여기는 참 한적한 어촌이구나, 평화롭고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율포 해수욕장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뒤 버스를 타고 보성 터미널로 돌아갔다. 버스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커플 한 쌍과 교환학생인가 싶은 외국인 여학생 둘이 다였다. 그 중 백인 여학생은 연신 창밖으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어디에서 지내고 있는 친구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나라에 와서, 정작 한국 사람들은 해외로 나가야만 여행으로 여기는 듯한데도, 서울도 아닌 이 먼 데까지 찾아다니며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주고 있어서 내가 보성 사람도 아니지만 그냥 참 고맙다, 생각했다.
땅거미가 지는 무렵 달리는 시골길이 참 좋았다. 여름이라서 더 그런지, 어딜 봐도 초록이라 좋았다. 터미널에서 광주행 표를 샀다. 광주까지는 한 시간이 좀 넘게 걸렸다. 이내 해는 완전히 졌다.
소요비용 |
내일로티켓 54700원 보성역→대한다원 버스비 약 1000원(티머니카드 이용) 대한다원 입장료 2000원 녹차아이스크림 1500원 우전녹차 시음 1000원 우전녹차 15티백 팩 10000원 녹차한과 3000원 차 거름망 10000원 대한다원→율포 버스비 약 1000원(티머니카드 이용) 해물볶음밥 6000원 율포→보성 터미널 버스비 1300원 버물리, 퇴충팔찌 구입 7000원 광주행 시외버스 7300원 광주에서 영화 8000원 찜질방 7000원 합계(내일로티켓, 교통카드 사용분 제외) = 62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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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더 많은 사진과 정보는 기자의 블로그에 있습니다.
카메라 광각이 넓지 않아 사진에 다 담기지 않네요. 실제로 보면 더 멋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