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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
▲ <팔레스타인> 겉표지
ⓒ 글논그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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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가 내리는 예루살렘, 10대 초반의 팔레스타인 소년이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무장한 몇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를 멈춰 세웠다. 군인들은 건물의 처마 밑에 들어가서 비를 피하며 소년에게는 밖에서 비를 맞고 서있게 했다.

군인들은 소년의 케피예(팔레스타인 전통 머릿수건)도 벗게 했다. 그리고 소년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진다. 어디에 사냐? 어디 가는 길이냐? 최근에 인티파다(봉기)에 참가한 적이 있냐? 돌이나 화염병을 손에 들어본 적이 있냐?

소년은 비를 맞으며 추위와 공포, 모멸감에 몸을 떨었을테고 군인들은 그 모습을 보며 킬킬거렸을 것이다. 바로 그런 재미를 위해서 소년을 불러 세웠으니까. 종종 겪는 이런 가혹한 경험이 반복되면 소년의 내면과 성격은 어떻게 변해갈까.

그래도 이 군인들은 비교적 점잖은 편이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어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거리에서 군인들에게 구타 당하고 잡혀가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린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가자지구에서는 아이들이 총에 맞는 게 드문 일이 아니다. 1989년에는 3800명 가량의 총기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그중에서 1500명 가량이 15세 미만의 아이들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언론에서 팔레스타인 관련 기사들을 보게 된다.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해서 몇 명이 죽고 부상당했다는 이야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보복성 공격을 가했다는 이야기.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이다.

대부분의 기사 내용은 딱 거기까지다. 그 기사 자체도 이스라엘이 왜곡했을 가능성이 많다. 일반인들은 평소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떤 대접을 받으며 사는지, 그들이 사는 난민촌의 실상이 어떤지, 사소한 이유로 몇 년간 감옥생활을 하는지, 이스라엘 군인에게 끌려가면 어떤 고문을 받는지 등은 잘 알지 못한다.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만화

언론학을 전공한 만화가 조 사코는 바로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찾았다. 1991년 말부터 1992년 초까지 두 달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생활하며 이들의 삶을 취재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만화로 그린 작품이 바로 <팔레스타인>이다.

조 사코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이 지역에 평화가 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코를 대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돈을 뜯어내려는 어린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당신한테 우리의 얘기를 들려주면 뭐가 바뀌냐?'라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코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준다.

4년째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둔 소년, 이스라엘 군인에게 아들을 잃은 어머니, 16살의 나이에 다섯발의 실탄을 맞고도 살아있는 소년 등. 이들은 저자를 이끌고 병원으로 데려간다. 그곳에는 시위 도중에 부상을 당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시위대에 어김없이 발포하고 시위가 끝나면 병원으로 처들어온다. 시위에 가담한 사람이 병상에 있으면 의사나 간호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치료도 안 한 채로 잡아간다. 수술 직전의 사람을 체포해가기도 한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감옥행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가두는 감옥이니 환경이 오죽할까. 지금은 비교적 좋아졌겠지만 만화에서 묘사하는 80년대 말의 감옥은 열악함 그 자체다. 3*4 미터 크기의 방에 20명이 수감되기도 한다. 햇빛은 차단되고 환기도 안된다. 강철문에는 동전 크기의 구멍이 하나 있다.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최루가스를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빼앗긴 고향, 파괴되는 집, 뽑혀나간 올리브 나무

또다른 인티파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反)이스라엘 저항운동)가 일어나서 수감자가 늘어나면 사막에 있는 야외감옥으로 옮겨진다. 천막생활을 하면서 사막 지역의 극단적인 일교차, 벌레들, 절대적으로 부족한 물, 무미건조하고 영양균형이 무너진 식사를 감수해야 한다. 그야말로 만화의 소재로 적당한 풍경이다.

난민촌의 단칸방들도 마찬가지다.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는 질척한 진흙길, 그 양쪽에 난민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현관과 거실이 있을 거라 상상하지만 그렇지 않다. 제대로 된 지붕이나 마루가 없는 집들도 많다. 벽 한쪽이 무너져서 비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집들도 많다. 화장실은 맨 땅에 구멍을 파서 사용한다.

이런 난민촌에 살면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당시 팔레스타인 노동자의 평균 일당은 20달러 정도. 난민촌에서 텔아비브까지 출퇴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4시간, 수입의 절반은 교통비로 날아간다. 이런 직업이라도 가지면 천만다행이다.

아이들은 학교에도 제대로 못 다닌다. 학교 주변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주기적으로 주둔한다. 그걸보고 열받은 몇몇 학생들이 돌팔매질을 하면 군인들은 어김없이 실탄을 쏘며 진격해 들어간다. 그리고 그 학교는 폐쇄된다.

그 과정에서 잡혀간 학생들도 고문당한다. 불이 켜진 가스레인지에 얼굴이 떠밀리고 매를 맞는다. 얼굴을 가린채 쇠사슬에 묶이고, 오물 투성이의 좁은 방에 갇힌다. 그러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허위자백을 하기 마련이다.

폭력의 악순환...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팔레스타인>은 이외에도 많은 풍경을 만화로 보여준다. 악몽의 해인 1948년에 어떻게 살던 집에서 쫓겨났는지 회상하는 할아버지, 결혼식 파티에 모여서 케피예가 땀에 흠뻑 젖도록 춤을 추는 사람들, 어느 집을 방문하건 나오는 설탕 범벅 차, 시위 현장을 만나서 두려움에 떠는 작가 자신의 모습 등.

작품 속에서 한 이스라엘 여성은 '나는 평화를 원해요'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원한다. 대놓고 평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문제는 팔레스타인이 꿈꾸는 평화와 이스라엘이 바라는 평화가 다르다는 데 있다.

예루살렘의 거리도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인다. 즐겁게 길을 걷는 관광객들, 노천식당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한가롭게 개를 산책시키는 노부인…. 하지만 한발짝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은 또다른 세계다. 폭행과 폭언, 고문이 난무하고 군인들이 죄없는 집에 군홧발로 들어가서 아수라장을 만드는 세계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안에서 수십 년째 살고 있다. 그들의 삶 자체가 감옥인 셈이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테지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 작가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지금부터 20년 전이다. 그 20년 동안 많은 것들이 좋은 쪽으로 변했기를 바란다. 아주 많은 것들이.

덧붙이는 글 | <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 함규진 옮김. 글논그림밭 펴냄.



태그:# 팔레스타인, #조 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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