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곡성역 섬진강 기차마을에서 증기기관차를 탔다. 부아앙 굉음을 쏟아내는 증기기관차에 오르는데 낯선 패랭이를 쓴 중년의 사내도 같이 기차에 올랐다. 무얼 하는 사람일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기차가 출발하자 이내 잊어 버렸다.
창밖으로 섬진강의 풍경을 보고 있는데 객차 문이 열렸다. 조금 전에 본 패랭이 아저씨였다. 그는 예전에 우리가 '탱크'라고 불렀던 서비스카를 몰고 있었다. 서비스카에는 육포, 오징어와 사이다, 삶은 계란이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은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산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예전에는 기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기차에 식당칸이 생기면서 이 정겨운 풍경은 사라진 지 오래다.
더운 여름이여서 그런지 관광객들은 적었지만 모두들 옛 추억을 더듬으며 계란을 먹기 시작했다. 어릴 적 겨울이면 교실 난로에 선생님 몰래 구워먹던 쫀득이도 팔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쫀득이 맛은 어떨까 하는데 아내가 냉큼 샀다. 아이도 신기해하며 입에 물었다.
그가 나가고 난 후 여행자는 객실 밖으로 나갔다. 안내원에게 사진 촬영을 허락받고 객실 사이의 통로에 섰다. "곡성 좋지요?" 고개를 돌려보니 패랭이를 쓴 그 사내였다. 그가 몰고 다니던 서비스카를 예전에는 탱크라고 불렀다고 하니 "아, 그래도 이왕이면 서비스카라고 말하는 게 좋겠지요?"한다. 그의 단호한 말에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곡성읍 읍내리에 사는 윤재길(52)씨다. 기차에서 보이는 섬진강과 강에 깃든 마을들에 대해 그는 열정적으로 여행자에게 설명했다. 여행자는 곡성 땅을 십여 차례 넘게 왔었지만 그의 살 냄새 나는 이야기에 이내 빠져들었다.
기차마을이 생기고 난 후 그는 5년째 줄곧 기차에서 먹을거리를 팔고 있다. 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 가는 하행선에는 삶은 계란과 오징어 등을 팔고 가정역에서 곡성역까지 돌아올 때는 아이스케키를 판다고 한다.
"요즈음 하루에 아이스케키가 2700개 정도 팔립니다."
벌이가 좀 되느냐는 여행자의 말에 그가 담담히 대답했다.
"우리가 어릴 적만 해도 빈 병을 주고 아이스케키를 많이 사먹었지요. 그런데 아이스케키 장수가 안 받는 병이 있었지요. 염병, 지랄병. 하하. 농담이구요. 정종병을 안 받아요. 다른 병에 비해 쓸모가 없으니 사갈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의 걸쭉한 입담에 우리는 박장대소하였다.
특이한 복장과 화려한 언변을 가진 그는 증기기관차 안에서 단연 인기 만점이다. "추억의 아이스케~키, 한 개도 천원, 두 개도 천원"을 연신 외치는 그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재치가 느껴진다. 열차 안에서 즉석 퀴즈대회, 댄스대회 등을 열어 공짜로 아이스케키를 주는 이벤트도 진행하기도 한다.
"선생님, 밖으로 나와 보시오."
가정역에서 잠시 내렸다 다시 곡성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객실에 앉아 있던 여행자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하고 객실 밖으로 따라 나갔더니 그가 대뜸 "여기가 사진 포인트라요. 기차와 섬진강. 캬, 기가 막히지 않소. 뒤에 길게 매달린 레일바이크가 휘어지는 모습도 장관이지요"하며 사진을 찍을 것을 종용한다. 기차가 크게 섬진강 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곳이어서 기차 앞뒤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포인트였다. 오랜 세월 동안 기차를 탄 그의 안목은 놀라웠다.
"여기 숨겨진 계곡이 하나 있소. 외지인들은 전혀 모르는 곳이지요. 다음에 꼭 가보시오."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이것은 무슨 나무, 저것은 조금 있으면 열매가 열리는디 관광객들이 기차에서 손을 내밀어 따먹기도 한다며 그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구수한 입담에 어느새 기차는 곡성역에 이르렀다. "잘 가시오"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아이스케키 박스를 둘러메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는 사실 남 몰래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몇 해 전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학생을 위해 3개월 동안 모금활동을 하였고 넉넉지 못한 생활에도 거금 120만 원을 성금으로 보탰다.
여행자가 본 그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육중한 기차를 움직이는 증기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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