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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을 아포리즘(aphorism)이라고 한다. 이런 아포리즘은 내가 사는 도시 곳곳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전철역의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려고 변기 앞에 서거나 앉으면 여지없이 격언을 적은 메모판이 눈 앞에 나타난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이런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심지어 동네 뒷산의 산책로에도 교훈을 담은 짧은 글들이 길목마다 써있다. '성공을 확신하는 것이 성공에의 첫걸음이다'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걷는 산책길에도 성공을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시대다.

<하악하악>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청춘불패> 등 언어의 연금술사 같은 그의 독특한 아포리즘을 담은 에세이집들이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다 못해 '외수 마니아'를 양산하고 있다. 소설 말고는 에세이나 시집 등의 책은 안 팔리는 한국 출판계에 놀라운 현상이다. 아마도 마르지 않은 샘물같은 그의 촌철살인의 내공이 시대와 소통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불류시불류 (我不流 時不流)>. 도서관 신간 서고에서 마주친 이외수 작가의 책 제목이다. 범상치 않은 제목에 시선을 끌리고 무슨 고사성어 인가 해서 속으로 뜻풀이도 해본다. 해석이 잘 안되자 이거 혹시 괴짜 작가 이외수식의 욕이 아닐까 의심을 해보는 사이 책 겉표지를 넘기니 바로 우리말로 써있다. '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이란다. 그의 아포리즘은 이런식이다. 그만의 감성사전처럼 참신하고 감각적이다. 가볍디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무겁디 무겁기도 하다.

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당신의 과거가 당신의 현재를 만들고 당신의 현재가 당신의 미래를 만든다면 물처럼 살아갈 일이다. 낮은 곳으로만 낮은 곳으로만 흘러서 어제는 옹달샘이었다가 오늘은 실개천이 되고 오늘은 실개천이었다가 내일은 큰 바다가 되는, 물처럼 인생을 살아갈 일이다." - 본문 중

아불류 시불류(我不流 時不流), 무슨 주문을 외우는 듯한 이 말은 물의 유연한 삶을 이야기 하는 것 같고, 나태한 삶을 경계 하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담장을 만나면 돌아가고 개울을 만나면 같이 천천히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흘러가는 물처럼 그렇게 중단없이 자신의 삶과 길을 향해 굿굿하게 나아가라는 뜻이리라.

이외수의 감성사전은 나태를 이렇게 정의한다 '나태란 놈이 나이를 먹으면 무능력, 무일푼, 무개념으로 삼단 변신이 가능해진다' 읽는 동안 뜨끔하면서도 스스로 반성하게 한다. 나의 나태가 변신을 꾀하기 전에 놈을 물리쳐야 겠다.

그의 책을 펴면 소통의 향기가 난다

"무엇이 푸르냐고 나에게 묻지 말라. 그대가 푸른 것이 곧 진실이다."

책 <아불류시불류>속의 이외수식 소통은 이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얘기하고 평화를 부르짖지만 정작 자기 안의 소통과 평화를 꺼내려 하기 보다는, 타인에게서 찾으려고만 한다. 남들과 소통이 안 된다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의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무언가가 느껴질것이다.

그의 책에는 신조어도 많이 보이는데 작가가 트위터에 쓴 글들을 모아서 엮은 것이라고 한다. 동식물을 주로 그리는 화가 정태련님의 그림도 글과 잘 어울린다. 이외수 작가는 무려 12만명의 팔로워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 '트위터계의 대통령' '트위터계의 간달프' 불리는 분 다운 소통의 달인이다. 

이외수의 책을 펼쳐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디선가 비누 향기가 난다. 책에 무슨 짓(?)을 했는지 정말 책속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서 코를 책에 대고 맡아보기까지 했다. 책을 읽다가 그림 엽서같은 책갈피가 나와 보니, 향기가 나는 책갈피였다. '당신의 사랑이 자주 흔들리는 이유는 그것이 진품이 아니기 때문이다'란 글을 읽는 순간 코 끝에 걸려있는 책속의 아카시아 향기가 진하게 머리속에 각인된다.

때로는 글 한 줄이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짤막한 꼭지별로 조금은 숨을 내쉬어가며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 음미하고, 또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바와 내가 생각했던, 그리고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 조금은 더 생각해가며 천천히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트위터의 140자안에서 구현되는 짧디 짧은 구절들이 내 생활속에 슬며시 들어와 고개를 내밀고, 저마다의 삶을 버거워 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위안을 준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얼마나 오랜시간 신중했을 것이고, 동트는 새벽녘까지 문장을 갈고 닦았을까 미루어 짐작이 간다. '문학은 글로 표현하는 예술'이라더니 이런 예술이라면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이 험난한 세상에 사랑 하나도 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욕심을 버리고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달을 바라보고, 또 비가 오는 날이면 파전에 막걸리를 떠올리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 '부자 되세요'가 인삿말이 되버리고 그렇게 행복하기를 원하는 지극히도 메마른 영혼을 가진 우리에게 그의 아포리즘은 단순한 격언이나 어록 이상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행복해지고 싶으신가요
계절이 변하면 입을 옷이 있고
허기가 지면 먹을 음식이 있고
잠자기 위해 돌아갈 집이 있다며
마음 하나 잘 다스릴 일만 남았습니다.

이외수 작가는 1954년생이니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의 할아버지다. 자기와 가치관과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배척하고 심지어 공격하려고 하는 '어버이 연합'을 연상시키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런 나이에도 어쩌면 이렇게도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가 살아온 인생길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는데, 온갖 역경과 고생을 다 겪고도 어쩜 이런 마음을 지켜냈을까. '세상 살면서 고생도 하고 겪어봐서 내가 아는데...'라며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고 사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 한줄기 희망같은 작가이며 책이다.


아불류 시불류 - 이외수의 비상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해냄(2010)


태그:#이외수, #아불류시불류, #정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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