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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첫 월급을 탔단다. 첫 월급을 타면 으레 부모님 속옷 선물이 1번이라는데 아들놈, 선물로 속옷 대신 과일을 사왔다. 토마토와 파프리카. 척 풀어보는데 우선 탱탱하고 윤기 자르르한 자태가 어찌나 먹음직스러운지 침부터 고였다.

아들이 일조한 토마토 생산물. 좋은 것만 선별해 가져왔단다
 아들이 일조한 토마토 생산물. 좋은 것만 선별해 가져왔단다
ⓒ 조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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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제가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빡세게 가꿔 키운 것들이에요. 싱싱하죠? 얼른 잡수세요."

군대 제대하고 복학한 아들은 코스모스 졸업을 할 예정이었다. 원예가 전공이었는데 공부는 졸업에 필요한 학점 정도만 취득하는 것으로 땡처리하고 진짜 전공은 '노는 것(축구)'이던 놈이다(얼마나 열불 터졌겠는가?).

하여튼 입대 전까지 장장 스물두 해를 원없이 놀았는데 제대 후 아들이 달라졌다. 뭐라고 할까? 인생의 쓴맛이 어떤 것인지 막연한 공포가 엄습했다고나 할까? 사회 진출을 앞두고 구체적인 두려움이 강타하는 것 같았다.

원예를 좋아하거나 취업전망이 밝아 전공을 선택했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성적 때문에 원예 쪽으로 굴러갔으니(동식물 학과에서 동물 선택을 했는데 성적이 모자라 식물로 떨어졌다) 전공을 살려 일자리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제 딴에는 열심히 고민은 하는 것 같아 두고 보자 했는데 어느 날 조경기사 시험 준비를 해보겠다고 나섰다. 조경기사 자격증 취득을 하면 평생 일자리 걱정은 붙들어 매도 될 만큼 전망이 좋고 대우도 잘 받는 분야란다.

열심히 해보라고 응원을 했지만 내심 걱정부터 앞섰다. 글자와 친하지 않는 아들놈이 필기시험 합격률 10%라는 시험 문을 어떻게 뚫을 것이며 무엇보다 '맨 땅에 헤딩'하다가 지쳐 아예 자포자기를 하면 어쩌나 잔 근심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사시 합격이 안 부러운 아들의 취직

파프리카. 두껍고 탱탱하고... 비싸서 못 사먹었는데 아들 덕분에 계속 먹게 생겼다
 파프리카. 두껍고 탱탱하고... 비싸서 못 사먹었는데 아들 덕분에 계속 먹게 생겼다
ⓒ 조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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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교수님이 지금의 일자리를 추천해 주셨다. 시와 영농인들이 합자해 설립한 영농회사로 만 2천 평 유리온실에서 토마토, 파프리카를 수경재배로 키우는 선진국형 농법을 주도하는 곳이란다. 수박, 참외, 딸기 등 계약 농업인들의 생산물을 위탁 받아 대형 마트, 시장 등에 유통시키는 유통사업도 병행하고 있다는 곳이다.

시설농업의 최전선에 서있는 네덜란드로부터 기술지도도 받는다니 이보다 더 전망 좋은 일자리는 없을 것 같았다. "엄마, 아빠 생각은 어떠세요?" 상의를 하는 아들에게 우리 부부는 대찬성을 했다. 취업부담에 시달리던 아들도 일자리 고민에 해방됐으니 얼마나 홀가분했겠는가. 취업이 일사천리로 결정됐다.

제일 걱정이던 아들놈이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이 결정됐을 때 남편과 나는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얼마나 좋은지 평소에 말수가 없던 남편도 "축하하오. 당신 애 많이 썼소"하고 낯간지러운 인사말을 할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 하리.

둘이 환호를 하다 문득 웃음이 났다. 남들이 알면 아들이 무슨 고시 합격이라도 한 줄 알겠다. 그러나 그 순간 정말로 사시 합격한 후배의 아들도, 외무고시 합격한 친구의 딸도 전혀 부럽지 않았다.

이 땅의 자랑스러운 '농사꾼'이 된 아들. 만 2천 평의 첨단 유리온실을 관리하는 재배관리사로 첨단 시설 원예 작물을 재배하는 전문가가 되게 생겼으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으랴. 무엇보다 흙과 함께, 땅을 밟으며 사는 직업을 갖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었다.

중고등학교 내내, 공부와는 담을 쌓고 놀기에만 열중하던 아들. 성적은 언제나 전교 꼴찌 1, 2등을 다투는 아들놈을 바라 볼 때 말은 못했지만 속이 썩어문드러지는 것은 말도 못했다. 그래도 아들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 아들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어느 누구보다 깊은 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저는 땅의 아들이잖아요"

아들이 초등학교 4~5학년쯤이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남편이 일하는 문화재단 회원인 어느 분이 회원들을 위해 주말농장 자리를 빌려주어 주말농장 프로그램을 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주말농장을 희망한 회원 가족들과 주말농장 터를 갈기 위해 단체로 나섰다. 자기 가족을 상징하는 예쁜 팻말들과 점심 도시락 그리고 심을 씨앗과 모종을 마련해 갖고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나... 주말농장 터에 당도해 보니 벌린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전날에 비가 내려 농장 터가 아예 진흙구덩이가 돼버린 것이다. 매립도 하지 않은 논자리 터가 습지처럼 움푹 팬 곳에 위치했으니 어쩌겠는가. 질퍽질퍽 떡이 져 밭이고 자시고 모심게 생겼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손에 삽과 호미자루를 들고 신나게 주말농장 텃밭 만들기 준비태세를 완벽하게 마친 회원들. 현장을 보고 망연자실해 들어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우왕좌왕 했다. 그러나 주말농장 프로그램을 취소 할 수는 없었고 나중으로 미루고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시큰둥하고 할 수없이 남자들만 하나 둘 자기 주말농장 구획을 짓기 위해 삽질을 시작했는데 우리는 실무지휘를 하느라 바쁜 남편 대신 내가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한 귀퉁이를 점찍어 놓고 일단 땅을 갈아엎으려는데 아들이 잽싸게 튀어왔다. 그리고는 삽자루를 빼앗는 것이었다.

"제가 할 테니까 엄마는 밖에 나가 계세요."

떡이 된 흙을 퍼올리려면 힘깨나 쓰는 남정네가 붙어도 벅찰 텐데, 초등학생이 그것도 하도 키가 작아 1~2학년쯤 돼 보이는 꼬마딱지가 삽자루를 가로채다니... 주변에 있던 회원들이 와르르 웃었다. 그런데 아들이 큰 소리로 일갈을 하던 말.

"엄마, 저는 땅의 아들이잖아요."

그 말이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하고 감동스럽던지 아직도 나는 아들이 한 말을 잊지 못하고 있다. 죽어도 시골에는 살지 않겠다면서 도시만 동경하던 아들이었기 때문에 사실 전공이 원예였지만 농사를 지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던가. '땅의 아들'이란 제 말처럼 땅과 함께 하는 일꾼이 되었다. 개인이든 회사든 농사일이라는 게 어디 시간이 정해져 있나. 아침부터 밤까지 장시간, 중노동이다. 일터가 농촌에다가 휴일도 일정치 않고 게다가 장시간 근무라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비전을 보고 입사한 젊은이가 아니면 오래 버티기가 쉽지 않단다.

얼마 못가 때려 친다는 말이 나오면 어찌하나. 걱정 반, 불안 반으로 아들한테 넌지시 물었다.

"아들아, 오래 버틸 수 있겠니? 아무리 유리온실이지만 하우스 작업이 보통 힘들지 않을 텐데..."

"엄마, 걱정 마세요. 돈 버는 일치고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대기업도 혹사당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던데 뭘. 이만한 일이 힘들다고 그만 두면 뭐를 할 수 있겠어요. 두고 보세요. 저는 꼭 여기저기서 탐내는 시설원예 전문가가 되고 말 거예요. 이 분야가 얼마나 전망이 밝은데요. 다른 건 몰라도 먹거리 만큼은 사양 산업이 될 일이 없으니까요."


태그:#아들 취업, #시설원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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